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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VI. The Five Commandments

VI. 다섯 가지 계명

   

1. Do not be angry, but live at peace with all men.
2. Do not indulge yourself in sexual gratification.
3. Do not promise anything on oath to anyone. 
4. Do not resist evil, do not judge and do not go to law.
 5. Make no distinction of nationality, but love foreigners as your own people.

1. 화를 내지 말라, 그러나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라. 
2. 성적인 만족에 집착하지 말라. 
3. 누구에게 맹세로서 무엇이든 약속하지 말라. 
4. 악에 저항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고 고소하지 말라. 
5. 국가의 구분을 하지 말 것이며, 외국인을 당신 자신의 동포처럼 사랑하라.

   

And so when I understood Christ's law to be the law of Christ and not the law of Moses and Christ, and understood the statement of that law which directly disavows the law of Moses, the Gospels as a whole, instead of their former obscurity, disunion, and contradictoriness, disclosed themselves as one indivisible whole, and amid them the essence of the whole teaching became clear, expressed in the five simple, clear commandments of Christ, accessible to everyone (Matt. v. 21-48), but about which I had till then known nothing. Throughout the Gospels Christ's commandments and their fulfillment are spoken of.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이, 모세와 그리스도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이해하였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의 말씀이 모세의 율법을 직접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복음서는 그것들에 대한 이전의 애매함, 불일치, 그리고 모순성 대신에, 그 자체로서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나타났고,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전체 가르침의 본질이 명백해졌으며,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명료한 다섯 가지의 계명들로 표현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이 5계명(마태 5장 21-48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계명들과 그것들의 준수가 기록되어 있다.

All the theologians speak of Christ's command­ments, but what those commandments were I formerly did not know. It seemed to me that the commands of Christ consisted in this: to love God, and my neighbor as myself. But I did not see that this could not be Christ's commandment, because it is a commandment of 'them of old time' (Deut. and Lev.). The words (Matt. v. 19) 'Whosoever shall break one of these least commandments, and shall teach men so, sha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 attributed to the laws of Moses. And the fact that the new commandments of Christ are clearly and definitely expressed in verses 21-48 of Matt. v never entered my head. I did not see that where Christ says, 'It was said to you; but I say unto you', new and definite commands of Christ are given, namely, according to the number of refer­ences to the ancient law (and counting two refer­ences to adultery as one), five new, clear, and definite commandments of Christ.

모든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계명들이 무엇인지 나는 이전에 알지 못했다. 내게 그리스도의 계명들은 이 것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옛 사람들의’(신명기 및 레위기) 계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계명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 5장-l9절)의 말씀이 모세의 율법을 일컫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1-48절에 명료하고 확실히 표현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명들은 결코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그리스도가 말하는 곳에서, 새롭고 확실한 그리스도의 명령들이, 즉, 옛 율법을 참조하는 회수에 따라서(그리고 간음에 대한 두 번의 참조를 하나로 계산하여), 다섯 가지의 새롭고, 명료하며, 정확한 그리스도의 계명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About the Beatitudes and their number I had heard and had met with enumerations and explana­tions in Scripture lessons, but of Christ's commands I had never heard anything. To my surprise I had to discover them.

진복팔단(眞福八端)과 그 숫자에 관해서는 들었으며 성서 강의에서 목록들과 설명들을 접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그것들을 발견해야 했다.

This is how I did so. In Matt. v. 21-6, it is said: '[21]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kill [Exod. xx. 13],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22]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and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 [23]If therefore thou art offering thy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est that thy brother hath aught against thee; [24]leave there thy gift before the altar and go thy way, first be reconciled to thy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thy gift. [25]Agree with thine adversary quickly, whiles thou art in the way with him; lest haply the adversary deliver thee to the judge and the judge deliver thee to the officer, and thou be cast into prison. [26]Verily I say unto thee, Thou shalt by no means come out thence, till thou hast paid the uttermost farthing.'

이것이 내가 그러한 발견을 한 과정이다. 마태복음 5장 21-26절까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1]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이유없이)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When I understood the commandment of non-resistance to him that is evil it seemed to me that these verses about anger ought to have as clear a meaning, and one as applicable to life, as the commandment about resisting him that is evil. The meaning I had formerly attributed to those words was that everyone should always avoid anger against others and should never use words of abuse, but should live at peace with all men without excep­tion; but there were words in the text which ex­cluded that meaning. It was said: Do not be angry 'without a cause', so that no unconditional injunc­tion to be peaceable is found in the words. Those words 'without a cause' perplexed me: and to solve my doubts I consulted the interpretations of the theologians, and to my amazement I found that the interpretation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are chiefly directed to explaining when anger is excusable and when it is not excusable. All the Church interpretations lay particular stress on the meaning of the words without a cause, and explain the passage in the sense that one must not insult innocent people and one must not employ words of abuse, but that anger is not always unjustifiable; in confirmation of which view they quote the anger of saints and Apostles.

내가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의 계명을 깨달았을 때, 내게는 분노에 대한 이 구절들도 악한 자에 대해 저항하는 계명만큼 명료한 의미와 삶에 적용 가능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전에 이 구절에 부여했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피해야 하며 결코 폭언을 해서는 안되며,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전에는 그러한 의미를 배제하는 말들이 있었다. ‘이유없이 노하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 말들에서 무조건적인 평화 유지에 대한 명령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유없이’라는 말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의심을 풀기위해 신학자들의 해석들을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교부들의 해석들은 주로 분노가 용서될 수 있는 경우와 용서될 수 없는 경우를 설명함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교회의 모든 해석들은 ‘이유없이’라는 말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서, 그 구절을 무고한 사람들을 욕해서는 안되며 폭언을 해서도 안되지만, 분노가 언제나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러한 시각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들은 성자들과 사도들의 분노를 인용한다.

I could not but admit that, though it contradicts the whole sense of the Gospels, this explanation that anger, as they say, is not forbidden by the word of God, follows from and finds support in the words without a cause- which occur in verse 22. These words change the meaning of the whole utterance.

나는, 비록 그것이 복음서의 전체 의미와 모순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분노는, ‘이유없이’라는 말에 따라서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22절에 있다. 이 말들이 전체 말씀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Be not angry without a cause. Christ bids us forgive all, forgive endlessly. He himself forgives, and for­bids Peter to be angry with Malchus when Peter, not without cause it would seem, defended his Master who was being led to crucifixion. And this same Christ, for the instruction of all men, says: Do not be angry without a cause, and thereby sanctions anger with a cause- anger which is deserved. Christ preaches peace to all the plain folk and suddenly, as though explaining that this does not refer to all cases but that there are cases when one may be angry with one's brother, he inserts the words without a cause. In the interpretations it is explained that there is timely anger. But who, asked I, is to be judge of when anger is timely? I have never seen angry people who considered their anger untimely. They all consider their anger just and useful. Those words destroy the whole meaning of the verse. But the words stood in Holy Writ and I could not cancel them. Yet those words were as though to the saying, Love thy neighbor were added, Love thy good neighbor, or, Love the neighbor whom thou approvest of.

이유없이 노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두를 용서하고,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용서하며, 베드로가, 이유가 없어 보이지 않았지만, 십자가로 끌려가는 그의 주인을 방어하려고 할 때, 베드로에게 분노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바로 똑 같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설교로서, 말한다: 이유없이 분노하지 말라,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유있는 분노- 가치있는 분노- 를 용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설교한다, 그리고 갑자기 이것이 모든 경우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제에게 분노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이유없이’라는 말을 삽입한다. 어떤 해석들에는 적절한 분노도 있다고 설명되어진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분노가 적절한가를 심판할 수 있는가? 나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노한 사람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며 유익하다고 여긴다. 이 말들이 구절의 전체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그러나 그 말들은 성서에 있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취소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들은 마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너의 선한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네 마음에 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덧붙임과 같았다.

The whole meaning of the passage was destroyed for me by the words without a cause. The verses that said that before praying one must be reconciled to those who are angry with one, which without the words 'without a cause' would have had a plain and obligatory meaning, also acquired this conditional meaning.

이 구절의 전체 의미는 나에게 있어서 ‘이유없이’라는 말로서 파괴되었다. 기도하기 전에 너희에게 분노하는 자들과 화해하라고 말한 구절들도, ‘이유없이’라는 말이 없다면 명백히 강제적인 의미가 되었을 것이지만, 또한 이런 조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It seemed to me that Christ should have for­bidden all anger, all ill will, and for its elimination bidden everyone, before he brings his sacrifice- that is to say, before entering into communion with God - to remember whether there is not someone who is angry with him. And if there is anyone who right­fully or wrongfully is angry with you, you must first go and be reconciled, and only then bring your offering or your prayer. So it seemed to me; but according to the commentaries the passage must be understood conditionally.

그리스도는 모든 분노, 모든 악의를 금지하셨고, 그 제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물을 바치기 전에- 즉, 하나님과 교통함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없는지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만일 선의든 악의든 우리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먼저 가서 화해한 다음 그때서야 우리의 제물이나 기도를 바치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주해서들에 따르면 그 구절은 반드시 조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In all the commentaries it is explained that one must try to be at peace with all, but if that is impossible owing to the depravity of those who are at strife with you, you must be at peace in your soul, in your thoughts, and then the enmity of the others against you need not prevent your praying. Be­sides this, the words that declare that whoso says 'Raca' and 'Thou fool' is terribly guilty always seemed to me strange and obscure. If one is for­bidden to scold, why are such weak almost unabusive words selected as examples ? And also why is so terrible a threat directed against him who lets fall such a weak word of abuse as 'Raca', which means 'a nobody'? This too is obscure.

