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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XI. THE DEAD CHURCH

XI. 죽은 교회

The teaching of Christ establishes the kingdom of God on earth. It is not true that the fulfillment of this teaching is difficult; it is not only not difficult, but it is inevitable for a man who has comprehended it. This teaching supplies the only possible salvation from the inevitably impending destruction of per­sonal life. Finally, not only does the fulfillment of this teaching not call us to sufferings and depriva­tions in this life, but it releases us from nine-tenths of the sufferings we endure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실행이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한 사람에게는 피할 수가 없다. 이 가르침은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개인적인 삶의 파멸로부터의 유일하게 가능한 구원을 제시해 준다. 결국, 이 가르침의 실행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우리에게 고통과 결핍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르침을 위하여 우리가 겪는 고통들의 구 할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And having understood this I asked myself; why, till now, have I not fulfilled this teaching which offers me welfare, salvation, and happiness, but have followed quite a different teaching- that which has made me unhappy? And the only answer that could be given was: I did not know the truth, it was hidden from me.

나는 이것을 깨닫고 나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지금까지, 나는 나에게 안녕과 구원과 행복을 주는 이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고 전혀 다른- 나를 불행하게 만든-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진리를 몰랐다, 그것은 내게 숨겨져 있었다.

When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revealed itself to me for the first time I had no idea that the elucidation of that meaning would cause me to repudiate the teaching of the Church; it merely seemed to me that the Church had not reached the conclusion which flows from Christ's teaching, but I did not suspect that the new meaning of Christ's teaching which had revealed itself to me, and the deductions which followed therefrom, would separ­ate me from the teaching of the Church. I was afraid of that, and therefore during my researches, far from seeking for mistakes in the Church's teaching I on the contrary intentionally shut my eyes to such propositions as seemed to me obscure and strange, but which did not contradict what I considered to be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teaching.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가 처음으로 내게 밝혀졌을 때, 나는 이런 의미의 설명이 나로 하여금 교회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내게는 단순히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나에게 밝혀진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새로운 의미와 그것으로부터 나온 추론이 나를 교회로부터 이탈시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의 연구 기간 동안, 교회의 가르침의 오류들을 찾기는커녕 그와 반대로 나는 그러한 명제들이 내게 있어서 모호하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의 가르침의 본질과 모순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던 것이다.

But the further I traveled in the study of the Gospels and the more clearly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revealed itself to me, the more inevitable became the choice between the teaching of Christ- reasonable, clear, accordant with my conscience and giving me salvation- and the directly opposite teaching, disagreeing with my reason and conscience and giving me nothing except a consciousness of destruction for myself and others, and I could not help rejecting the Church's propositions one after another. I did this un­willingly, with a struggle, and with a desire as far as possible to soften my disagreement with the Church, not to separate from it and not to deprive myself of that most joyous support to one's faith-  community with many people. But when I had finished my work I saw that, try as I might to re­tain at least something of the Church's teaching, nothing remained. Not only did nothing remain, but I was convinced that nothing could remain. During the conclusion of my work the following incident occurred. My young son told me that two quite uneducated and scarcely literate people, who were our servants, had had a dispute about a passage in a religious book in which it was said that it is not a sin to kill criminals or kill people in war. I did not believe that this could have been printed, and I asked to have the book shown to me. The booklet which had provoked the dispute was called An Explanatory Prayer-book (3rd edition, 80th thousand, Moscow, 1879). On page 163 of that booklet is said:

그러나 내가 복음서의 연구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가 내게 명확히 밝혀지면 질수록, 합리적이고, 명료하며, 나의 양심과 일치하며 나에게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정 반대로, 나의 이성과 양심과 일치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의식만 주는 가르침 사이의 선택은 더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교회의 명제들을 하나씩 거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일을 마지 못해서, 발버둥치며, 그리고 가능한 한 교회와 나의 불일치를 누그러뜨리고, 교회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서 신앙의 가장 즐거운 기반-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 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의도로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작업을 마쳤을 때, 비록 교회의 가르침에서 최소한 어떤 것은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의 작업이 마무리 될 지음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나의 어린 아들이 내게 해 준 이야기다.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거의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우리 집의 두 하인들이 전쟁에서 범죄자나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어떤 종교 서적의 한 구절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나는 이런 내용이 인쇄되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을 내게 보여달라고 말했다. 논쟁을 야기한 그 소책자는 기도해설서(3판, 80만부ㅡ 모스크바 1879)라는 제목이었다. 163페이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What is the sixth of God's commandments? Thou shalt not kill. What does God forbid in this commandment? He forbids us to kill- that is to say, to deprive men of life. Is it a sin legally to punish a criminal with death, or to kill one's enemies in war? It is not a sin. A criminal is de­prived of life in order to stop the great evil which he commits; enemies are killed in war because in war one fights for one's ruler and country.' And to those words is limited the explanation of why the commandment of God is repealed. I did not be­lieve my eyes.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제 6계명은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 이 계명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금지하는가? 우리에게 살인하는 것을 금지하신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범죄자를 법에 의해서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 또는 전쟁에서 적을 살인하는 것은 죄인가? 그것은 죄가 아니다. 범죄자는 그가 저지르는 커다란 악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적들을 죽이는 것은 전쟁에서 우리는 우리의 통치자와 국가를 위해서 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들에서 왜 하나님의 계명이 취소되는지 설명에 한계를 그었다.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The disputants asked my opinion about their difference. I told the one who considered that what the book said was right that the explanation was incorrect.

논쟁을 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이견에 대해 나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그 책이 말한 것을 옳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그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How is it that people print what is wrong and contrary to the law?' said he. I had no reply to give him. I kept the book and looked it all through. The book contains () thirty-one prayers, with instruc­tions about genuflections and how to hold one's fingers when crossing oneself; (2) an explanation of the Creed; (3) a quite unexplained extract from the fifth chapter of St. Matthew, which for some reason is called, 'Commands for obtaining bliss'; (4) the Ten Commandments of Moses with explanations, which for the most part annul them; (5) hymns for Church Festivals.

‘어찌하여 사람들이 틀린 것과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인쇄합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줄 답변이 없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가서 통독을 해 보았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31가지의 기도, 무릎 꿇기, 그리고 성호를 그을 때 손가락을 쥐는 방법; (2) 교리의 설명; (3) 마태복음 5 장의 전혀 설명이 없는 발췌문,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축복을 받는 명령들’이라고 불렸다; (4) 설명이 있는 모세의 10계명, 이 설명들은 대부분 10계명을 폐지하는 내용이었다; (5) 축일들을 위한 성가.

As I have said, I not only tried to avoid con­demning the faith of the Church, but I tried to see it in the best light and therefore did not seek for its weaknesses, and though well acquainted with its academic I was quite unacquainted with its pedago­gic literature. The circulation in 1879 of such an enormous number of copies of a prayer-book which evoked the doubts of the simplest people amazed me. I could not believe that the plainly pagan contents of the prayer-book (having nothing in common with Christianity) were the teaching the Church de­liberately disseminated among the people. To verify this, I bought all the books published by the Synod or with its blessing and containing brief statements of the Church's faith for children and the common people; and I read them through.

내가 이미 말했듯이, 나는 교회의 신앙을 비난하기를 피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최선의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의 약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교회의 학문적인 것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의 교육용 자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가장 단순한 사람들의 의혹들을 불러 일으킨1879년의 그토록 많은 부수의 기도서의 유포는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기도서의 명백히 이교적인(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 교회가 사람들 사이에 의도적으로 전파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교회기관이나 그 기관의 축복으로 발행되었으며 아동들과 보통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신앙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는 모든 책들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어 나갔다.

Their contents were for me almost new. When I had Scripture lessons, such matter did not exist. There were then, so far as I can remember, no 'Commands for obtaining Bliss', nor was there the teaching that to kill is not a sin. It is not found in any of the old Russian catechisms. It is not in the catechisms of Peter Mogila, nor in the catechism of Platon, nor in the catechism of Balyakov, nor in the short Catholic Catechisms. This novelty was intro­duced by Filaret, who also drew up a catechism for the use of the Army. The Explanatory Prayer-book is drawn up in accord with that catechism. The fundamental book is the 'Long Christian Catechism of the Orthodox Church, for the use of all Orthodox Christians, published by order of His Imperial Majesty'.

그것들의 내용은 내게 있어서 거의 새로운 것이었다. 내가 성경학습 반에 나갈 때도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축복의 계명’은 없었으며, 살인이 죄가 아니다라는 가르침도 없었다. 러시아의 전통있는 어떤 교리 문답서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것은 피터 모질라의 교리 문답서에도 없었으며, 플라톤의 교리 문답서에도 없었고, 발리야코프의 교리 문답서에도 없었다. 이런 새로운 내용은 필라레트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그는 또한 군사용 교리문답을 만든 사람이었다. 기도 해설서는 그와 같은 교리 문답서에 맞추어 정리한 것이었다. 기초가 되었던 책은 모든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위한, ‘정교회 장편 기독교 교리 문답’이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발행되었다.