모든 주해서들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하지만, 만일 우리와 반목하는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생각 안에서 화해해야 하며, 그리하면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적대감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설명된다. 이것 뿐만 아니라, ‘라가’ 그리고 ‘너는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고 선언하는 말들이 언제나 내게는 이상하고 모호하게 느껴졌다. 만일 우리가 욕하는 것이 금지된다면, 왜 그렇게 나약하며 거의 욕설이라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사례들로서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또한 왜 그렇게 ‘하찮은 사람’을 의미하는, ‘라가’같이 비난으로서는 미약한 말을 내뱉은 사람에게 그토록 무서운 위협이 가해지는 것인가?

I felt that there was a misunderstanding similar to that which occurred with reference to the words, 'judge not'. I felt that as in that interpretation so in this, what is simple, important, definite, and practicable is all changed into what is obscure and indefinite. I felt that Christ could not understand the words, 'Go, be reconciled to thine adversary', in the way they are explained to us, as meaning, 'Be reconciled in your thoughts'. What does being reconciled in one's thoughts mean? It seemed to me that Christ was demanding what he elsewhere expressed in the words of the prophets: 'I will have mercy and not sacrifice'- that is to say, love to man. And therefore if you wish to please God, before praying at morning and evening, at matins and evensong, remember whether anyone is angry with you and go and arrange matters so that he may not be angry with you, and after that pray if you please. And then we are told that this is only 'in thought'. I felt that the whole interpretation which destroyed for me the direct and clear mean­ing of the passage was based on the words 'without a cause'. If they were struck out the meaning would be clear; but against my interpretation all the expositors were ranged, as well as the canonical Gospel with the words, 'without a cause'. If I yield on this point I may as well yield on others at my fancy, and other people may do the same. The whole matter lay in those words. If they were not there all would be clear. And I tried to find some philological explanation of the words which would not infringe the whole meaning. I looked up the Greek word interpreted 'without a cause' in the dictionaries; and I saw that this word, in Greek , means 'without purpose', 'inconsiderately'. I tried to give it a meaning which would not infringe the sense of the passage, but evidently the addition of that word has the meaning which is given it. I consulted other dictionaries, but the meaning given of the word was the same. I consulted the context and found that the word is employed only once in the Gospel, namely, in this passage. In the Epistles it is employed several times. I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xv. 2, it is used just in this sense.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explain it otherwise, and one has to admit that Christ said: Do not be angry unnecessarily! I must confess that for me to admit that Christ could in this passage use such obscure words, which can be understood so that nothing remains of their meaning, was tantamount to rejecting the whole Gospel. There remained one last hope: Is the word found in all the manuscripts? I looked up the manuscripts. I referred to Griesbach, who shows all the variations- that is to say, he shows in what manuscripts and by what Fathers of the Church an expression is used. I looked, and was at once thrown into an ecstasy by observing that to this passage there are remarks- there are variations. I went on and found that the variations all refer to the word 'without a cause'. Most of the manuscripts of the Gospel and the quotations of the passage in the Fathers of the Church do not contain the word at all! Therefore most of them understood the matter as I do. I then referred to Tischendorf- to the oldest text- and the word was not there at all! I looked at Luther's translations, where I might have got at the matter most quickly, and the word was not there either.

나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과 유사한 오해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와 같은 해석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단순하고, 중요하며, 정확하고, 그리고 실행 가능한 것이 모두 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으로 바뀌었다고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가 ‘가서 너의 원수와 화해하라’는 말들이 우리에게 설명되어지듯이, ‘너의 생각 안에서 화해하라’는 의미처럼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자신의 생각 안에서 화해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가 어디에선가 ‘나는 제물을 바라지 않고 자비를 원하노라’-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을 원한다- 고 표현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기 전에,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너희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가서 그가 너희에게 분노하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하라, 그리고 그렇게 행한 후에 아무쪼록 기도하라. 그런데 이것은 오직 ‘생각 안에서’일 뿐이라고 들었다. 나는 나에게 있어서 그 구절에 대한 직접적이며 명료한 의미를 파괴한 전체 해석은 ‘이유없이’라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고 느꼈다. 만일 이 말이 제거된다면, 의미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주석가들이 나의 해석과는 반대편에 서있으며, 교회의 정경에서도 ‘이유없이’라는 말을 포함하였다. 만일 내가 이 문제에서 양보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다른 것들에서도 양보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할 것이다. 전체 문제는 이 말들에 놓여있다. 만일 이것들이 그곳에 없었다면 모든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체 의미를 파괴하지 않도록 이 말들의 어떤 언어학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나는 ‘이유없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어로 인 이 말이, ‘목적 없이’, ‘분별없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것에다 구절의 뜻을 파괴하지 않도록 의미를 적용시켜보았다, 그러나 명백히 이 말을 첨가하여도 그것에 부여된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전들을 찾아 보았으나, 그 말에 주어진 의미는 똑같았다. 나는 문맥을 참조하고는 이 말이 복음서에서, 즉, 이 구절에서, 오직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울의 서한들에서는 그것이 여러 번 사용되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한 15장 2절에서, 그것은 이런 의미와 똑같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다른 의미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쓸데없이 분노하지 말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이 구절에서 그런 모호한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한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구절의 의미는 실종되고, 복음서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한가지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었다: 이 구절이 모든 사본들에도 들어있는가? 나는 사본들을 조사해 보았다. 나는 그리스바하를 참고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모든 다른 사본들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어떤 사본들에, 그리고 어느 교부들에서 어떤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나는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금방 이 구절에 대한 참조들이 있으며- 다른 사본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나는 나아가서 다른 사본들이 모두 라는 말을 ‘이유없이’로 참조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복음서 사본들과 교부들이 인용한 구절은 이 말을 포함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대부분은 그 문제를 나처럼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티센도르프- 가장 오래된 사본- 를 참조하였는데, 이 말이 그곳에 한마디도 없었다! 나는 루터의 번역들을 조사해보았다, 그리고 그의 번역에서 문제를 가장 빨리 깨달았으며, 이 말은 그곳에서도 역시 없었다.

The very word which infringes the whol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was added to the Gospels in the fifth century and is not to be found in the best manuscripts.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전체 의미를 파괴하는 바로 이 말은 오 세기에 복음서에 삽입되었고, 가장 신빙성있는 사본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Someone inserted the word, and there were others who approved of it and wrote commentaries upon it.

누군가가 이 말을 첨가시켰고, 그것을 승인하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기록한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Christ could not and did not utter that dreadful word; and the first, simple, direct meaning of the whole passage, which occurred to me and occurs to everyone, is the true meaning.

그리스도는 그토록 무서운 말을 표현할 수도 없었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첫번째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전체 구절의 의미가, 나에게 나타났으며 모든 사람에게 났으며, 그것이 바로 진실한 의미이다.

But more than this, I had only to understand that Christ's words always forbid all anger against any­one whatever, for the injunction not to say to any­one, 'Raca', or 'Thou fool', which had formerly perplexed me, to receive another meaning than that Christ forbids the use of abusive words. The strange, untranslated Hebrew word, Raca, supplied me with the clue. Raca means trampled on, destroyed, non-existing; and the word rak, a very usual word, has the sense of exclusion, only not. Raca means a man who should not be accounted a man. In the plural the word rekim is used in the Book of Judges (ix. 4) where it means 'lost persons'. And that is the word Christ bids us not to use of any man. As he bids us not use another word, fool, so also he bids us not use raca, which professes to free us from our human obligations to our neighbor. We get angry and do evil to men, and to justify ourselves we say that he with whom we are angry is a lost or insane man. And just those two words Christ bids us not to use of men or to men. Christ bids us not be angry with anyone and not justify our anger by declaring a man to be lost or insane.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모든 분노를 금지한다는 것을 나는 오직 깨달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라가’, 또는 ‘바보’라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과거엔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욕설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음 이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되지 않은 이상한 말 ‘라가(raca)’라는 말이 내게 단서를 제공하였다. raca는 짓밟히다, 파괴되다, 존재하지 않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매우 흔히 사용되는 rak는 제외의 의미로서, ‘오직…이 아니다’이다. raca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복수로서 레김(rekim)은 사사기(9장 4절)에서 사용되는데 의미는 ‘타락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하지 않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그가 다른 말인 ‘바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의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말하는 raca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해를 가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이 타락하였거나 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말을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나 사람들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하여서는 안되며, 사람을 타락하였다거나 미쳤다고 주장하여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And so instead of a cloudy, indefinite expression admitting of arbitrary interpretation, in Matt. v. 21-8, I found Christ's first clear and definite com­mandment: Live at peace with all men and never consider your anger against any man justified. Do not consider anyone, or call anyone, lost or a fool (v. 22). And not only must you not consider your anger against another justifiable, but you must not consider another's anger against yourself causeless; and therefore if anyone is angry with you, though he be in the wrong, yet before saying your prayers go and remove his hostile feeling (v. 23, 24). Try in advance to destroy any enmity between yourself and others that it may not flame up and destroy you (v. 25, 26).