That book is divided into three parts: On Faith, On Hope, and On Love. In the first part is an analysis of the Nicene Creed. In the second part an analysis of the Lord's Prayer, and the eight verses of the fifth chapter of Matthew forming an intro­duction to the Sermon on the Mount, and for some reason called 'Commands for obtaining bliss'. (Both these parts treat of Church dogmas, of prayers and sacraments, but give no teaching at all about life.) In the third part the duties of a Christian are set forth. In this part, called 'On Love', are set out, not the commandments of Christ, but the Ten Commandments of Moses, and these are set out as though only to teach people not to fulfill them but to act in opposition to them; as, after each commandment, there is a reservation which cancels it. With reference to the first com­mandment, which orders us to honor one God, the catechism teaches us to honor angels and saints, besides, of course, the Mother of God and the three Persons of the Trinity (Long Catechism, pp. 107, 108). With reference to the second commandment, not to make to oneself idols, the catechism teaches the obeisance before icons (p. 108). With reference to the third commandment, not to take oaths in vain, the catechism teaches people to swear on any demand of the legal authorities (p.111). With reference to the fourth commandment, to observe Saturday, the catechism teaches us to keep not Saturday but Sunday, and thirteen great holidays and a multitude of smaller ones, and to observe all the Fasts, including Wednesdays and Fridays (pp. 112-15). With reference to the fifth commandment, to honor one's father and mother, the catechism teaches us to honor the Tsar and the Fatherland, one's spiritual pastors 'and those in various positions of authority' (sic) and on honoring those in authority there are three pages with an enumeration of all kinds of authorities : 'Those in authority in schools, the civil authorities, the judges, the military authorities, one's masters (sic). This last injunction refers to those who serve them and whom they command' (sic-pp. 116-19).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신앙에 대하여, 희망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제 1부는 니케아 신조의 분석이다. 제 2부는 주 기도문과 마태복음 5장 8절의 분석으로서, 산상수훈의 서문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축복을 얻는 계명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두 부분은 교회의 교리, 기도와 성례들을 다루지만, 삶에 관한 가르침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제 3부는 기독교인의 의무들이 제시된다. ‘사랑에 대하여’라 불리는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이 아니라, 모세의 10계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마치 사람들이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불복종하도록 제시되고 있는 것 같았다; 각각의 계명 뒤에는 그것을 취소하는 단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제 1계명에 대한 참조로, 교리 문답은 천사들과 성자들, 물론, 성모 그리고 삼위일체를 공경하라고 가르친다.(장편 교리 문답 p.107, 108),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 계명과 관련해서, 교리 문답은 성상에 대한 예배를 가르친다(p.108). 헛되이 맹세하지 말라는 제 3계명에 대해서, 교리 문답은 사람들에게 합법적인 당국들의 어떤 요구에도 맹세할 것을 가르친다(p.111).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제 4 계명에 대해서 교리 문답은 토요일을 지키지 말고 일요일과 13번의 대 축제일과 무수한 경미한 날 들, 그리고 수요일과 금요일을 포함하는 모든 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친다(p.112-15).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에 대해서 교리 문답은 황제와, 조국과 영적인 목사들 ‘그리고 다양한 직위의 권력을 지닌 당국자들’을 공경할 것을 가르치며, 권력을 지닌 자들을 공경함에 있어서 모든 권력 서열을 열거하고 있는 3페이지가 할당되어 있었다: ‘학교 당국자들, 행정 당국자들, 재판관들, 군 당국자들, 주인들. 여기의 마지막의 명령은 사람들이 봉사해야 하고 명령을 받아야 하는 상전들을 말한다(p. 116-19).

I am quoting from the 1864 edition of the Cate­chism, Twenty years have passed since the aboli­tion of serfdom and no one has taken the trouble even to strike out the sentences which, with refer­ence to the commandment of God to honor one's parents, were included in the Catechism for the maintenance and justification of slavery. With reference to the sixth commandment, 'Thou shalt not kill', from the first lines one is taught to kill.

나는 1864년 발간된 교리 문답에서 인용하고 있다, 농노가 폐지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심지어, 어느 누구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참조가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교리 문답에 포함된 문장들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에 대해서는, 첫번째 행에서 우리는 살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Q. What is forbidden in the sixth command­ment?

문: 제6계명에서 무엇을 금지하는가?

A. Murder, or the taking of life from one's neighbor in any manner.

답: 살인,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의 이웃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Q. Is every taking of life a sinful murder?

문: 생명을 빼앗는 것은 모두 죄를 짓는 살인인가?

A. It is not sinful murder when life is taken in the fulfillment of one's duties, for instance: (i) When a criminal is punished with death by legal sentence. (ii) When enemies are killed in war for ruler and country. (The italics are in the original.) And further;

답: 우리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생명을 빼앗을 때는 죄를 짓는 살인이 아니다, 예를 들면 : (i) 법의 선고에 의해서 죄인이 사형에 처해질 때. (ii) 통치자나 국가를 위해서 전쟁에서 적들이 살해될 때. (이탤릭 체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인용하면,

Q. What occasions can be regarded as criminal murder?

문: 어떤 경우들이 범죄적인 살인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가?

A. When anyone hides or releases a murderer.

답. 누가 살인자를 감추거나 놓아줄 때.

And this is printed in hundreds of thousands of copies and is instilled forcibly, with threats and under fear of punishment, into all Russian people under the guise of Christian doctrine. This is what the whole of the Russian people are taught; this is what all the innocent angel children are taught-  those children whom Christ wished not to have driven away from him because 'theirs is the kingdom of God';- those children whom we must resemble in order to enter the kingdom of God (resemble by not knowing such teaching); those children, in, defense of whom Christ said, 'Woe unto him that causeth one of these little ones to stumble'. And it is these children to whom this is forcibly taught and who are told that this is the only and the sacred law of God.

그리고 이런 내용이 수십만 부씩 인쇄되어서, 기독교의 교리로 가장하여, 모든 러시아 사람들에게, 협박과 처벌의 두려움으로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 이것이 러시아 국민 전체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어린 천사들이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는 저들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서 쫓아버리지 말라고 했던 그 어린이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닮아야 하는(그러한 가르침을 모름으로써 닮아야 하는) 그 어린이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말하기를, ‘저 소자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자는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한 그런 어린이들. 그리고 바로 이런 어린이들이, 이것이 바로 유일하며 신성한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강압적으로 배우며 듣고 있는 것이다.

This is not a proclamation circulated secretly under fear of imprisonment, but a proclamation disagreement with which is punished by imprison­ment. I now write this and I am frightened that I even allow myself to say that one cannot repeal God's chief law, written in all the codes and in all our hearts, by words which explain nothing, 'in the fulfillment of one's duties to King and country', and that people should not be taught so.

이것은 투옥이 두려워서 비밀리에 배포되는 선언문이 아니라, 이것은 지키지 않으면 투옥되는 선언문이다. 나는 이제 이 글을 쓰면서, 모든 조항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중요한 율법을 ‘황제와 국가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준수함에 있어서’라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로서 우리가 폐지할 수 없으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지어 나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 놀라고 있다.

Yes, that has come about which Christ foretold (Luke xi. 35, 36; Matt. vi. 23): 'Look therefore whether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not darkness. If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darkness, how great is the darkness!'

그렇다, 그리스도가 예언했던 것이 일어난 것이다(누가복음 12장 35,36절; 마태복음 6장 23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The light that is within us is become darkness, and the darkness in which we live has become terrible.

우리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어두움은 무서운 것이 되었다.

'Woe unto you', says Christ,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e shut the kingdom of heaven against men: for ye enter not in yourselves, neither suffer ye them that are enter­ing in to enter.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devour widow's houses, even while for a pretence ye make long prayers: therefore ye shall receive greater condemnation.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com­pass sea and land to make one proselyte; and when he is become so, ye make him worse than before. Woe unto you, ye blind guides!

그리스도는 말한다, ‘화 있을지어다 위선자 바리새인이여 너희는 사람들 앞에 천국의 문을 닫고 스스로 들어가지도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자가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도다. 화 있을지어다 위선자 바리새인이여 너희들 과부집을 탐식하여 돌아나디며 긴 기도를 올리나니 이에 의하여 너희들 한층 더 죄를 짓게 되느니라. 화 있을지어다 위선자 바리새인이여 너희는 개종자를 얻기 위하여 해륙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미 얻으면 이를 그전보다 한층 나쁜 것으로 하느니라. 화있을지어다 눈먼 안내자여!’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build the sepulchers of the prophets, and garnish the tombs of the righteous, and say. If we had been in those days when the prophets were tortured, we should not have been partakers in their blood. Ye are witnesses against yourselves, that ye are sons of them that slew the prophets. Fill ye up then the measure begun by those who were like yourselves. I will send unto you prophets and wise men; some of them ye will kill and crucify; and some of them ye will scourge in your assemblies, and expel from city to city; that upon you may come all the righteous blood shed on the earth since Abel.' 'Every blasphemy [libel] will be forgiven to men, but the libel against the Holy Spirit cannot be for­given.' All this reads as though it had been written yesterday against those who now no longer compass the sea and the land, libeling the Holy Spirit and leading people to a belief which makes them worse, but directly, by violence, oblige them to accept that belief, and persecute and destroy all those prophets and wise men who attempt to expose their fraud.

‘화 있을지어다 위선자 바리새인이여 너희는 선지자의 무덤을 세우고 위인의 무덤을 장식하느니라. 그리고 너희가 만일 선지자가 고문을 당한 그 시대에 있었다면 너희는 선지자가 피를 흘리신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으리라. 이처럼 너희는 선지자를 죽인 자와 같은 자라는 것을 자인하리라 너희들과 같은 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치수를 채워라. 그러므로 보라, 나 너희에게 어진 선지자와 예언자를 보낼지니 그 중 어떤 자를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어떤 자를 너희 회당에서 때리고 마을에서 마을로 쫓아버리라. 이로써 의인 아벨 이래로 지상에 흘린 옳은 피는 모두 너희에게 보답하리라.’ ‘모든 모독[비방]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을 것이나 성령을 비방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바다와 육지를 돌아 다니지 않지만, 성령을 비방하고 사람들을 더욱 악하게 하는 믿음으로 끌고 가며, 또한 직접적으로 폭력에 의해서 그들에게 그러한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며 그들의 사기를 폭로하려는 모든 선지자들과 의로운 자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마치 어제 쓰여진 것처럼 보여진다.

And I became convinced that the Church's teaching, although it calls itself Christian, is that very darkness against which Christ strove and ordered his disciples to strive.

그리고 나는 교회의 가르침이, 비록 그 자체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도가 싸웠으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한 바로 어둠 그 자체라고 확신한다.