그리하여 임의적인 해석을 허용하고 애매하며 부정확한 표현대신에, 마태복음 5장 21-28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명료하고 정확한 제 1 계명을 발견하였다: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라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한 너희의 분노도 정당하다고 여기지 말라. 어떤 사람을 타락하였다고 여기지도 부르지도, 바보라고 여기지도 부르지도 말라(22절).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너희의 분노를 정당하다고 여겨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너희에 대한 다른 사람의 분노도 이유없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분노한다면, 비록 그가 잘못하였더라도, 너희의 기도를 올리기 전에 가저 그의 적대적인 감정을 없애도록하라(23,24절). 너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반목을 미리 제거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것이 활활 타올라서 너희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라(25,26절).

After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revealed itself to me with equal clearness. It also begins with a reference to the ancient law. In Matt. v. 27-30 it is said: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Exod. xx. 14].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looketh on a woman to lust after her hath committed adultery with her already in his heart. And if thy right eye causeth thee to stumble, pluck it out, and cast it from thee; for it is profitable for thee that one of thy members should perish, and not thy whole body be cast into hell. But if thy right hand causeth thee to stumble, cut it off and cast it from thee: for it is profitable for thee that one of thy members should perish, and not thy whole body go into hell.'

제 2의 계명이 또한 동일한 명료성을 가지고 나에게 나타났다. 마태복음 제5장 7절에서 30절까지에 옛 율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출애급기 20장 1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Matt. v. 31-2: 'It was said also,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let him give her a writing of divorcement [Deut. xxiv. i]. But I say unto you, everyone that putteth away his wife [besides the sin of adultery, gives her cause to commit adultery], and whosoever shall marry her that is put away committeth adultery.'

마태복음 5장 31절에 ‘또한 기록되었으니,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신명기 24장 1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도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The meaning of these words appeared to me to be this: a man should not admit even the thought that he can have connexion with any woman but the one with whom he first has sexual relations, and must never change her for another as was per­mitted by the Mosaic law.

이러한 말들의 의미는 내게 이렇게 보였다: 남자는 그가 제일 처음 성 관계를 가진 여성 외에 다른 여자와 결합할 생각조차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허용되던 것처럼 선택한 여성을 다른 여성과 바꿀 수 없다.

As in the First Commandment against anger we are advised to extinguish anger at its commence­ment, advice that is illustrated by the comparison with a man brought before a court of justice, so here Christ says that adultery arises from the fact that women and men regard each other as objects of desire. That this may not be so it is necessary to remove all that might arouse lust. One must avoid all that evokes lust, and having once united oneself with a woman must under no circumstances aban­don her, for the abandonment of wives causes de­pravity. The abandoned wives tempt other men and spread depravity abroad in the world.

분노를 금지하는 제 1 계명에서, 법정에 세워지는 사람과의 비교에 의한 예가 주는 충고와 같이, 우리가 분노가 시작될 때부터 분노를 끄라는 권고를 받는 것처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서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에서 간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정욕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욕을 불러오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일단 한 여자와 결합한 이상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내를 버림은 타락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버려진 아내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널리 세상에 타락을 퍼뜨린다.

The wisdom of this commandment impressed me. It removes all the evil that flows from sexual rela­tions. Men and women, knowing indulgence in sexual relations to lead to strife, should avoid all that evokes desire; and, knowing it to be the law of man's nature to live in couples, should unite with one another in couples and never under any cir­cumstances infringe these alliances; so that the whole evil of strife caused by sexual relations is removed by the fact that there are no solitary men or women left deprived of married life.

이 계명의 지혜는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성 관계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악들을 제거한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성 관계에 탐닉하는 것이 불화를 불러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한 쌍으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능의 법칙인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서로가 한 쌍이 되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결합들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성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는 불화에 의한 모든 악은, 결혼 생활을 박탈당한 체 살아가는 고독한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서 제거된다.

But the words which had always surprised me when reading the Sermon on the Mount, except for the sin of adultery, understood in the sense that a man may divorce his wife if she has committed adultery, now struck me yet more forcibly.

그런데 내가 산상수훈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던 말인,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은, 만일 그녀가 간음을 하였다면 자신의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 지금 나에게 훨씬 더 강하게 충격을 주었다.

In addition to the fact that there is something undignified in the way of expressing this thought, putting this strange exception to the general rule (which is introduced like a note to a paragraph of a code of laws) beside profoundly important truths, the exception itself contradicts the fundamental thought.

이런 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무게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에 덧붙여서, 가장 심오한 진리들 옆에 일반적인 규칙에 대한 이런 이상한(법률 조항의 단락에 단서처럼 삽입된) 예외를 두는 것, 즉 예외 그 자체가 근본적인 사상에 모순되는 것이다.

I turned to the commentators, and they all (St. John Chrysostom and the others), and even the learned theological critics such as Reuss, admitted that these words meant that Christ sanctions divorce in case of a wife's adultery, and that in Matt. xix in Christ's remarks forbidding divorce, the words 'except for fornication' mean the same thing. I read and re-read chapter v. 32, and it seemed to me that it could not mean an approval of divorce. To verify this I referred to the contexts, and found in the Gospels of Matt. xix, Mark x, and Luke xvi, and 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an explanation of the teaching of marriage inviola­bility without any exceptions.

나는 주석가들을 참조하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성 크리서스톰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로이스 같은 학식있는 신학 비평가들도, 이 말은 그리스도가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9장 9절의 이혼을 금지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음행한 연고외에’도 똑 같은 의미라고 인정했다. 나는 5장 32절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그것은 이혼을 승인함을 의미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문맥들을 참조하였으며,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그리고 누가복음 16장 등의 복음서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어떤 예외도 없이 결혼파기는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였다.

In Luke xvi. 18 it is said: 'Every one that putteth away his wife, and marrieth another, committeth adultery: and he that marrieth one that is put away from a husband committeth adultery.'

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In Mark x. 5-12 it is also said, without any ex­ception: 'For your hardness of heart Moses wrote this commandmen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male and female made he them.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cleave unto his wife; and the twain shall become one flesh: so that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 man put asunder. And in the house his disciples asked him again of this matter. And he said unto them,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and marry another, committeth adultery against her. And if she herself shall put away her husband, and be married to another, she committeth adultery.' The same is repeated in Matt. xix. 4-9.

마가복음10장 5~12절에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며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는데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마태목음19장 9절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vii. 1-12, the idea of forestalling depravity by each husband and wife, when once they have united, not abandoning one another, but satisfying one another in sexual relations is developed. It is also plainly said that neither of them must on any account desert the other to have relations with someone else.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첫번째 서한, 7장 1~12절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한 번 결합하면 서로를 버리지 않고, 성 관계에서 서로를 만족시킴으로써, 각기 남편과 아내에 의한 타락을 미연에 방지하는 개념이 전개되어 있다. 그들 중의 어느 편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과 관계들을 가지기 위해서 상대방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By Mark, Luke, and Paul's Epistle divorce is not sanctioned. The sense of the explanation that a husband and a wife are one flesh, united by God- an explanation repeated in two of the Gospels- does not sanction divorce. By Christ's whole teaching which bids us forgive all and makes no exception in the case of an unfaithful wife, divorce is not sanctioned. The meaning of the whole passage, which explains that the dismissal of a wife is the cause of depravity, gives it no sanction.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바울의 서한에 의하면 이혼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결합되었다는 설명의 의미- 두 복음서에서 되풀이 되는 설명- 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하며 타락한 아내의 경우에서도 예외를 두지 않는 그리스도의 전체 가르침에 의해서, 이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전체 구절의 의미는, 아내를 버림이 타락의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On what is the interpretation based which sanc­tions divorce from an adulterous wife? Only on the words in Matt. v. 32, which seemed to me so strange. They are interpreted by everyone to mean that Christ sanctions divorce if a wife commits adultery, and these same words are repeated in many of the copies of the Gospels and by many Fathers of the Church instead of the words except for fornication (Matt. xix. 5-9).

간음한 아내와의 이혼을 허용한다는 해석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오직 마태복음 5장 32절의 말들이며, 그 말은 내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만일 아내가 간음죄를 범하면 그리스도가 이혼을 허용함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며, ‘음행한 연고 때문에’라는 말 대신에, 이와 똑 같은 말들이 많은 성서 사본들과 많은 교부들에 의해서 반복된다.

Again I began to consider these words, but it was long before I could understand them. I saw that there must be a mistake in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but where the mistake lay I was long unable to discover. The mistake was evident. Con­trasting his commandment with the law of Moses under which any man, as is there said, who hates his wife, can dismiss her and give her a writing of divorcement, Christ says: 'But I say unto you, that everyone that putteth away his wife, saving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or, besides the cause of fornication], causeth her to commit adultery.' These words present no antithesis to the Mosaic law, nor even any decision as to whether one may, or may not, divorce. It is only said that putting away a wife gives her occasion to commit adultery.

나는 다시 이 말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번역과 해석에서 틀림없이 오류가 있음을 알았으나,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했다. 오류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도의 계명과, 자신의 아내를 미워하는 누구라도, 기록된 것처럼, 아내를 버리고 이혼 증서를 주는 모세의 율법을 대비하면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는 자는 이는 저도 간음하게 함이요.’ 이 말들은 모세의 율법과 아무런 대조가 되지 않으며, 심지어 이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해답이 없다. 오직 아내를 버림은 그녀에게 간음할 기회를 준다고 말하고 있다.

And then suddenly an exception is made in the case of a wife guilty of adultery. This exception concerning a wife guilty of adultery when the matter in hand related to the husband, would in any case be strange and unexpected, and occurring where it does it is simply stupid, for it destroys even such doubtful meaning as the verse otherwise had. It is said that putting away a wife occasions her to commit adultery, and it then allows you to put away a wife guilty of adultery; as though a wife guilty of adultery will then no longer commit adultery.

그런데 갑자기 간음한 아내의 경우에 예외를 두었다. 눈 앞의 문제가 남편과 관련된 경우 아내의 간음에 대한 이런 예외는 어쨌든 이상하고 의외일 것이며, 그것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단순히 어리석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예외는 심지어 그 구절이 반대의 경우에 가지고 있던 의심스러운 의미조차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버리는 것은 그녀에게 간음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간음한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용한다; 이것은 마치 간음한 아내는 이제 더 이상 간음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But, more than that, when I examined this passage more carefully I noticed that it does not even make sense grammatically. It is said that everyone that putteth away his wife, saving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causeth her to commit adultery, and the sentence ends! It refers to a man, and says that if he puts away his wife he gives her occasion to commit adultery. Why is it said, saving for the cause of the wife's adultery? If it were said that a man divorcing his wife for any cause except her com­mission of adultery, commits adultery, then the sentence would be correct. As it is, to the gram­matical subject everyone that putteth away, there is no predicate except causeth. How can that predicate relate to the words saving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It is impossible to 'cause, saving for the wife's fornication'! Even if with the words 'saving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were included the words 'the wife's', or 'her' (which is not done), even then those words could not relate to the predicate 'causeth'. These words in the accepted interpretation are related to the predicate, putteth away, but putteth away is not the chief predicate: the chief predicate is causeth. Why is 'except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wanted? With adultery or without it a husband who puts away his wife equally causeth. The ex­pression reads as though someone were to say: 'Whoso depriveth his son of food, except for [or besides] the sin of cruelty, causeth him to be cruel.' Such an expression evidently cannot imply that the father may deprive his son of food if the son is cruel. If it has any meaning it can only be that the father who deprives his son of food, besides the sin of being cruel himself, causes the son too to be cruel. So the Gospel expression would have a meaning if, instead of the words the sin of fornication, it read 'the sin of voluptuousness, dissoluteness, or anything of that kind, expressing not an action but a quality.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나가 이 구절을 좀더 세밀하게 조사하였을 때 그것은 심지어 문법적으로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음행한 연고 없이 그 아내를 버리는 자는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서 문장은 끝난다. 이것은 남편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내를 버린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간음을 범할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왜 ‘음행한 연고 외에’라고 말했을까? 만일 아내가 간음함을 제외한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저지르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면, 문장은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버리는 자는’의 문법적 주어에 대해서, ‘원인을 주다’외에는 술어가 없다. 어떻게 이 술어가 ‘간음한 연고 외에’라는 말에 연결될 수 있겠는가? ‘아내의 간음한 연고 외에, 원인을 주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간음한 연고 외에’라는 말에, ‘아내의’, 또는 ‘그녀의’ (그렇게 되지 않았다)라는 말들이 포함되더라도, 그 말들은 술어 ‘원인을 주다’와 관계될 수 없다. 인정되는 해석에서 이 말들은 술어인 ‘버리다’와 관계되지만, ‘버리다’는 주된 술어가 아니다: 주된 술어는 ‘원인을 주다’이다. ‘간음한 연고 외에’는 왜 필요한 것일까? 간음을 하였든 아니하였든 자신의 아내를 버리는 남편은 똑같이 간음에 대한 원인을 준다. 위의 표현은 마치 누군가가 다음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잔인하다는 죄 외에 자신의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자는 그를 잔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분명히 만일 아들이 잔인하다면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음을 의미할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아버지는, 자신이 잔인함의 죄 외에도, 아들 역시 잔인하게 하는 것이다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간음의 죄’라는 말 대신에, 정욕의 죄, 방탕의 죄, 또는 그런 종류의 말, 즉 행위가 아니라 성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읽는다면 복음서의 표현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And I asked myself: Is it not simply said that he who puts away his wife, besides being himself guilty of dissoluteness (since people divorce one wife in order to take another), causes his wife also to com­mit adultery? If the word 'fornication' in the text is expressed by a word that may also mean dis­soluteness, the meaning is clear.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의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자신이 방탕하다는(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기 때문이다) 죄 외에도, 그의 아내에게도 간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단순히 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원전에서 ‘간음’이란 말이 또한 방탕함을 의미하는 말로서 표현된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What has so often happened in such cases occurred again this time. The text confirmed my supposition so that no further doubt about it was possible.

이러한 경우에 흔히 일어 나던 일이 이번에도 다시 일어났다. 원전이 나의 추정을 확신하여 주었으므로 그런 추정 대한 어떤 더 이상의 의심도 불가능했다.

The first thing that caught my eye on looking at the Greek text was that the word is translated by the same word 'fornication' that is used to translate the word, , which is quite a different word. But perhaps these words are synonymous, or are used in the Gospels alterna­tively? I looked up all the dictionaries, both the general dictionary and the Gospel dictionary, and I saw that the word which corresponds to the Hebrew zono, and to the Latin fornicatio, the Ger­man Hurerei, French libertinage, and the English 'incontinence', has a most definite meaning, and never in any dictionary has meant or can mean the act of fornication, adultere, Ehebruch, as it is trans­lated. It means a sinful condition or quality, and never an action, and should not be translated by 'fornication'. Moreover, I see that the word 'adultery', and 'to commit adultery', is everywhere in the Gospels, and even in these verses, represented by the word . And I only had to correct this evidently intentional error in translation for the meaning given by the commentators on this passage and on the passage in chap. xix to become quite impossible, and for it to become indubitable that relates to the husband.

그리스어 원전을 쳐다보았을 때 나의 시선을 끈 첫번째의 것은, 가, 상당히 다른 말인 를 번역할 때 사용되는, ‘간음’과 똑 같은 말에 의해서 번역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동의어이거나, 복음서에서 대체어로서 사용되는 것일까? 나는 일반 사전은 물론 복음 사전까지 모든 사전들을 찾아 보았다, 그리하여, 는, 히브리어로 zono, 그리고 라틴어로 fornicatio, 독일어로 Hurerei, 불어로 libertinage, 및 영어로 incontinence와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결코 어떤 사전에서도 간음 행위, adultere, Ehebruch를 의미했거나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죄를 지은 상태나 성질을 의미하며, 결코 행위를 의미하지 않으며, ‘간음’으로 번역될 수 없다. 또한, ‘간음’, 그리고 ‘간음을 하다’는 말은 복음서 어느 곳에나 있으며, 심지어 이런 구절 들에서 라는 말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과 19장의 구절에 관하여 주석가에 의해서 주어진 의미가 불가능하도록, 그리고 그것이 의혹이 없어져서 가 남편에게 관련 되도록, 번역에 있어서 이런 명백한 의도적인 오류를 바로잡아야만 했다.

The translation anyone knowing Greek would make is this: -besides, - the guilt, - of dissoluteness, - causes, her, - to commit adultery; and the result is, word for word: 'he who puts away his wife, be­sides the sin of dissoluteness, causes her to commit adultery.'

다음은 그리스어를 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번역이다: - 이외에, - 죄악, 방종의, - …하게하다, - 그녀의, - 간음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방탕의 죄 이외에 아내와 이혼하는 자는 아내에게 간음하게 하는 것이니라.’

The same sense is found in ch. xix. One need but correct the erroneous translation of the word , and replace the word 'fornication' by the word 'dissoluteness', for it to become plain that the words: cannot refer to the wife. And as the words can only mean 'besides the husband's sin of dissoluteness', so the   in ch. xix can only refer to the husband's dissoluteness. The words are- , word for word: 'if not from dissolute­ness.' And this meaning appears: that Christ, replying in this passage to the belief of the Pharisees, who supposed that if a man left his wife, not to live dissolutely but in order to marry another woman, he was not committing adultery- Christ says that the leaving of one's wife, i.e. the cessation of marital relations with her, even if not occasioned by dis­soluteness, but done for the sake of marriage- union with another, is also adultery. And a plain meaning results which accords with the whole teaching, with the context, with the grammar, and with logic.

똑 같은 의미가 19장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오직 잘못된 말인 의 잘못된 번역을 교정하고, ‘간음’이란 말을 ‘방종’으로 바꾸면, 는 아내에게 적용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는 오직 ‘남편의 방탕한 죄’를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19장의 는 오직 남편의 방종함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말은- 이고, 한마디로: ‘만일 방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면’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구절에서, 만일 방종스럽게 살려고 함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떠난다면, 그는 간음하는 것이 아니라는 바리새인들의 믿음에 대답한 것으로- 그리스도는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 즉, 그녀와의 부부관계를 중단하는 것은, 심지어 방종함이 원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간음함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전체 의미, 문맥, 문법, 그리고 논리와 일치되는 간단한 의미로 귀결된다.

And this clear and simple meaning, flowing from the words themselves and from the whole teaching, I had to discover with the greatest difficulty. In­deed, read the verse in German or in French, where it is plainly said pour cause d'infidelite, and, a mains que cela ne soit pour cause d'infidelite, and can you guess that it means something quite different? The word parektov", which in all the dictionaries means excepte, ausgenommen, besides, is translated by a whole sentence- a mains que cela ne soit; the word porneiva" is translated infidelite, Ehebruch, fornication. And on this intentional perversion of the text rests an inter­pretation which infringes the moral, religious, grammatical, and logical sense of Christ's words.