Christ's teaching, like every religious teaching, has two sides: (i) The teaching of conduct- of how we should live, each separately and all together-  the ethical teaching; and (ii) the explanation of why people should live in that way and not other­wise- the metaphysical teaching. The one is the result and at the same time the cause of the other. Man should live so, because such is his destiny: or the destiny of man is such, and therefore he should live so- these two sides of Christ's teaching are to be found in all the religions of the world. Such is the religion of the Brahmins, of Confucius, Buddha, and Moses, and such is the religion of Christ. He teaches life, how to live, and he gives the explanation why that is how one should live. But as it was with all other teachings- Brahmanism, Judaism, Buddhism- so was it with the teaching of Christ. People lapse from the teaching of life, and among them some are found who undertake to justify that lapse. These people seating themselves, to use Christ's expression, in the seat of Moses, explain the metaphysical side of the teaching in such a way that the ethical demands cease to be obligatory and are replaced by an external service of God- by ritual. This phenomenon is common to all re­ligions, but never, I think, has it been displayed so sharply as in Christianity. It has been displayed with such exceptional sharpness because the teach­ing of Christ is the highest teaching; and it is the highest because the metaphysics and ethics of Christ's teaching are so inseparably united and are so denned by one another that to separate them is impossible without depriving the whole teaching of its meaning, and also because Christ's teaching is in itself a Protestantism- that is to say, a denial not merely of the ritual observances of Judaism but of every external worship of God. And therefore of necessity in Christianity this tearing asunder com­pletely perverts the teaching and deprives it of any meaning. And so it was. The sundering of the teaching of life from the explanation of life began with the preaching of Paul, who did not know the ethical teaching expressed in the Gospel of Matthew and who preached a metaphysical-cabalistic theory foreign to Christ; and this separation was finally completed at the time of Constantine, when it was found possible to clothe the whole heathen order of life in a Christian dress and therefore to accept it as Christianity without altering it.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다른 모든 종교적 가르침과 같이, 두 가지 측면들이 있다: (i) 우리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모두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행위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윤리적 가르침; 그리고 (ii)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이 그것들이다. 전자는 후자의 결과이며 동시에 원인이다.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또는 사람의 운명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이 같은 두 가지 측면은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 바라문교, 유교, 불교, 그리고 모세의 종교가 그러하다. 그는 삶을 가르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모든 다른 가르침- 바라문교, 유대교, 불교- 들에서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삶의 가르침에서 이탈하고,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탈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윤리적인 요구들이 의무적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외면적인 봉사- 의례- 로서 대체되는 방향으로, 가르침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모든 종교에 공통적이지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만큼 첨예하게 나타난 적이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토록 예외적인 첨예함으로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최고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은 너무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서로에 의해서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떼어낸다는 것은 가르침의 전체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청교도주의- 다시 말하자면, 유태교의 의식적인 준수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외면적인 숭배의 부인-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 필요성으로 보아, 이처럼 떼어내어서 분리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게 되며, 모든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러했다. 삶의 가르침과 삶의 설명의 분리가 바울의 설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울은 마태복음에 표현되어 있는 윤리적 가르침을 몰랐으며 그리스도에게는 관계없는 형이상학적- 신비주의적인 이론을 설교하였다; 그리고 이런 분리는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완성되었다, 그러자 이교적 삶의 질서 전체에 기독교의 옷을 입히고, 그러므로 이교적 삶의 질서를 바꾸지 않고서 기독교를 받아 들임이 가능해진 것이다.

From the time of Constantine- a heathen of the heathen whom the Church for all his crimes and vices numbers with the company of the saints-  begin the Ecclesiastical Councils, and the center of gravity of Christianity is transferred completely to the metaphysical side of the teaching. And that metaphysical teaching with the ceremonies that accompany it, diverging even more and more from its fundamental meaning, reaches its present stage - a teaching which explains the most incompre­hensible mysteries of life in heaven and gives a most complex ritual of divine service, but supplies no religious teaching concerning our life on earth.

콘스탄티누스- 이교도 중에서도 이교도로서, 교회에서는 그의 모든 범죄와 악덕들에 대해서 그를 성인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시대로부터, 주교회의가 시작되며,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가르침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으로 완전히 넘어간다. 그리고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가르침과 이를 동반하는 의식들은, 근본적인 의미로부터 심지어 더욱더 멀어지면서, 오늘날의 단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의 신비를 설명해주며 가장 복잡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의식을 행하지만,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관한 아무런 종교적 가르침을 제공하지 못하는 가르침- 까지 도달한 것이다.

All religions except Church Christianity demand from their adherents, besides ceremonies, the per­formance of certain good actions and abstention from certain bad ones. Judaism demands circum­cision, the keeping of the Sabbath, the giving of alms, the observance of the Jubilee year, and much else. Mohammedanism demands circumcision, prayer five times a day, tithes for the poor, worship at the prophet's tomb, and much else. And so with all the other religions. Whether these demands are good or bad, at any rate they demand certain actions. Only pseudo-Christianity demands no­thing. There is nothing that it is definitely obliga­tory for a Christian to do or from which he must definitely abstain, if one does not count fasts and prayers which the Church itself admits to be non-obligatory. All that is necessary for the pseudo-Christian are the sacraments. But the sacrament is not done by the believer himself, it is performed over him by others. A pseudo-Christian is not bound to do anything, and is not bound to abstain from anything, in order to be saved, but all that is necessary is performed over him by the Church: he is baptized, and anointed, and communion is given him, as well as extreme unction, and absolution is even granted on an inarticulate confession, and he is prayed for- and saved! The Christian Church since the time of Constantine has not demanded any actions from its members. It has not even put for­ward any demands of abstinence from anything. The Christian Church recognized and sanctified everything that existed in the heathen world: it recognized and sanctified divorce, and slavery, and courts of justice, and all the state authorities that existed, and wars and executions, and it only de­manded, at baptism, a verbal renunciation of evil, and that only at first; afterwards, with the intro­duction of infant baptism, it ceased even to demand that.

교회의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추종자로부터, 의식뿐만 아니라, 특정한 선행들의 실행과 특정한 악행의 금지를 요구한다. 유대교는 할례, 안식일의 엄수, 자선, 안식년의 준수 및 기타 많은 것을 요구한다. 회교는 할례, 하루 다섯 번의 기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 선지자들의 무덤에 예배, 및 기타 많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들도 그렇다. 이런 요구들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어쨌든 특정한 행위들을 요구한다. 오직 사이비 기독교만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 자체에서 의무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단식들과 기도들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에게는 정확히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거나, 정확히 금해야 하는 것이 정확히 아무것도 없다. 사이비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성례들이다. 그러나 성례는 신자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을 위해 행해진다. 사이비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것도 할 의무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없으며, 필요한 모든 것은 그를 위해 교회에 의해서 행해진다: 그는 세례 받고, 기름부음 받으며, 성찬, 뿐만 아니라 병자성사 그리고 심지어 사면조차 중얼거리는 고백을 하며 주어진다, 그리고 기도를 받는다- 그리고 구원된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이교도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것을 인정하며 신성시 하였다: 교회는 이혼, 노예제도, 법정,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국가 권력들, 그리고 전쟁과 사형들을 인정하고 신성시 하였고, 교회는 세례할 때 오직 말로만 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것을 오직 처음에만 요구하였다; 이후에는, 유아 세례의 도입으로, 심지어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을 중단했다.

The Church, acknowledging Christ's teaching in words, directly rejected it in life.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말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분명히 부인하고 있다.

Instead of guiding the life of the world, the Church, to make itself agreeable to the world, interpreted Christ's metaphysical teaching in such a way that no demands relating to life resulted from it, so that it did not prevent people from living as they had done before. The Church yielded to the world and, having done so once, it followed the world's way. The world did whatever it liked, allowing the Church to shape its explanations of the meaning of life accordingly as best it could. The world in everything arranged its life contrary to Christ's teaching, and the Church devised allegories to show that people while living contrary to Christ's law live in accord with it. And finally the life of the world became worse than heathen life had been, and the Church not merely justified that life but asserted that it was in agreement with Christ's teaching.

세상의 삶을 인도하는 대신에, 교회는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삶에 관련하여 아무런 요구들도 나올 수 없도록 해석하였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이전에 행했던 것처럼 사는 것을 막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하자, 교회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갔다. 세상은 교회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였으며, 교회가 최대한 세상에 걸맞게 삶의 의미를 해석하도록 맡겨두었다. 세상은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도록 그 삶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에 반대로 살아가는 한편, 그것에 따라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비유들을 고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삶은 이교도의 삶이 그랬던 것보다 더 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삶을 합리화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But a time came when the light of Christ's true teaching which was in the Gospels, despite the fact that the Church feeling its own falsity tried to hide it by forbidding translations of the Bible - a time came when this light (through those who were called sectarians and even through worldly free­thinkers) made its way among the people and the falsity of the Church's teaching became evident to men and they began to alter their way of life (which the Church had justified) to life on the basis of Christ's teaching which had made its way to them independently of the Church.

그러나, 때는 왔으니, 복음서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의 가르침의 빛이, 자기 자신의 거짓을 느낀 교회가 이 빛을 성서의 번역을 금지함으로써 숨기려고 애써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 때는 왔으니, 이 빛이 (분파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 세상의 자유 사상가들을 통해서)사람들 사이에 길을 헤치고 나타났으며, 교회의 가르침의 거짓은 사람들에게 명백해져서, 그들은 (교회가 합리화시켜 놓았던)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교회와 독립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는 삶으로 바꾸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

So people themselves, apart from the Church, abolished slavery (which the Church had justified) and religious executions, and abolished the power (sanctified by the Church) of the Emperors and Popes, and have now begun the task which presents itself next in turn: the abolition of property and of the State. And the Church did not defend and cannot defend any of these things, because the abolition of these wrongs in life took place, and is now taking place, on the basis of that same Christian teaching which was preached and is preached by the Church however it tries to pervert it.

그리하여 사람들은 스스로가, 교회와는 별도로, (교회가 정당화했던) 노예제도와 종교 재판들을 폐지하였고, (교회가 인정하였던) 황제와 교황의 권력을 폐지하였으며, 그리고 다음 차례에 나타나는 과제를 시작했다: 재산과 국가의 폐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저항하지 않으며, 저항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삶에 있어서 과오들의 폐지는 교회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려고 애를 써도, 교회에 의해서 설교되었으며 지금도 설교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The guidance of the life of man has emancipated itself from the Church and established itself independently of the Church.