그러므로 말 자체로부터 그리고 전체 의미로부터 흘러 나오는, 이토록 명료하고 단순한 의미를, 나는 엄청난 어려움 끝에 발견해야만 했다. 정말, 독일어나 불어로 번역된 구절을 읽어보라, 그곳에는 단순히 pour cause d’infidelite, 그리고, a mains que cela ne soit pour cause d’infidelite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것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은, 모든 사전에서 excepte, ausgenommen, besides를 의미하는데, 전체 문장a moins que cela ne soit으로 번역되며; infidelite, Ehebruch, 간음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런 고의적인 원문의 왜곡 위에 그리스도의 말씀의 도덕적, 종교적, 문법적, 그리고 논리적 의미가 놓여있다.

Again I was confirmed in the terrible but joyful truth that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is plain and simple and its statements are important, but that interpretations of it, based on a wish to justify existing evil, have so obscured it that it has to be rediscovered with difficulty. It became plain to me that if the Gospels had been discovered half burnt or obliterated it would have been easier to recover their meaning than it is now, when dishonest interpretations have been applied to them with the direct purpose of perverting and hiding the meaning of the teaching. In this case it was still plainer than in the former that some private aim of justifying the divorce of some Ivan the Terrible had been the reason for obscuring the whole doctrine of marriage.

나는 다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단순하며 그의 명제는 중요하지만, 그것의 해석들은, 기존의 악을 정당화하려는 희망 위에 바탕을 두고서, 가르침을 너무나 모호하게 만들어서 어려움 끝에 재발견되어야 했다는, 무섭고도 기쁜 진리를 확인하였다. 만일 복음서들이 절반이 불타거나 제거되었다면 그것들의 의미를 되찾음이, 비양심적인 해석들이 가르침의 의미를 왜곡하고 숨기려는 노골적인 목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지금보다는 쉬웠을 것임이 내게 명백해졌다. 폭군 이반과 같은 자들이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결혼에 관한 전체 교리를 흐리게 한 이유가 되어왔던 과거보다는, 이 경우가 훨씬 쉬웠다.

As soon as one rejects the commentaries, in place of what was obscure and indefinite the definite and clear second commandment of Christ reveals itself.

우리가 주석들을 거부하자 마자, 모호하고 막연하던 구절 대신에 그리스도의 정확하고 명료한 제 2의 계명이 나타난다.

Do not make the desire for sexual relations into an amusement; let every man, if he is not a eunuch- that is, if he needs sexual relations- have a wife, and each wife a husband, and let the husband have only one wife and the wife only one husband, and under no pretext infringe the sexual union of one with the other.

성 관계에 대한 욕구를 쾌락으로 삼지 말라; 모든 남자가, 만일 성불구가 아니라면- 즉, 그가 성 관계들을 필요로 한다면- 아내를, 각각의 아내는 남편을 가지게 하라, 그리고 남편들은 오직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오직 남편을 가지게 하라, 그리고 어떤 구실로도 전자와 후자의 성적인 결합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Immediately after the second commandment comes again a reference to the ancient law, and the third commandment is set forth (Matt. v. 33-7): 'Again,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forswear thyself, but shalt perform unto the Lord thine oaths [Lev. xix. 12; Deut. xxiii. 21]: but I say unto you, Swear not at all; n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n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neithe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Neither shalt thou swear by thy head, because thou canst 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But your speech shall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is of the evil one.'

제 2 계명에 바로 뒤 이어서 다시 옛 율법에 대한 참조가 나타난다, 그리고 제 3의 계명이 제시된다 (마태복음 5장 33-7절):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레위기19장 12절, 신명기 23장 21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니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나느니라.’

This passage when I had read it before had always perplexed me. It did so, not by its obscurity (as did the passage about divorce), nor by contra­dicting other passages (as did the sanction of anger with a cause), nor by the difficulty of fulfilling it (as with the passage about offering the other cheek); on the contrary, it perplexed me by its clearness, simplicity, and ease. Side by side with rules the profundity and importance of which terrified and touched me, one suddenly found such an un­necessary, empty, easy rule, which was of no conse­quence to me or to others. As it was, I swore neither by Jerusalem, nor by God, nor by anything else, and it cost me no effort to abstain: besides which it seemed to me that whether I swore or not could have no importance to anyone. And wishing to find an explanation of this rule which perplexed me by its ease, I turned to the interpreters; and this time the interpreters really helped me.

이 구절은 이 전에 내가 그것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의 모호함도(이혼에 관한 구절이 그랬듯이), 다른 구절들과의 모순도(이유있는 분노의 허락에서 그랬듯이), 그것을 이행함의 어려움도(다른 뺨을 내미는 구절처럼)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그 명료함, 단순함, 그리고 편안함으로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심오함과 중요함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감동을 주는 규칙들과 나란히 있는, 우리가 갑자기 그토록 불필요하며, 공허하고, 쉬운 규칙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은, 나는 예루살렘이나, 하나님 이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삼가는데 아무런 노력도 들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기로는 내가 맹세하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너무 쉬운 바람에 나를 당혹하게 하는 이 규칙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나는 주석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 번에는 정말로 주석가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They all see in these words a confirmation of the third commandment of Moses- not to swear by the name of God. They explain these words to mean that Christ, like Moses, forbids us to pronounce God's name in vain. But besides this the interpreters also explain that this law of Christ's- not to swear-  is not always obligatory and does not relate at all to an oath of loyalty which each citizen gives to those who hold authority; and texts are selected from Holy Writ not to confirm the direct meaning of Christ's injunction, but to prove that it may and should be disobeyed.

그들은 모두 이 말에서 모세의 제 3 계명-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을 확인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이 말들이 그리스도가, 모세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고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주석가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이 율법- 맹세하지 말라- 은 언제나 의무적인 것은 아니며,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각각의 시민이 행하는 충성의 서약과는 전혀 관계 없으며, 원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의 명백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행할 수 도 있고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택된다고 설명한다.

It is said that Christ himself confirmed an oath in a court of law when in reply to the High Priest's words, 'I adjure thee by the living God', he replied, 'Thou hast said'. It is said that the apostle Paul called God to witness the truth of his words, which is evidently the same as an oath; it is said that oaths were enjoined by the law of Moses and that God did not abolish these oaths; it is said that it is only vain, pharisaical, hypocritical oaths that are abolished.

그리스도 자신도 법정에서 ‘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코 너에게 명한다’는 대제사장의 말에, ‘너희는 말하였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말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렀으며, 그것은 명백히 맹세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맹세는 모세가 명령하였으며, 하나님은 이 맹세들을 폐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헛되며,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적인 맹세들이 폐지된다고 말한다.

And on understanding the meaning and aim of these explanations I understood that Christ's in­junction concerning oaths is not at all so insignifi­cant, easy, and unimportant as it had seemed to me when, among the oaths prohibited by Christ, I had not included oaths demanded by the State.

그리고 이런 설명들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았을 때, 국가가 요구하는 맹세들을 내가 포함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느껴졌던 것보다, 맹세에 관한 그리스도의 금지가 결코 사소 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았다.

And I asked myself: Is it not said here that the oath is also forbidden for which the Church com­mentators are so anxious to make an exception? Is not the oath here forbidden, that very oath without which the separation of men into nations is im­possible and without which a military class is im­possible? Soldiers are those who do all the violence, and they call themselves 'the sworn'. Were I to ask the Grenadier how he solves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Gospels and the military code he would tell me that he has been sworn in: that is to say, has taken an oath on the Gospels. Such replies have always been given me by military men. So necessary is an oath for the organization of the terrible evil which is produced by violence and war, that in France, where Christianity is officially re­jected, the oath is nevertheless retained. Indeed if Christ had not said 'Swear not at all', he ought to have said it. He came to destroy evil, and had he not abolished the oath this enormous evil would have remained in the world. Perhaps it will be said that in the time of Christ that evil was not noticeable. But this is untrue: Epictetus and Seneca spoke about not taking an oath to anyone; in the laws of Manu that rule is found. Why should I say that Christ did not see this evil? And especially when he said this so directly, clearly, and even minutely.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도 교회의 주석가들이 그토록 애써서 예외를 두고 있는 맹세도 또한 금지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도 맹세는 금지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맹세가 없다면 사람들을 국가들로 나눌 수도 없고, 그것이 없다면 군인 계급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맹세한 자’라고 부른다. 만일 내가 근위병에게 복음서와 군법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맹세를 하였다고, 즉,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폭력과 전쟁에 의해서 생산되는 무서운 악의 조직을 위해서 맹세가 너무나 필요하므로, 프랑스에서는 비록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맹세가 강요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악을 멸망시키러 세상에 왔다, 그런데도 그가 맹세를 폐지하지 않았다면, 이 엄청난 악은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의 시절에는 그런 악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에픽테토스와 세네카는 어느 누구에게도 맹세하지 말 것에 대해 말했다; 마누 법전에도 이 같은 명령이 보인다. 내가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이런 악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특히 그가 이런 명령을 그토록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세밀하게 말했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He said: Swear not at all. That expression is as simple, clear, and indubitable as th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and as little susceptible of misinterpretation, especially as it is added in con­clusion, that anything demanded of you beyond yes and no comes from the source of evil.

그가 말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이 표현은 ‘심판하지 말라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며, 확실할 뿐만 아니라, 특히 결론적으로, ‘예’ 그리고 ‘아니오’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악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고 덧붙이는 것과 같이, 오해의 여지가 없다.

Really, if Christ's teaching is that one should always obey the will of God, how can a man swear to obey the will of man? The will of God may not coincide with the will of man. Indeed, in this very passage Christ says that very thing. He says, Swear not by thy head, for not only thy head but every hair of it, is in God's power. The same is said in the Epistle of James.

사실, 만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어찌 사람의 의지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와 일치되지 않는다. 실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자신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말한다.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At the end of his Epistle, in conclusion, the Apostle James says (ch. v. 12): But above all things, my brethren, swear not, neither by the heaven, nor by the earth, nor by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a be yea, and your nay, nay; that ye fall not under judgment. The Apostle says plainly why one should not swear: the oath by itself appears innocent, but from it people fall under judgment, and therefore swear not at all. How could what is said both by Christ and by the Apostle be said more plainly?

결론적으로,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한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야고보서 5장 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정함을 면하라.’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한다: 맹세 그 자체는 죄가 아닐지 모르나 맹세를 통해서 우리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 그리스도와 사도가 말한 것 이상으로 더 분명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But I had been so entangled that I long asked myself in astonishment: Can it be that it means what it does mean? How is it that we are all made to swear on the Gospels? It is impossible!

그러나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오랫동안 놀라움 속에서 스스로 물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진정한 뜻일 수 있을까? 어찌하여 우리 모두가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But I had already read the commentators and had seen how this impossibility was accomplished. As with the explanations of the words, Judge not, do not be angry with anybody, do not break the bond of husband and wife, so also here. We have established our ways of life, we like them and wish to consider them sacred. Then comes Christ, whom we consider to be God, but we do not wish to aban­don our ways of life. What are we to do? Where possible, slip in the words without a cause, and reduce the rule against anger to nothing; where possible, like the most unscrupulous of unjust judges,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articles of the law so as to make it mean the very reverse, and that instead of a command never to divorce one's wife it should mean that one may divorce her. And where, as in the case of th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and swear not at all, it is quite impossible to misinterpret, act boldly and directly contrary to the teaching, affirming that we are obeying it. Indeed the chief obstacle to understanding that the Gospels forbid every vow, and especially every oath of allegiance, is that pseudo- Christian teachers with extraordinary effrontery oblige men, on the Gospels themselves, to swear by the Gospels- that is to say, oblige them to do what is contrary to the Gospels.

그러나 나는 이미 주해서들을 읽었으며 이런 불가능함이 이루어진 방법을 알았다. ‘심판하지 말라, 누구에게도 분노하지 말라,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파괴하지 말라’의 해석들처럼, 그러한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법들을 확립하였다, 우리는 그것들에 애착을 느끼며 신성하다고 여기려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온다, 그는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능한 곳에 ‘이유 없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분노에 대한 규칙을 무산시켜라; 가능한 곳에, 마치 편파적인 법관들 같이 가장 비양심적인 사람들처럼, 율법의 조항들의 의미가 정반대를 의미하도록 해석하여서 자신의 아내와 결코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 대신에 이혼해도 좋다고 하라. 그리고,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고 결코 맹세하지 말라’의 경우처럼, 왜곡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담하게 그리고 정면으로 가르침과 반대로 행동하라. 진실로 복음서가 모든 맹세를, 특히 모든 충성의 맹세를 금지한다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된 장애는, 거짓 기독교 교사들이 대단한 뻔뻔스러움으로, 복음서에 손을 얹고서, 복음서에 의해서 맹세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복음서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How can it occur to a man who is obliged to swear on a cross, or on the Gospels, that the cross is sacred because on it he was crucified who forbade us to swear, and that when taking an oath one perhaps kisses, as what is sacred, the very place in the book where it clearly and definitely says: Swear not at all.

십자가나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해야 하는 사람에게, 맹세를 금지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십자가가 신성하다는 생각이 어찌 들 수 있겠으며, 맹세를 할 때 아마도 신성하다고 키스하는 바로 복음서의 바로 그 곳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명료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어찌 들 수 있겠는가?

But this effrontery no longer disconcerted me. I saw clearly that in Matt. v, verses 33 to 37, a definite and practicable third commandment is clearly expressed: Never take an oath to anyone, anywhere, about anything. Every oath is extorted for evil ends. Following this third commandment comes a fourth reference and a fourth command­ment (Matt. v. 38-42; Luke vi. 29, 30):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but I say unto you. Resist not him that is evil: but whosoever smiteth thee on th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And if any man would go to law with thee,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ak also. And whosoever shall compel thee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ain. Give to him that asketh thee, and from him that would borrow of thee turn not thou away.'

그러나 이런 뻔뻔스러움은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나는 마태복음 5장 33~37에서, 명확하고 실행 가능한 제 3의 계명이 명백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맹세하지 말라. 모든 맹세는 악한 목적으로 강제된다. 이와 같은 3의 계명에 뒤이어서 네 번째 참조와 제 4 계명이 나온다(마태복음 5장 38-42절; 누가복음 6장 29,30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I have already spoken of the direct and definite meaning of these words and of the fact that we have no right to give them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e commentaries on these words, from St. John Chrysostom till today, are truly amazing. These words please everybody, and in references to them they make all kinds of profound conjectures, ex­cepting one only, namely, that the words have their plain meaning. The Church commentators, not at all embarrassed by the authority of him whom they call God, most calmly restrict the meaning of his words. They say: 'It is, of course, understood that all these commandments about enduring wrongs, about renouncing revenge, are in fact directed against the Jewish spirit of relentlessness, and do not prohibit either public measures for restricting evil and punishing evil-doers, or the private, personal exertions and efforts of each individual to maintain the inviolability of his rights, to correct wrong­doers, and to deprive ill-intentioned men of the possibility of harming others; for otherwise the spiritual laws of the Saviour would themselves in the Jewish way become mere words, and might serve to promote the success of evil and the sup­pression of virtue. A Christian's love should be like God's love; but the divine love refrains from limiting and punishing evil only so long as it remains within limits more or less innocuous to God's glory and to the safety of one's neighbors; in the contrary case evil should be limited and punished, a duty which is specially incumbent on the Government.' (The Annotated Gospel of the Archimandrite Michael, which is all based on the commentarie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The learned and free-thinking Christians are also not embarrassed by the meaning of Christ's words and correct him. They say that this is a very lofty saying, but one lacking in any possible application to life; for an application to life of the law of non-resistance to evil destroys the whole order of life which we have so admirably arranged: so say Renan, Strauss, and all the free-thinking commentators.

나는 이미 이런 말들의 직접적이며 명확한 의미와 우리는 그것들에 어떤 비유적인 해석을 부여할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말했다. 크리서스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말들에 대한 주해들은 진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 말들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단 한가지, 즉 이 말들이 가진 명백한 의미를 제외하고는, 이 말들을 참조하여, 온갖 심오한 억측들을 만들어 낸다. 교회의 주석가들은,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분의 권능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의 말씀의 의미를 제한한다. 그들은 말한다: ‘물론, 모욕을 참고, 복수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이 모든 계명들은 사실 유태인들의 무자비한 생각들을 반대함에 중점을 둔 것이며, 악에 제한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공적인 수단들과, 자신의 불가침의 권리들을 유지하기 위한 사적이며 개인적인 활동들과 노력들, 악인들을 교정하는 것 그리고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함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구세주의 정신적인 율법들 자체도 유태인들의 방식처럼 평범한 말들로 변할 것이며, 악의 성공과 선의 억제를 조장함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안전에 어느 정도 해로움이 없는 한에서만 악을 제한하고 처벌함을 삼가한다; 반대의 경우에는 악은 반드시 제한되고 처벌되어야 하며, 그것은 특별히 정부의 맡고 있는 의무이다. (대 수도원장 미카엘의 주해 복음서에서 인용하였으며, 이 주해서는 모두 교부들의 주해서에 기초를 두었다.) 학식 있으며 자유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들에 당황함이 없이 뜯어 고치고 있다. 이 말들은 매우 숭고한 말이지만 실생활에 적용 가능성을 결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악에 대한 무저항의 율법을 삶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준비한 삶의 전체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르낭, 스트라우스, 그리고 모든 자유사상적인 주석가들의 말이다.

But one need only take the words of Christ as we take those of the first man we meet and who speaks to us-  that is to say, assume that he means what he says- to do away with the necessity for any profound conjectures. Christ says: I consider that your method of securing your life is stupid and bad. I propose to you quite another method, as follows. And he speaks the words given in Matt. v. 38-42. It would seem that before correcting those words one should understand them. But that is just what no one wishes to do, having decided in advance that the order of our life which is infringed by those words is a sacred law of humanity.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심오한 억측에 대한 필요를 벗어 나기 위해서, 오직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 들이듯이,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나는 너희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 어리석고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마태복음 5장 38-42절에 주어진 말들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시정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들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무도 행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씀들에 의해서 파괴되는 우리의 삶의 질서가 인류의 신성한 율법이라고 미리 결정하기 때문이다.