사람의 삶에 대한 지침은 교회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세워졌다.

The Church retains an explanation, but an ex­planation of what? The metaphysical explanation of a teaching has significance when the teaching of life which it explains exists. But the Church has no teaching of life left. It had only an explanation of a life it instituted once upon a time and which no longer exists. If the Church still retains an explanation of that life which used to exist (like the explanation in the Catechism that officials ought to kill) no one any longer believes it. And the Church has nothing left but cathedrals, icons, brocaded vestments, and words.

교회는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슨 설명일까? 가르침의 형이상학적인 설명은 그것이 설명하는 삶의 가르침이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삶에 대한 아무런 가르침이 남아있지 않다. 교회는 오직 과거에 만들었던 삶의 설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가 과거에 있었던 (마치 관리들이 살인해야 한다는 교리 문답의 설명처럼) 그런 삶의 설명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더라도, 아무도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에는, 성당, 성상, 금실을 단 제복과 설교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The Church carried the light of Christian teach­ing of life through eighteen centuries, and wishing to hide it under its garments has itself been burnt up by that flame. The world, with its arrangements sanctified by the Church, has repudiated the Church in the name of those very principles of Christianity which the Church has reluctantly borne; and the world now lives without the Church. That fact is accomplished and to hide it is impossible. All that is really alive- and does not linger on in angry dejection not really living but merely hindering others from doing so- all that really lives in our European world has rejected the Church, and all churches, and lives its own life independently of the Church. And let it not be said that this is so in 'rotten western Europe'; our Russia, with its millions of rationalist Christians, educated and uneducated, who have rejected Church teaching, proves beyond dispute that Russia, in regard to the repudiation of the Church, is, thank God, far more 'rotten' than the rest of Europe.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의 가르침의 빛을 18세기 동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옷 아래에 감추려 하다가 자신이 그 화염으로 타버리고 말았다. 세상은, 교회가 정당화해주던 제도들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가 억지로 보관하고 있던 기독교의 원리들 그 자체의 이름으로 교회를 버렸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교회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실은 완성되었으며, 이것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하게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감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을 그렇게 행함을 방해하면서, 성난 슬픔 속에서 삶을 연명하지 않고- 우리의 유럽 세계에 진실하게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를, 모든 교회를 버렸으며,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썩어빠진 서구유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을 받았든 못 받았든,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 수백만의 합리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의 러시아는, 교회를 거부함에 관련하여서, 러시아는 하나님 덕택으로 서구유럽보다 훨씬 더 썩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All that is alive is independent of the Church. The power of Government rests on tradition, on science, on popular election, on brute force, and on what you will, only not on the Church.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교회에서 독립되었다. 정부 권력은 전통, 과학, 총선거, 야만적인 폭력,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 위에 의지하고 있지만, 오직 교회만은 의지하지 않는다.

Wars and the relations of the Powers are arranged on the principle of race, balance of power, or what you will, but not on Church principles.

전쟁과 강대국 간의 문제는 민족의 원리, 힘의 균형 또는 당신이 원하는 것에 의하여 처리되고 있으나, 교회의 원리들에 의하여 처리되지 않는다.

The State institutions plainly ignore the Church. The idea that the Church could in our times be the foundation of the law or of property is merely ridiculous.

정부 기관들은 명백히 교회를 무시한다. 우리 시대에 교회가 법률이나 사유재산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단순히 웃음거리일 뿐이다.

Science not only does not co-operate with the Church teaching, but inadvertently, involuntarily, in the course of its development is always hostile to the Church.

과학은 교회의 가르침과 협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그 발전 단계에서 언제나 교회에 적대적이다.

Art, which formerly served the Church exclusively, has now quite departed from it.

예술은, 과거에 절대적으로 교회에 봉사해 왔으나, 지금은 그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다.

It is not merely that life has completely emancipated itself from the Church, life has no relation to the Church; it merely feels contempt for her so long as she does not meddle in the affairs of life and nothing but hatred as soon as she tries to remind it of her former rights. If the form which we call the Church still exists, it is only because people fear to smash a vessel which once held precious contents; only so is it possible to explain the existence in our century of the Catholic, the Orthodox, and the various Protestant Churches.

삶 자체가 교회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삶은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회가 삶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한 삶은 단순히 교회에 대해 경멸을 느끼며, 교회가 과거의 권리들을 상기시키려는 순간 오직 증오만을 느낀다. 만일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형식이 아직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과거에 보물을 담고 있던 그릇을 깨트리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렇게 만이 우리 시대에서 카톨릭, 정교회, 그리고 다양한 개신교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All the Churches- the Catholic, Orthodox, and Protestant- stand like sentinels laboriously on guard over a prisoner who has long since escaped and is now walking about among the sentinels and even fighting them. Everything that now really ani­mates the world- Socialism, Communism, theories of political economy, utilitarianism, the freedom and equality of individuals, of classes, and of women, all man's moral conceptions, the sanctity of labor, the sanctity of reason, of science and of art, all that moves the world and that the Church regards as inimical, all are parts of that teaching which the Church herself has unwittingly handed on together with the teaching of Christ which she sought to conceal. .

모든 교회는- 카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는- 오래 전에 탈출하여 이제 감시병 사이를 돌아 다니며 심지어 그들과 싸우고 있는 죄수를, 애써서 감시하고 있는 감시병처럼 서있다. 이제 진실로 세상을 활기차게 하는 모든 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 경제 이론들, 공리주의, 개인들의, 계급들의, 그리고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 모든 사람의 도덕적 관념들, 노동의 신성함, 이성, 과학, 그리고 예술의 신성함, 세상을 움직이며 교회가 해롭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은 교회가 숨기고 싶어하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교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해준 가르침의 부분들이다.

In our time the life of the world goes its own way quite independently of the Church's teaching. That teaching has lagged so far behind that the men of the world no longer hear the voices of church teachers. Nor is there anything to hear, for the Church only offers explanations of an arrangement of life which the world has already outgrown and which has already ceased to exist or is now being irresistibly destroyed.

우리 시대에는 세상의 삶은 교회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너무나 뒤에 쳐져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교사들의 목소리들을 듣지 않는다. 들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이 이미 앞서 가버린 뒤의 삶의 내용들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 줄 뿐이며,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이제 저항할 수 없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People went rowing in a boat, and a helmsman steered them. The people came to believe in their helmsman, and he guided them well; but the time came when the good helmsman was replaced by another who did not steer. Yet the boat glided on quickly and easily. At first it was not noticed that the new helmsman was not steering and the people were only pleased that the boat moved quickly. But afterwards, having realized that the new helmsman was useless, they began to laugh at him, and dis­missed him.

사람들은 배 안에서 노를 저으며 가고 있다, 그리고 조타수가 키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조타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하게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조타수는 키를 잡아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 때가 왔다. 그러나 배는 빠르게 그리고 순탄하게 미끄러져 갔다. 처음엔 새로운 조타수가 키를 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직 배가 빠르게 나아간다는 사실만을 즐거워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사람들은 새로운 조타수가 쓸모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들은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해고시켜 버렸다.

This would not have mattered, but the trouble was that people, moved by their annoyance with the useless helmsman, forgot that without a helms­man one does not know which way one is going. That is what has happened in our Christian society. The Church does not direct, and it is easy to drift, and we have gone far; and all the successes of science that our nineteenth century is so proud of are but the mileage we have gone without a rudder. We advance, but know not whither. We live and get through our life, and positively do not know why. But it does not do to drift and row not know­ing one's direction, and one must not live and pass through life not knowing why.

이 사건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무능한 조타수에게 화가 난 나머지, 사람들이 조타수가 없다면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사회에 발생한 일이다. 교회는 방향을 잡지 않는다, 그리고 떠내려 가는 것은 쉽다, 그리고 우리는 멀리 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19세기의 과학이 너무나 뽐내고 있는 과학의 모든 성공들은 오직 우리가 방향타도 없이 왔던 항해 거리일 뿐이다. 우리는 전진한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며 나아가지만, 우리가 왜 사는지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방향도 모른 채 표류하며 노를 젓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리고 우리는 사는 이유를 모르면서 삶을 살거나 보내서는 안 된다.

If men did nothing themselves but were placed by some external force in the position they occupy, they might in reply to the question, 'Why are you in this position?' quite reasonably reply. We do not know, but we find ourselves placed as we are. But people make their position for themselves, for others, and in particular for their children, and therefore they must reply to the questions: Why do you enroll others, and have been yourselves enrolled, into armies of millions with which you kill and mutilate one another? Why have you spent, and why are you spending, tremendous human energies, expressed in milliards, on the building of towns un­necessary and harmful to you? Why do you arrange your absurd law-courts and send people you con­sider criminals from France to Cayenne, from Russia to Siberia, and from England to Australia, knowing yourselves that this is unreasonable ? Why do you abandon the field-work you love, for work in factories and workshops which you yourselves dislike? Why do you educate your children so that they should continue this life of which you do not approve? Why do you do all this?

만일 사람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면, ‘당신은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상당히 합리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 있는 우리를 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특별히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들의 자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왜, 서로를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수백만의 군대에, 다른 사람들을 징집하고, 자신이 징집되었는가? 당신들은 왜, 당신들에게 불필요하고 해롭기까지 한 도시들의 건설에 10억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의 에너지를 사용해 왔으며,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들은 왜, 당신들의 불합리한 법정들을 준비하고, 당신들이 범죄자들로 여기는 사람들을 프랑스에서 카이엔느로,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그리고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는가, 당신들 스스로가 이런 일이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 않는가? 당신들은 왜, 자신들이 싫어하는 공장들과 작업장에서 노동하려고, 당신들이 사랑하는 들판에서의 노동을 포기하는가? 당신들은 왜, 당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런 삶을 계속하도록 당신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가? 당신들은 왜, 이 모든 것을 행하는가?