I did not consider our life either good or sacred, and therefore understood that commandment sooner than other people. And when I had understood the words as they are spoken, I was amazed by their truth, exactitude and clarity. Christ says: 'You wish to destroy evil by evil. That is un­reasonable. That there should be no evil, do none.' And then he enumerates the cases in which we are accustomed to do evil, and says that in these cases it should not be done.

나는 우리의 삶을 선하거나 신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계명들을 다른 사람들 보다 빨리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말하여진 그대로의 말씀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말씀의 진리, 정확함 그리고 명료함에 놀라와 했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너희는 악을 악으로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합리하다. 악을 멸망시키려거든, 악을 행하지 말라.’ 그리고 나서 그는 우리가 악을 행함에 습관화된 경우들을 열거하고, 이런 경우들에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This fourth commandment of Christ was the first I understood, and it was the one which disclosed to me the meaning of all the others. This fourth, simple, clear, practicable commandment says: Never resist the evil-doer by force, do not meet violence with violence. If they beat you, endure it; if they take your possessions, yield them up; if they compel you to work, work; and if they wish to take from you what you consider to be yours, give it up.

예수의 이 제 4 계명은 내가 제일 처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모든 계명들의 의미를 내게 밝혀 준 것이었다. 이번의 단순하고, 명료하며, 실행 가능한 제 4 계명이 말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결코 폭력으로써 대항하지 말라, 폭력으로써 폭력에 대처하지 말라. 만일 그들이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을 참으라, 만일 그들이 너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그것들을 내어 주라;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일을 강요한다면, 일을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너희가 너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자 한다면, 그것을 포기하라.

And following that fourth commandment comes a fifth reference to the old law, and the fifth com­mandment (Matt. v. 43-8):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nd hate thine enemy [Lev. xix. 17, 18]: but I say unto you, Love your enemies, bless them that curse you,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and pray for them which despitefully use you, and persecute you; that ye may be sons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 he maketh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eth rain on the just and the unjust. For if ye love them that love you, what reward have ye? do not even the publicans the same? And if ye salute your brethren only, what do ye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the Gentiles the same? Ye therefore shall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그리고 이러한 제 4 계명 다음에 옛 율법에 대한 다섯번째의 언급이 나오고, 제 5 계명이 나온다 (마태복음 5장 43-8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레위기 19장 17,1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나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Those verses formerly seemed to me to be an explanation, completion, and enforcement- I would even say an exaggeration- of the precept about not resisting the evil-doer. But having found a simple, applicable, and definite meaning in each passage that began with a reference to the ancient law, I anticipated that the same would be the case here. After each quotation a law was announced, and each verse of the commandment had a meaning and could not be omitted, and so it should be here also. The concluding words, repeated by Luke, that God does not make distinctions between people but sends His blessings upon all, and that you therefore should be like God, not making distinctions be­tween people, and should not do as the Gentiles do, but should love all men and do good to all alike-  those words were clear, and they appeared to me to be like a confirmation and explanation of some definite rule; but what that rule was it was long before I could discern.

그들 구절들은 내게 있어서 이전에는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교훈에 대한 설명이며, 완성이고, 강행- 나는 심지어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옛 율법에 대한 참조로서 시작되는 각각의 구절에 들어 있는 단순하고, 실행가능하며, 그리고 명확한 의미를 깨닫고서, 나는 여기에서도 똑 같은 경우에 해당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각각 옛 율법에 대한 인용이 있은 뒤에 새로운 율법이 선포되었으므로, 계명의 제각기 구절은 의미가 있었고 생략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기서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할 것이다. 누가가 반복하면서 결론적인 말, 즉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며 그의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처럼,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하고, 이방인들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며,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그들 모두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그 말들은 명료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어떤 명확한 규칙에 대한 확인과 설명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규칙이 무엇이었는지를 내가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To love one's enemies. That seemed impossible. It was one of those beautiful phrases which can only be regarded as indications of an unattainable moral ideal. It was either too much, or nothing at all. One could abstain from injuring an enemy, but to love him was impossible. Christ could not prescribe an impossibility. Besides that, the very first words, the reference to the ancient law,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hou shall hate thine enemy', were questionable. In previous passages Christ quotes the actual, precise words of the Mosaic law, but here he uses words which had never been uttered. He appears to misrepresent the law.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것은 오로지 도달할 수 없는 도덕적인 이상의 상징들로만 여겨질 수 있는 미사여구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적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할 수 없다. 그것 뿐만 아니라, 옛 율법에 대한 언급, 즉 바로 첫번째 말들인, ‘너희의 원수을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라는 말은 의심스러웠다. 이전의 구절들에서 그리스도는 옛 율법 그대로를 인용하였으나, 여기서 그는 말해진 적이 없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As in the case of my former perplexities, the com­mentaries on the Gospels explained nothing to me. They all admit that the words, 'Thou shalt hate thine enemy', do not occur in the Mosaic law, but no explanation of this incorrect citation is given. They speak of the difficulty of loving enemies and bad people; and in most cases they correct Christ's words and say it is impossible to love one's enemies, but possible not to wish them evil or to do them harm; incidentally it is suggested that one may and should expose, that is to say oppose, one's enemies; mention is made of various degrees of attainability of this virtue, so that the ultimate deduction to be made from the Church commentaries is that Christ, for some unknown reason, made an incorrect citation of the Mosaic law and uttered many beautiful, but really empty and inapplicable, words.

나의 이전의 당혹했던 경우들처럼, 복음서들에 대한 주석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이런 부정확한 인용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수들과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고쳐서 원수를 사랑하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악을 원하지 않는 것이나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적발할 수도 있으며 적발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에 대한 성취 가능성의 다양한 정도가 언급되고 있어서, 교회의 주석들의 궁극의 결론은, 그리스도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세의 율법을 부정확하게 인용하였으며 많은 훌륭하지만, 사실 텅 빈 그리고 실행 불가능한 말들을 하였다는 것이다.

It seemed to me that this was unsatisfactory. There should be some clear and definite meaning here, as in the first four commandments. And to understand this meaning I first of all tried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incorrect citation from the law: hate your enemies. It is not for nothing that Christ, before each of his injunctions, quoted the words of the law: 'Thou shalt not kill, shalt not commit adultery', &c., and contrasted those words with his own doctrine. Without understanding what was alluded to in the words he cites from the old law one cannot understand what he enjoined. In the commentaries it is plainly said, what cannot but be admitted, that he cites words which are not found in the law; but it is not explained why he did so, nor what this incorrect citation means. It seemed to me that one had first to explain what Christ may have meant when he cited those words which do not occur in the law. And I asked myself: What can the words mean which Christ has in­correctly quoted from the Mosaic law? In all his former citations of the law only one precept of the ancient law is quoted, as: 'Thou shalt not kill;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Thou shalt not forswear thyself; A tooth for a tooth.' And in connexion with that single precept Christ's corresponding doctrine is announced. Here, however, two precepts are cited and contrasted one with the other;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nd hate thine enemy', so that evidently the basis of the new law should deal with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injunctions of the ancient law in reference to neighbors and enemies. And to under­stand more clearly wherein that difference lay, I asked myself: What do the words 'neighbor' and 'enemy' mean in Gospel language? And, on consulting the dictionaries and concordances of the Bible, I convinced myself that 'neighbor', when used by a Jew, always meant, and only meant, a Jew. That meaning of 'neighbor' is found also in the Gospel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Accord­ing to the view of the Jewish lawyer who asked 'Who is my neighbor?' a Samaritan could not be a neighbor. A similar definition of 'neighbor' is given in Acts vii. 27. 'Neighbor', in the language of the Gospels, means fellow-countryman, a man of one's own people. Therefore, surmising that the contrast Christ is setting up in this passage by citing the words of the law,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nd hate thine enemy', lies in the contrast of fellow-countrymen with foreigners, I asked myself what was an 'enemy' in the Jewish conception, and I found confirmation of my conjecture. The word 'enemy' is used in the Gospels almost always in the sense not of a personal foe but of a public, national enemy (Luke i. 71-4; Matt. xxii. 44; Mark xii. 36; Luke xx. 43, &c.). The singular number used for the word 'enemy' in these verses, in the phrase 'hate thine enemy', indicated to me that the national enemy is referred to. The singular number refers to the collective whole of the enemy people. In the Old Testament the conception of a hostile people is always ex­pressed in the singular.