These questions cannot be left unanswered. Even had all these things been pleasant things you like doing, you should be able to give a reason for them. But as they are terribly difficult things and you do them only with effort and with murmurs, it is im­possible for you not to consider why you do them all. It is necessary either to cease to do all this or else to explain why we do it. Without a reply to that ques­tion people never have lived and never can live. And such a reply people have never been without.

이 질문들에는 반드시 대답을 하여야 한다. 심지어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즐거운 일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섭게도 어려운 일들이며 당신을 그것들을 오직 애쓰고 신음하며 행하기 때문에, 당신이 왜 그 모든 것을 행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행하기를 중단하든지 또는 우리가 왜 그것을 행하는 지 설명할 것이 요구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는 사람들은 결코 살았던 적이 없으며 살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런 대답은 사람들이 결코 없이 지내지는 않았다.

The Jews lived as they did- that is to say, fought, executed people, built the temple, and arranged their whole life in one way and not in another, be­cause this was all prescribed by their law which according to their conviction had come down to them from God Himself. So it is with a Hindu or a Chinaman, and so it was with a Roman, and is with a Mohammedan; and the same was the case with a Christian till a hundred years ago; and so it is now for the masses of ignorant Christians. To those questions these ignorant Christians now reply that army-service, wars, law-courts, and executions, all exist by God's law, given to us by the Church. This world is a fallen world. All the evil that exists, exists by the will of God as a punishment for the sins of the world, and we therefore cannot remedy this evil. We can only save our souls by faith, sacraments, prayers, and by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as taught us by the Church. The Church teaches us that every Christian should submit abso­lutely to the Tsar, the anointed of God, and to all officials appointed by him, and should defend by violence his own and other people's property, and should fight, execute, and endure execution, at the will of those God-appointed authorities.

유태인들은 그들이 해왔던 대로 살았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을 하고, 사람들을 처형하고, 성전을 지었으며, 그들의 전체 삶을 오직 한 방향으로 계획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셨다는 그들의 율법에서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인, 중국인도 마찬가지며, 로마인, 회교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백년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인에게도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무지한 기독교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오늘날 이들 무지한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이렇다, 전쟁들, 법정들, 그리고 처형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존재하며,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악들은, 세상의 죄에 대한 처벌로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이런 악을 고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 성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인 황제에게, 그리고 그에 의해서 임명된 모든 관리들에게 복종하여야 하며, 폭력으로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보호해야 하며, 하나님이 임명한 그들 권력들의 뜻에 따라서, 싸우고, 사형을 집행, 사형을 견뎌 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Whether such explanations be good or bad, they explained for a believing Christian- as was the case for a Jew, a Buddhist, or a Mohammedan- all the peculiarities of life; and a man did not renounce his reason when living according to the law he accepted as divine. But now a time has come when only the most ignorant people believe in these explanations, and the number of such people diminishes every day and every hour. It is quite impossible to arrest this movement. All men irresistibly follow those who go in advance, and all will reach the place where the advanced people now stand. But the advanced people are standing at the brink of a precipice. Those in front are in a terrible position, they are shaping life for themselves and preparing life for all who follow them and are completely ignorant of why they do what they do. Not one civilized and progressive man is now in a position to reply to the plain question, Why do you live the life you are living? Why are you doing all that you are doing? I have tried to ask about this and have questioned hundreds of people, and have never re­ceived a direct reply. Always, instead of a direct reply to the personal question, Why do you live so and do so? I have received an answer not to my question but to one I had not put.

이런 설명이 좋든 나쁘든- 유태인, 불교인, 또는 회교인과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특성들로서, 그것들은 충실한 기독교인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그가 신성하다고 받아들인 율법에 따라 살 때 자신의 이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오직 가장 무지한 사람들이 이런 설명들을 믿으며 그러한 사람들의 수는 나날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제지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앞서 가는 사람들을 따라 간다, 그리고 모두는 앞서 간 사람들이 지금 서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간 사람들을 벼랑 끝에 서 있다. 앞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두려운 위치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삶을 가꾸고 그들을 따라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삶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들이 행하는 것을 왜 행하는지 완전히 모르고 있다. 단 한 명의 교양 있고 진보적인 사람도 오늘날 이런 명백한 질문- ’당신은 왜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은 왜 당신이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 나는 이 질문을 물어 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솔직한 대답을 결코 얻지 못했다. ‘당신은 왜 그렇고 그렇게 사는가?의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 대신에, 나는 언제나 내가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만을 얻었다.

A believing Catholic, Protestant, or Orthodox Churchman, in reply to the question why he lives as lie is living- that is to say, in contradiction to that teaching of the Christ-God which he professes, always, instead of a straight answer, begins to speak of the woeful extent of incredulity in the present generation; about the bad people who promote infidelity, and of the significance and the future of the true Church. But why he himself does not do what his faith bids him do he does not say. Instead of replying about himself he speaks about the general condition of humanity and about the Church, just as though his own life was of no im­portance to him at all and he was concerned only with the salvation of the whole of humanity and with what he calls the Church,

카톨릭, 개신교, 또는 정통교의 신자들은, 왜 현재와 같은- 다시 말하면, 그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삶을 사느냐는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현재의 세대에 있어서의 한탄스러운 불신의 정도에 대해서; 불신앙을 조장하는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참된 교회의 의미와 미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왜 그의 신앙이 그에게 권고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 대답하는 대신에, 마치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오직 전체 인류의 구원과 그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처럼, 그는 인류의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A philosopher, of whatever denomination- idealist, spiritualist, pessimist, or positivist- in reply to the question why he lives as he does, that is to say, not in accord with his philosophical teaching, will always, instead of replying to that question, speak of the progress of humanity and the historic law of that progress which he has discovered and in accord with which mankind strives towards its welfare. But he never replies directly to the question why he himself in his own life, does not do what he con­siders reasonable. The philosopher, like the be­liever, seems as though he were not concerned with his own life, but only with observing the general laws of humanity.

철학자는 그가 어떤 학파에 속하건 불문하고, 이상주의자건, 심령론자건, 염세주의자건 또는 실증주의자건 무엇 때문에 당신은 현재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느냐고(즉 자기 자신의 철학 이론과 모순된 생활)물으면 이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대신에 인류의 진보와 자가가 발견한 진보의 역사적인 법칙, 그리고 이 법칙에 의하여 인류가 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만 말한다. 그러나 자기가 합리적이라고 믿은 일을 왜 행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대답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철학자도 기독교인처럼 자신의 삶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법칙의 연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An average man, one of the immense majority of semi-believing, semi-skeptical civilized people, those who always without exception complain of their life and of the organization of our life and antici­pate the ruin of everything, this average man in reply to the question why he himself lives this life he condemns and does nothing to improve it, will always, instead of a direct reply, begin to speak not of himself but on some general question: the law, trade, the State, or civilization. If he is a policeman or a public prosecutor he will say: 'But how will law and order get on if I, to improve my life, cease to take part in them?' 'And how about trade?' says he, if he is a commercial man. 'And how about civilization if I, to improve my own life, do not co­operate in it?' He always speaks as though the aim of his life were not to secure the good for which he always yearns, but to serve the State, or trade, or civilization. The average man replies exactly like the believer and the philosopher. For the personal question he substitutes a general question, and, like the believer and the philosopher, the average man makes this substitution because he has no reply to the question concerning his personal life, since he possesses no real philosophy of life. And he feels ashamed.

보통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문명인의 방대한 과반수는, 언제나 예외 없이 그들이 삶에 대해 우리의 삶의 조직에 대해 불평하며 모든 것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런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왜 이런 삶을 사는가의 질문에 대답하여, 언제나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일반적인 문제- 법률, 상업, 국가, 또는 문명- 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만일 그가 정치가나 검사라면 그는 이와 같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나의 삶을 개선하고자, 그것들에 참여하기를 중단한다면, 법과 질서는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그가 사업가라면, ‘사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나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문명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의 목적이 그가 언제나 동경하던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업 또는 문명에 봉사하기 위함인 것처럼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신자와 철학자들과 똑같이 대답한다. 개인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는 보편적인 문제로 대체하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참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수치를 느낀다.

He is ashamed because he feels himself to be in the humiliating position of one who has no philosophy of life; whereas man never has lived, and cannot live, without a philosophy of life. Only in our Christian world instead of a philosophy of life and an explanation why life should be such and not other- that is to say, instead of a religion- we have merely an explanation of why life should be what it once used to be, and something is called religion which is of no sort of use to anybody and life itself has become emancipated from any sort of teaching - that is to say, it lacks any definition.

그가 수치를 느끼는 이유는 그가 아무런 삶의 철학이 없는 사람 같은 굴욕적인 위치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이 없이는, 사람은 결코 살아온 적이 없으며, 살 수도 없다. 오직 우리의 기독교 세상만이, 삶의 철학과 삶은 왜 그렇게- 다시 말하면, 종교 대신에- 살아야만 하는가의 설명 대신에, 우리는 단지 우리의 삶이 왜 과거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되어야 하는지 설명만을 들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소위 종교라는 어떤 것과 삶 자체는, 어떤 종류의 가르침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즉, 삶은 어떤 정확한 의미를 결여하게 된 것이다.

Nor is that all: as always occurs, science has ac­cepted this accidental, monstrous position our society is in as a law for all humanity. Tiele, Herbert Spencer, and others treat of religion quite seriously, understanding by it a metaphysical teaching con­cerning the origin of all things, and without sus­pecting that they are talking not of the whole of religion but of only a part of it.

아니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과학은 우리 사회가 처한 이런 우연적이고 괴상한 처지를 모든 인류를 위한 법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틸레, 허버트 스펜서,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종교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며, 종교를 모든 것의 시초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체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일부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From this has arisen the amazing phenomenon that in our age we see wise and learned people most naively convinced that they are free from all re­ligion merely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the metaphysical explanations of the origin of things which at some period and for some people served as an explanation of life. It does not enter their heads that they have got to live somehow and do live somehow, and that whatever it is that induces them to live so and not otherwise is their religion. These people imagine that they have very elevated con­victions but no faith. But whatever they may say, they have a faith if they perform any reasonable actions. For reasonable actions are always denned by one's faith. And the actions of these people are defined solely by the faith that one must always do what one is ordered to do. The religion of these people who do not acknowledge religion is the religion of submission to all that is done by the powerful majority, or, more briefly, it is the religion of submission to the existing authorities.

이로부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즉, 우리의 시대에서 우리는 현명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모든 종교에서 해방되었다고 순수하게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을 위해 삶의 설명이 되어왔던, 사물의 기원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설명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쨌든 살아 왔고, 어쨌든 살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을 오직 그처럼 살도록 유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의 종교라는 것이 그들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우 고상한 신념들을 각지고 있으나 신앙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만일 그들이 어떤 합리적인 행위들을 수행한다면,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행위는 언제나 자신의 신앙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행위들은, 오직 그가 행하도록 명령받은 것을 언제나 행해야 한다는 신앙에 의해서, 정의된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람들의 종교는 권력을 가진 대다수에 의해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복종하는 종교이다, 아니, 더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종교는 기존 권력들에 대한 복종의 종교이다.

One may live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that is to say, live an animal life not acknowledging anything higher and more obligatory than the decrees of the powers that be. But he who lives so cannot assert that he is living rationally. Before asserting that we live rationally, we must answer the question. What teaching about life do we consider rational? And we unfortunates not merely have no such teaching but have even lost the consciousness that any reasonable teaching about life is necessary.

우리는 세상의 가르침대로 살아 갈 수 있다- 즉, 존재하는 권력들의 명령보다도 더 고상하고 의무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동물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가 합리적으로 산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산다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삶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우리는 합리적이라고 여기는가? 그리고 우리 불행한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삶에 관한 어떤 합리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의식마저 잃어 버렸다.

Ask men of our day, believers or skeptics, what teaching they follow in their lives. They will have to confess that they follow only one teaching, the laws which are written by officials in the Judicial Department or in the Legislative Assemblies and which are enforced by the police. That is the only teaching our European people acknowledge. They know that that teaching has not come down from heaven, nor from the prophets, nor from sages; they constantly condemn the regulations made by those officials or Legislative Assemblies, but all the same they acknowledge that teaching and submit to its executors- the police; and they implicitly obey its most terrible demands. If the officials or the Assemblies have written that every young man must be ready to be abused, to be killed, and to murder others- all the fathers and mothers who have reared sons submit to this law written yester­day by a venal official and capable of being altered to-morrow.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신앙인들이든, 회의론자들이든,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그들은 오직 한 가지 가르침, 법무성이나, 입법부의 관리들이 작성하였으며 경찰에 의해서 집행되는 법률을 따르고 있다고 고백해야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유럽 사람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그 가르침이 하늘에서도, 선지자들로부터도, 현자들로부터도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은 관리들이나 입법부에 의해서 제정된 규칙들을 끊임없이 비난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가르침을 인정하고 그 집행자들- 경찰- 에게 복종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르침의 가장 무서운 명령들을 무조건 복종한다. 만일 관리들이나 의회가 모든 청년들이 반드시 폭행당하고, 살해되며, 다른 사람들을 살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법을 제정하면, 자녀들을 양육한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야만적인 관리에 의해서 어제 제정되었으며 다음날 폐지될 수 있는 이런 법률에 복종해야 한다.

The conception of law indubitably rational and made obligatory on everyone by his inner conviction has been so lost in our society that the existence among the Jewish people of a law which defines their whole life- a law made obligatory not by com­pulsion but by the inner consciousness of everyone - is considered an exceptional characteristic of the Jewish race alone. That the Jews only obeyed what they in the depth of their souls considered to be the undoubted truth received direct from God- that is to say, obeyed only what was accordant with their conscience- is considered to be a Jewish peculiarity. It is considered to be the normal condition natural to an educated man, that he should obey what is notoriously written by contemptible people and put into operation by policemen armed with pistols-  things which each of them, or at least the majority of them, consider to be wrong- that is to say dis­cordant with their conscience.

틀림없이 합리적이며, 사람의 내적인 확신에 의해서 모든 사람에게 의무가 되는 법률의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으며, 유태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전체 삶을 규정하는 법률-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적인 의식에 의해서 의무가 되는 법률- 의 존재는 유태 민족만의 예외적인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직 유태인들만이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진정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복종하였다는 것- 다시 말하면, 오직 그들의 양심에 일치하는 것만을 복종하였다는 것- 은 유태인들의 특성으로 여겨진다. 교육받은 사람이 경멸받는 사람들에 의해서 악의로 제정되며 총으로 무장한 경찰에 의해서 집행되는 법들- 그들 각자가, 아니 적어도 그들 대다수가 악하다고 여기는 법률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 을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며 정상적인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

Vainly have I sought in our civilized world for any clearly expressed moral principles for life. There are none. There is not even a recognition that they are needed. There is even a strange conviction that they are not needed, that religion consists only in certain words about a future life, about God, in certain ceremonies very useful in the opinion of some people for saving one's soul and of no sort of use at all in the opinion of others, and that life goes on of itself and needs no principles or rules; only one must do what is ordered! Of what forms the essence of belief- the teaching about life and the explanation of its meaning- the first is considered as unimportant and as not appertaining to belief; while the second, namely, the explanation of a life that used to be lived, or discussions and guesses at the historic course of life, is considered most im­portant and serious. In all that forms the life of man- how to live, whether to go or not to go to kill people, to go or not to go to try people, whether to educate one's children in this way or in that- the people of our world submit absolutely to others who are also in the position of not themselves know­ing why they live and why they oblige others to live this way and not that.

헛되이도 나는 우리의 문명 세계에서 삶에 대한 명료하게 표현된 어떤 도덕적 원리들에 대해서 찾아 보았다. 심지어 그것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즉, 종교는 오직 미래의 삶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말들에, 어떤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매우 유용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는 전혀 아무 쓸모도 없는 특정한 의식들에 있으며, 삶은 스스로 진행하며 아무런 원리나 원칙들이 필요 없다; 우리는 오직 명령만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신앙- 삶에 관한 가르침과 그 의미에 대한 설명- 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서, 전자는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며, 반면에 후자는, 즉, 과거에 살아 오던 삶에 대한 설명, 또는 삶에 대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논의들과 추측들은, 가장 중요하며 진지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들을 죽이러 갈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을 것인가, 사람들을 재판하러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자녀들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가르칠 것인가- 에서, 우리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도 왜 그들이 사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는지 모르는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And such a life people consider rational and they do not feel ashamed of it.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람들은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The divergence between the explanation of the thing which we call faith, and faith itself which is called social or political life, has now reached the utmost limit, and all the civilized majority of man­kind are left with no guidance for life except a faith in the gendarme and the policeman.

우리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설명과, 사회적 정치적 삶이라고 불리는 신앙 그 자체와의 차이는 이제 극한에 다다랐으며, 대다수 문명인 모두는 경찰과 치안판사에 대한 신앙 외에는 삶에 대한 아무런 지침도 남아 있지 않다.

The position would be terrible if it were quite like that. But fortunately, even in our day, there are men, the best men of our time, who are not satisfied with such a faith and who have a belief of their own as to how men should live.

만일 상태가 이와 같이 계속된다면 이 상태는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최선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에 만족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들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These people are considered the most harmful, dangerous, and, above all, irreligious people; yet they are the only faithful people of our time, and are not only believers in general but believers in the teaching of Christ, or if not in his whole teaching at least in a small part of it.

이런 사람들은 가장 해로우며 위험하고, 무엇 보다도,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시대의 가장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며, 보편적인 신앙인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인들이다, 아니 그의 전체 가르침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믿고 있다.

These people often have no knowledge of Christ's teaching, do not accept it, and often like their opponents, do not accept the chief groundwork of the Christian faith- non-resistance to him that is evil. They often even hate Christ; but their whole belief of what life should be like is drawn from the teaching of Christ. However much these people may be persecuted, however much they may be slandered, they are the only people who do not un-murmuringly submit to all that is decreed, and therefore they are the only people in our world who are living not an animal but a rational life- they are the only believers.

이런 사람들은 가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르며, 그것을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가끔 그들의 반대자들처럼,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원리-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 를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가끔은 그리스도를 증오한다, 그러나 삶이 무엇처럼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들 전체 신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떤 박해를 받는다 하여도, 그들이 어떤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명령받은 모든 일에 군소리 없이 복종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물적인 삶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이 유일한 신앙인들이다.

The thread connecting the world with the Church that used to give the world a meaning has become ever weaker and weaker as the essence, the sap of life, has more and more flowed over to the world. And now, when the sap has all flowed over, the connecting cord has become a mere hindrance.

세상에 의미를 주어오던 교회와 세계를 이어주는 끈은 점점 약해져서 정수는, 생명의 활력은, 점점 더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그 생기는 모두 흘러 가버리고, 연결되어 있는 끈은 단순한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That is the mysterious process of birth which is being performed before our eye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last bond with the Church is being dissolved and the independent process of life is being established.

이것이 우리의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신비한 탄생의 과정이다. 동시에 교회와의 마지막 유대는 사라져 버리고 삶의 독립적인 과정은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Church teaching (with its dogmas, councils, and hierarchy) is undoubtedly connected with Christ's teaching. That connexion is as evident as the connexion of a new-born babe with its mother's womb. But if the navel-cord and the afterbirth become unnecessary bits of flesh, which from respect for what they have preserved must be care­fully buried in the earth, so also the Church has become an unnecessary, obsolete organ, which, merely from respect for what it once was, should now be hidden away somewhere far off. Directly the breathing and the circulation of the blood has been established, the bond which was formerly the source of nourishment becomes a hindrance. And efforts to maintain that connexion and compel the babe that has now come into the world to nourish itself through the navel-cord, and not to live by means of its own mouth and lungs, are irrational.

교리들, 공회, 그리고 성직 계급을 가진 교회의 가르침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연결은 갓 태어난 아기와 그 모체의 자궁과의 연결처럼 명백하다. 그러나 만일 탯줄과 태반이 신체의 불필요한 부분이 되어버린다면, 그것들은, 그것들이 받아왔던 존경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땅에 묻혀져야만 한다, 이처럼, 교회 역시 불필요하며 쓸모없는 기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단순히 그것이 과거에 받아왔던 존경으로부터, 이제는 저 멀리 어딘가에 숨겨져야만 하는 것이다. 호흡과 피의 순환이 이루어지자마자, 이전에 양분의 출처가 되었던 끈은 장애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을 유지하려는 노력들과 이제 세상으로 나온 아기에게, 자기 자신의 입과 허파를 이용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탯줄을 통하여 양분을 얻도록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But the babe's emancipation from its mother's womb is not yet life. The life of the child depends on the setting up of a new connexion with its mother for the supply of nutriment. And the same must be accomplished for our Christian world. Christ's teaching has borne our world and brought it to life. The Church- one of the organs of Christ's teaching - has done its part and has become unnecessary and a hindrance. The world cannot be guided by the Church, but the emancipation of the world from the Church is not yet life. Its life will come when it realizes its impotence and feels the necessity of fresh nourishment. And this must occur with our Christian world: it must cry out with consciousness of its impotence. Only consciousness of its im­potence, consciousness of the impossibility of re­ceiving nourishment as heretofore and of the impossibility of obtaining any other nourishment than that of its mother's milk (Christ's teaching) will bring it to its mother's breasts, swollen as they are with milk.

그러나 아기의 모체로부터의 해방은 아직 삶이 아니다. 아이의 삶은 영양의 공급을 위한 어머니와의 새로운 연결의 확립에 달려 있다. 그리고 똑 같은 일이 우리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의 세상을 낳았고 세상에 삶을 주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기관들 중의 하나로서- 그 역할을 완수했다 그리고 필요가 없어졌으며 장애물이 되었다. 세상은 교회에 의해서 인도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세상의 해방은 아직 삶이 아니다. 세상의 삶은 그것이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신선한 양분의 필요성을 느낄 때 올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우리의 기독교 세상에 일어나야 한다: 삶은 자신의 무능함을 의식하고서 외쳐야 한다. 오직 삶의 무능함을 인식함으로써, 여태까지처럼 양분을 받아들임이 불가능하며, 모유의 영양을 얻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젖이 차서 부푼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삶을 데려다 줄 것이다.

In our European world, superficially self-confident, bold and resolute, but in the depth of its consciousness frightened and perplexed, the same thing is occurring as happens with a new-born babe: it flings itself about, fidgets, cries, pushes as though it were angry, and it does not understand what it has to do. It feels that its former source of nourish­ment has dried up, but it does not know where to seek fresh nourishment.

우리의 유럽 세계에서도, 외관상으로 자신에 가득 차고, 대담하며 의욕적이지만, 삶의 인식의 깊은 곳에서 두려워하며 당황하면서, 신생아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삶은 스스로 이리저리 날뛰며, 안달을 하며, 소리지르고, 화가 난 것처럼 밀어 제친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지 못한다. 삶은 이전의 양분의 출처가 말라 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신선한 양분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A new-born lambkin moves his eyes and his ears, shakes his tail, jumps, and kicks. To judge by his assurance it seems as though he knew everything, but he, poor little thing, knows nothing. All this confidence and energy is the result of his mother's juices, the transfer of which has now ceased and cannot be renewed. He is in a happy but at the same time a desperate condition. He is full of freshness and strength; but he is lost unless he takes to his mother's teats.

갓 태어난 어린 양은 눈과 귀를 쫑긋하며, 꼬리를 흔들고, 뛰어다니며 발길질을 한다. 자신의 확신으로 판단하면서, 마치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련한 어린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모든 확신과 정력은 그의 모체의 힘의 결과이다, 이제 그 힘의 전달은 멈추었다 그리고 되살아 날 수 없다. 그는 행복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는 신선함과 힘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의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리지 않으면 소멸될 것이다.

The same is occurring with our European world. See what a complex, seemingly reasonable, energetic life is seething in the world. It is as if all these people knew what they were doing and why they were doing it all. See how resolutely, confidently, and briskly the men of our world undertake all that they do. Art, science, industry, social and state activities- all is full of life. But it lives only because it has been till recently nourished by its mother's juices through its navel-cord. There used to be a Church which transmitted Christ's reasonable teaching to the life of the world. All the energies of the world were nourished by it and grew and developed. But the Church has played its part and dried up. All the organs of the world are alive, the source of their former nourishment is exhausted and they have not yet found a fresh one. They seek it everywhere except from the mother from whom they have been released. They, like the lambkin, still live by the former nourishment and have not yet come to understand that only from their mother can food be had, but that it must be got in a different way than formerly.

똑 같은 일이 우리의 유럽 세계에 일어나고 있다. 보라, 얼마나 복잡하고, 언뜻 보기에 합리적이며, 왕성한 삶이 세상에서 들끓고 있는가! 그것은 마치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라, 얼마나 의욕적이며, 확신에 차있으며, 활발하게 우리의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있는지! 예술, 과학, 산업, 사회 및 국가적 활동들- 모든 것이 삶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오직 그것이 최근까지 탯줄을 통해서 모체의 양분을 공급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합리적인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의 삶에 전해주던 교회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활력들은 교회에서 공급 받고 자라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 역할을 마쳤으며 말라버렸다. 세상의 모든 기관들은 살아 있으나, 과거에 그들의 양분의 원천은 고갈되고 그들은 아직 새로운 것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방된 모체를 제외하고 모든 곳에서 그것을 찾고 잇다. 그들은, 어린 양처럼, 아직도 이전의 양분으로 살아 있으며, 오직 그들의 어머니가 아니면 먹을 것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깨닫고 있다.

The business that now awaits the world consists in understanding that the former process of un­conscious feeding is done with and that a new, conscious process is necessary.

오늘날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는 과거의 무의식적인 영양 섭취는 끝이 났으며, 새롭고 의식적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That new process consists in conscious acceptance of those truths of the Christian teaching which were formerly unconsciously imbibed by humanity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Church, and by which humanity still lives. Men must raise once more that light by which they lived but which was hidden from them, and they must lift it high before themselves and before others, and must consciously live by that light.

이런 새로운 과정은, 과거에 교회라는 도구를 통하여 인류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흡수되었으며, 이에 의존하여 지금도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의 진리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임에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그런 빛을 다시 한번 높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높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 빛을 따라서 의식적으로 살아야 한다.

The teaching of Christ, as a religion defining life and explaining the life of man, stands now, as it stood 1800 years ago, before the world. But for­merly the world had the Church's explanations, which though they hid the teaching nevertheless seemed to suffice for the world's former life; now however a time has come when the Church has been outlived and the world lacks explanation of its new life and cannot but feel its impotence and therefore can no longer avoid accepting Christ's teaching.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삶을 정의하며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종교로서, 1800년 전에 서 있던 것처럼, 지금도 세상 앞에 서있다. 그러나 과거에 세상은 교회의 해석들을 받아들였으며, 그 해석은, 비록 그들이 가르침을 숨겼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이전 삶에 충분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러나 이제 교회가 수명을 다해버리고, 세상은 새로운 삶의 해석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의 무능함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들임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Christ teaches, first of all, that men should believe in the light while the light is yet in them. Christ teaches that men should set that light of reason above all else and should live in accord with it, not doing things they themselves consider irrational. If you consider it irrational to go to kill Turks or Germans- do not go; if you consider it unreason­able forcibly to take the labor of the poor in order to wear a silk hat or to tie yourself up in a corset, or to arrange a drawing-room that will incommode you- do not do it; if you consider it unreasonable to put men corrupted by idleness and bad company into prison, that is, into the very worst company and the completest idleness- do not do it; if you consider it irrational to live in an infected town atmosphere when it is possible to live in pure air; or if you con­sider it unreasonable to teach your children dead languages first of all and most of all, do not do it. Only do not do what is done now by the whole of our European world, namely, live a life you consider unreasonable, act while considering your actions unreasonable, disbelieve in your reason and live in discord with it.

그리스도는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빛이 그들 안에 있는 동안 그 빛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르친다, 사람들은 그 이성의 빛을 다른 무엇보다도 위에 놓고서, 그 빛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신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터어키인들이나 독일인들을 죽이러 가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여긴다면- 가지 말라; 만일 당신이 비단 모자를 쓰거나 외투를 두르려 하고, 당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응접실을 단장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을 강압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여긴다면- 그런 일을 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게으름으로 타락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것, 즉, 가장 최악으로 그리고 지독한 게으름으로 밀어 넣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긴다면- 그런 일을 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을 때에도 오염된 도시의 대기 속에서 사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긴다면; 아니 만일 당신이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먼저 당신의 자녀들에게 죽은 언어들을 가르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긴다면, 그런 일을 하지 말라. 오직 우리의 유럽 세상 전체에서 지금 행해지는 것, 즉, 당신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것- 당신의 행동들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면서 행동하는 것, 당신의 이성을 불신하면서도 이성에 어긋나게 사는 것- 을 행하지 말라.

Christ's teaching is light. The light shines and the darkness comprehendeth it not. One cannot refuse to accept the light when it shines. One cannot dis­pute with it, it is impossible to dispute with it. With Christ's teaching one cannot dispute, because it envelops all the errors in which people live and does not collide with them, but like the ether about which the physicists talk it permeates them all. The teaching of Christ is equally unavoidable for every­one in our world whatever his circumstances may be. Christ's teaching cannot but be accepted by men, not because it is impossible to deny the meta­physical explanation of life it gives (it is possible to deny it), but because it alone supplies those rules of life without which humanity has not lived and cannot live, and without which no man has lived or can live if he wishes to live as a man- that is to say, to live a reasonable life.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빛이다. 빛은 비추며 어둠은 빛을 감싸지 못한다. 빛이 비출 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빛과 다툴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오류를 감싸며 그것들과 마찰하지 않으며, 마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에테르처럼 모든 것을 뚫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똑같이 우리 세상의 누구나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는 삶의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부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직 그것 만이 삶의 규칙들을 제공하며, 그 규칙이 없다면 인류는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고 살수도 없으며, 그 규칙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그가 사람으로서 살고 싶어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이성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여도- 살지 못했을 것이며 살수도 없을 것이다.

The strength of Christ's teaching lies not in its-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life, but in what flows therefrom- the teaching of life. Christ's meta­physical teaching is not new. It is still the same teaching of humanity which is written in the hearts of men and which has been taught by all the true sages of the world. But the strength of Christ's teaching lies in the application of that metaphysical teaching of life.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힘은 삶의 의미에 대한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서 흘러나오는 것- 삶에 대한 가르침- 에 있다.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쓰여져 있고 세상의 모든 참된 성현들이 가르쳐 온 것과 동일한 인류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힘은 이 같은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함에 있다.

The metaphysical basis of the ancient teaching of the Jews and of Christ is one and the same: love of God and of one's neighbor. But for the appli­cation of that teaching of life according to Moses, as the Jews understood it, the fulfillment of 613 commandments was necessary, many of them sense­less and cruel and all resting on the authority of the Scriptures. According to Christ's law the teaching of life which flows from that same metaphysical basis is expressed in five commandments, which are reasonable, beneficent, carry in themselves their meaning and justification, and embrace the whole life of man.

유태인들의 고대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인 기초는 하나이며 똑같다: 하나님과 자신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모세에 의하면 이 같은 삶의 가르침의 적용에 대해서, 유태인들이 이해하던 바에 의하면, 613개의 계명들을 실천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그것들 중의 많은 것들은 무의미하며 잔인하였으며 모두가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의하면, 똑 같은 형이상학적인 기초로부터 흘러 나오는 삶의 가르침이, 오직 다섯 가지의 계명들 안에 표현되며, 그것들은 합리적이고, 자비로우며, 계명들 자체에서 스스로의 의미와 타당성을 지니며, 사람의 전체 삶을 포함한다.

Christ's teaching cannot but be accepted by those believing Jews, Buddhists, Mohammedans, and others who have begun to doubt the validity of their own law. Still less can it be rejected by those of our Christian world who now lack any moral law whatever.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믿음을 가진 유태인들, 불교인들, 회교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율법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기타 사람들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오늘날 도무지 어떠한 도덕적 율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의 기독교 세상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거부될 가능성이 적다.

Christ's teaching does not dispute with the men of our world about their conception of the world; it agrees with it in advance and, including this in itself, gives them what they lack, what is in­dispensable to them, and what they are searching for; it gives them a way of life, and one not novel to them but long familiar and akin to them all.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 세상의 사람들과 그들의 세계관에 대하여 마찰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세계관과 일치한다 그리고, 세계관을 가르침 안에 포함하면서, 그들이 부족한 것,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을 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삶의 방법을 주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오랫동안 친숙하던 것이다.

You are a believing Christian of whatever sect or confession. You believe in the creation of the world, in the Trinity, in the fall and redemption of man, in the sacraments, in prayers, and in the Church. Christ's teaching not only does not argue with you, but fully agrees with your outlook on the world; it merely adds something you have not got. Retaining your present belief you feel that the life of the world and your own life is filled with evil and you do not know how to avoid it. Christ's teaching (obligatory for you because it is the teach­ing of your God) gives you simple, practicable rules of life which will free you and other people from the evil that torments you. Believe in resurrection, in heaven and hell, in the Church sacraments, in the redemption, and pray as your faith demands, fast and sing psalms- all this does not prevent you from fulfilling what Christ revealed to be necessary for your welfare: do be not angry; do not commit adultery; do not defend yourself by oaths; do not defend yourself by violence; and do not go to war.

당신은 어떤 종파 또는 어떤 신앙에 속해있든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다. 당신은 세상의 창조, 삼위일체, 사람의 타락과 구속, 성례, 기도, 그리고 교회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신과 논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세계관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것은 단순히 당신이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더해 준다. 당신의 현재의 신앙을 지니면서 당신은 세상의 삶과 당신 자신의 삶이 악으로 가득 차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당신에게는 의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단순하고 실용적인 삶의 규칙들을 주며, 그것들은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괴롭히는 악들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부활, 천국과 지옥, 교회의 성례들, 구속을 믿으라, 그리고 당신의 신앙이 요구하는 대로 기도하라, 금식하고 시편을 노래하라-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밝힌 것을 당신이 실행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분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로써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폭력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전쟁에 나가지 말라.

Perhaps you will fail to keep some one of these rules and will be tempted to infringe one of them as now in moments of temptation you infringe rules of your faith, the rules of the civil law, or laws of politeness. Similarly in moments of temptation you may perhaps infringe the laws of Christ but in your quiet moments do not do what you do now- do not arrange your life so that it should be difficult not to be angry, not to commit adultery, not to take oaths, not to defend yourself, and not to fight; but in such a way that it should be hard to do these things. You cannot but acknowledge this, for God commands it of you.

아마도 당신은 이들 규칙들 중의 어떤 하나를 준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시험의 순간들에서 당신의 신앙의 규칙들, 시민법의 규칙들, 또는 친절의 율법들을 위반하듯이, 그것들 중의 하나를 위반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비슷하게 시험의 순간들에서 당신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율법을 위반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냉정해진 순간에는 당신이 지금 행한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삶을, 화를 내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맹세를 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그리고 싸우지 않는 것이 어렵도록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이 어렵도록 조정할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에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You are an unbelieving philosopher no matter of what denomination. You say everything comes about in the world according to a law you have discovered. Christ's teaching does not dispute with you, and fully admits the law you have discovered. But then, besides that law of yours by which the sands of years hence that welfare will come to pass which you desire and have prepared for mankind, there is also your own life which you can live either in accord with reason or in contradiction to reason; and for that same life of yours you have now no rules except those which are written by men you do not respect and are put in execution by the police. Christ's teaching gives you rules that will certainly accord with your law, for your law of altruism or the common will is nothing else than a paraphrase of Christ's teaching.

당신이 어떤 학파에 관계 없이 믿음이 없는 철학자이다. 당신은 당신이 발견한 법칙에 따라서 모든 것이 세상에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신과 다투지 않으며, 당신이 발견한 법칙을 완전히 인정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 뒤에 당신이 인류를 위해 바라고 준비한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는 당신의 법칙 외에도, 또한 이성에 따라서 또는 이성과 반대하여 살 수 있는 당신 자신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와 똑 같은 당신의 삶에 대하여 당신은 지금 당신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경찰에 의해 집행되는 것들 말고는 아무런 규칙을 가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신에게 틀림없이 당신의 법칙과 일치하는 규칙들을 준다, 왜냐하면 당신의 이타주의나 공통의 의지의 법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꾸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You are an average man, half a believer half a skeptic, who has no time to immerse himself in the meaning of human life, and you have no definite outlook on life, you do what everybody else does. Christ's teaching does not dispute with you. It says: 'Very well, you are unable to argue and to verify the truths of the doctrine taught you; it is easier for you to act as everybody else does. But however modest you may be you yet are conscious in yourself of that inward judge who sometimes ap­proves your action that accords with everybody's, and sometimes does not approve of it. However humble your lot may be it yet occurs to you to ponder and to ask yourself: Shall I do this thing as they all do it, or in my own way? And just in these cases- that is to say, just when you have occasion to decide that question- the laws of Christ will present themselves to you in all their strength. And they will certainly furnish a reply to your question for they embrace the whole of your life, and they will reply in accord with your reason and your con­science. If you are nearer to belief than to unbelief, then, acting in this way, you will be acting in accord with the will of God. If you are nearer to free-thought, then, acting in this way, you will act in accord with the most reasonable rules that exist in the world, of which you can convince yourself, for Christ's rules bear in themselves their own reason and justification.

당신은 보통 사람이며 반신반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은 사람의 삶의 의미에 몰두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삶에 대한 어떤 명확한 관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이 행하는 것을 행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신과 다투지 않는다. 그것은 말한다: ‘그렇다, 당신은 그 교리가 당신에게 가르치는 진리를 논박하지도 증명하지도 못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네게는 편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겸손할지라도 당신은 아직 자신의 안에 있는, 때로는 모든 사람들과 일치하는 당신의 행동을 승인하며, 때로는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 내적인 판단을 의식한다. 당신의 운명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아직도 깊이 생각하고 당신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행하듯이 나도 이것을 행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의 뜻대로 행할 것인가? 그리고 바로 이런 경우들에서- 다시 말하면, 당신이 그런 문제를 결정해야 할 바로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율법들은 그 모든 힘을 가지고 당신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틀림없이 당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은 당신의 삶의 전부를 포용하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당신의 이성과 당신의 양심에 일치하여 대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신앙보다는 신앙에 더 가깝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유 사상에 더 가깝다면,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당신은 세상에 존재한 가장 합리적인 규칙들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규칙들은 그 자체에서 스스로의 이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Christ said (John xii. 31): 'Now is the judgment of this world: now shall the prince of this world be cast out,'

그리스도는 말한다(요한복음 12장 31절):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He also said (John xvi. 33): 'These things have I spoken unto you, that in me ye may have peace. In the world ye have tribulation: but be of good cheer; I have overcome the world.'

그는 또한 말한다(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도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And really the world- that is, the evil of the world, is conquered.

그리고 참으로 세상은- 즉, 세상의 악은, 극복된다.

If there still exists a world of evil it only exists inertly; it no longer possesses the roots of life. It does not exist for one who believes in the laws of Christ. It has been conquered in the reasonable consciousness of the son of man. The runaway train still moves forward, but all the rational work on it has long since been directed the contrary way.

만일 아직도 악의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저항 없이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더 이상 삶의 뿌리들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율법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악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을 이성적으로 의식함에서 극복되었다. 탈선하는 열차는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모든 합리적인 작업은 오래 전부터 반대 방향으로 집중되어 왔다.

'For whatsoever is begotten of God overcometh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hath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1 Epistle of John v. 4).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1서 5장 4절)

The faith that overcomes the world is faith in the teaching of Christ.

세상을 극복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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