나에게는 이런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여기에도, 앞의 4가지 계명들처럼, 어떤 명료하고 명확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한 율법으로부터의 부정확한 인용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스도가, 그의 처음의 명령들에 앞서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율법의 말들을 인용하고, 이 말씀들을 자기 자신의 가르침과 대조한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옛 율법으로부터 인용하는 말씀들 속에 암시된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가 명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주석서들에는,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에서 발견되지 않는 말들을 인용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한다, 그러나 왜 그가 그렇게 하였는지, 그리고 이런 부정확한 인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먼저 그리스도가 율법에 나타나지 않은 말들을 인용하였을 때 무엇을 의미하려 하였는지를 우리가 설명해야 한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부정확하게 인용한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그의 이전의 모든 인용들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이에는 이’처럼 오직 옛 율법의 단일한 가르침이 인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단일의 교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상응하는 교리가 선포되었다. 여기서는, 그러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들었다’는 말로서 두 가지 교리가 인용되어서 서로가 대비되고 있다, 그래서 명백히 새로운 율법의 기초는 이웃들과 원수들과 관련되는 차이점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복음서의 언어에서 ‘이웃’이라는 말과 ‘원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나는 사전들과 성서 색인들을 참조하여 본 결과, 유태인들이 사용하던 ‘이웃’은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유태인’을 의미했음을 확신했다. 그러한 ‘이웃’이라는 뜻은 또한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복음서의 비유에서도 발견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유태인 율법 선생의 시각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은 이웃일 수가 없었다. ‘이웃’에 관한 유사한 정의가 사도행전 7장 27절에 나온다. 복음서의 언어에서 ‘이웃’은 동포, 즉 자기 자신의 민족의 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제시하는 대조는 동포와 외국인과의 대조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유태인들의 생각에서 ‘원수’란 무엇인지를 자문하였으며, 나의 가정에 대한 확증을 발견하였다. 복음서에서 ‘원수’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개인적인 적이 아니라 공공의, 국가적인 원수의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누가1장 71~74, 마태 22장 44절, 마가 12장 35절, 누가 20장 43절 그 외 다른 구절). 이 구절들의,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구에서 ‘원수’라는 말에 사용된 단수는 국가적인 원수를 간주하는 것을 나에게 암시하였다. 단수는 적대 민족의 집합적인 전체를 언급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서 적대 민족의 개념은 언제나 단수로 표현된다.

And as soon as I understood this the difficulty was immediately removed as to why and how Christ, after previously always quoting the precise words of the law, could here cite words which had never been uttered. I had only to understand the word 'enemy' in the sense of national enemy, and 'neighbor' in the sense of compatriot, for that difficulty to disappear. Christ speaks of how, in the Mosaic law, the Jews were told to treat their national enemy. All those passages, scattered through different books of the Bible, in which they are bidden to oppress, slay, and exterminate other tribes, Christ sums up in the one expression, to 'hate' - to harm- the enemy. And he says: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hat you should love your own people and hate your nation's enemy, but I say to you that you should love all men without dis­crimination of the race to which they belong. And as soon as I understood the words in this way the other and chief difficulty was disposed of, as to how one should understand the words, 'love your enemies'. It is impossible to love one's personal enemies. But one can love a hostile people in the same way that one does one's own. And it became plain to me that Christ is speaking of the fact that everyone is taught to consider the people of his own race as his 'neighbors' and to consider other nations as 'enemies', but that he bids us not to do so. He says: The law of Moses makes a distinction be­tween Jews and Gentiles, the national enemy, but I say unto you, that you should not make that dis­tinction. And in fact both in Matthew and Luke, following this commandment, he says that before God all men are equal; the sun rises and the rain falls for them all. God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the peoples, but does good to all alike; so should men also do to all without distinction of nationality, and not as the Gentiles who divide themselves into different nations.

내가 이것을 이해하자마자, 그리스도가, 이전에는 언제나 정확하게 율법의 말들을 인용하다가, 왜 그리고 어떻게 여기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던 말들을 인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어려움이 즉각 제거되었다. 그런 어려움이 사라지기 위해서 나는 오직 국가의 적이라는 뜻으로의 ‘원수’, 그리고 동포라는 뜻으로의 ‘이웃’을 이해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 아래서 유태인들이 그들의 국가의 적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성경의 서로 다른 책들에 흩어져 있으면서, 다른 부족들을 억압하고 살인하며 몰살할 것을 명령하는 그 모든 구절들을, 그리스도는, 원수를 ‘미워하다’- 해를 입히다- 라는 단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너희 나라의 원수를 미워하라’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속한 인종을 구별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말씀들을 이렇게 이해하자 마자, 다른 큰 문제, 즉,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가 해결되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듯이 적대 민족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종족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다른 민족들을 ‘원수’로 여기도록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는 것이 내게 명백해졌다. 그는 말한다: 모세의 율법은 국가의 적으로서, 유태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차별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러한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계명에 뒤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태양이 떠오르며 비가 내린다. 하나님은 민족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평등하게 복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도, 자기들을 여러 다른 국가들로서 나누는 이방인들처럼 하지 말고, 국적의 구분 없이 모두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So that, once again, from different sides a plain, important, clear, and applicable meaning of Christ's words confirmed itself for me. Again, instead of misty expressions of vague philosophy, a clear, definite, important, and practicable rule discloses itself: not to make distinctions between one's own and other nations and not to do all the things that flow from making such distinctions; not to bear enmity to foreign nations; not to make war or to take part in warfare; not to arm oneself for war, but to behave to all men, of whatever race they may be, as we behave to our own people.

그래서, 다시 한번, 여러 면에서, 간단하며, 중요하고, 명료한, 그리고 적용이 가능한 그리스도의 말씀들의 의미가 나에게 확인되었다. 다시금, 모호한 철학 같은 애매한 표현들 대신에, 명료하고, 명확하며, 중요하고, 그리고 적용이 가능한 규칙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민족과 다른 민족간의 차이를 두지 말라, 그리고 그러한 차별들로서 빚어지는 모든 것들을 행하지 말라; 외국의 국가들에게 증오를 가지지 말라; 전쟁을 위해서 무장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인종이더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민족을 대하듯이, 모든 사람들을 대하라.

This was all so clear and simple that I was astonished I had not understood it immediately.

이것들은 모두, 너무나 명료하고 단순하여서 나는 내가 그것을 즉시 깨닫지 못하였음에 놀라와 했다.

The cause of my not having understood it was the same as the cause of my not having promptly understood the prohibition of law-courts and of oaths. It wa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that those courts- which are opened with a religious ceremony and blessed by those who consider themselves the guardians of Christ's teaching- that those same courts are incompatible with a confession of Christ, being directly opposed to him. Yet more difficult was it to guess that the very oath ad­ministered to all men by the guardians of the law of Christ is directly prohibited by that law; but to guess that what in our life are considered not merely necessary and natural but most excellent and brave - the love of one's fatherland, its defense, its exaltation, resistance to its enemies, and so forth-  are not merely offences against the law of Christ but a plain repudiation of it- to guess that this is so, was very difficult. Our life has so diverged from the teaching of Christ that that very divergence has become the chief hindrance to our understanding his teaching. We have so disregarded and for­gotten all he said about our way of life- his injunction not merely not to kill, but not even to hate any man; not to defend ourselves but to turn the other cheek and to love our enemies- that now, being accustomed to call people who devote their lives to killing, 'the Christ-loving army', being ac­customed to hear prayers addressed to Christ for victory over our enemies, to pride ourselves on slaying, and having made of the sword a holy symbol of murder (until a man without a sword, without a dagger, is a man to be held in contempt) - it now seems to us that Christ did not forbid war and that if he had forbidden it he would have said so more explicitly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재판 및 맹세의 금지를 즉시 깨닫지 못했던 이유와 똑 같았다. 그들 법정은- 그것들은 엄숙한 종교적인 의식으로 개정되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축복받고 있다- 그들 똑 같은 법정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함과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것을 깨닫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수호자들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하도록 하는 바로 그 맹세가 바로 그 율법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금지된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필요하며 당연할 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하며 용감하다고 여겨지는 것- 자신의 조국, 조국의 수호, 조국의 찬양, 조국의 원수들에 저항함, 등에 대한 사랑- 이 그리스도의 율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명백히 부정함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 이러한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이탈해 있어서 바로 그 이탈이 그의 가르침을 깨달음에 있어서의 주된 장애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했던 모든 것을 너무나 무시하고 잊어버려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 뿐만 아니라 어느 사람도 미워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다른 뺨을 돌려대며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잊어버리서- 오늘날에는, 오로지 살인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군대’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고, 우리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올리는 기도들을 들음에 익숙해져 있으며, 도살을 자랑스러워하고, 칼(칼이나 단도가 없는 사람은 경멸을 받는다)을 살인의 성스러운 상징으로 만드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오늘날에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전쟁을 금하지 않으며 만일 그가 그것을 금지했다면 그가 더욱 분명하게 말했을 것처럼 느껴진다.

We forget that Christ could not imagine people believing in his teaching of humility, love, and universal brotherhood, quietly and deliberately organizing the murder of their fellow men.

겸손, 사랑, 그리고 보편적인 형제애를 믿는 사람들이, 조용히 그리고 고의적으로 자신들의 형제들을 살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그리스도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Christ could not imagine that, and therefore did not forbid Christians to go to war, any more than a father when giving his son instructions to live honestly, to wrong no one, and to give to others, would bid him abstain from highway robbery. No one of the apostles or disciples of Christ during the first centuries of Christianity could imagine that it was necessary to forbid Christians to commit the murders that are called war. This, for instance, is what Origen says in his reply to Celsus (The Writings of Origen: Origen contra Celsum, Lib. viii. c. 73. Ante-Nicene Christian Library, vol. xviii.)

그리스도는 이러한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라고 훈계하는 아버지가 그에게 노상 강도 행위를 하지 말라고 당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전쟁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기독교 초기 1세기 동안 어떤 사도들이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기독교인들이 전쟁이라고 부르는 살인 행위들을 저지르는 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오리게네스가이 셀서스에게 보낸 대답으로 말한 것이다(오리게네스의 저서들: 셀서스를 반박하는 오리겐, 전집 8, 기원 73년경. 반니케아 기독교 장서, 18권).

He says: 'And in the next place Celsus urges us to help the King with all our might, and to labor with him in the maintenance of justice, to fight for him; and if he requires it to fight under him, or lead an army along with him. To this our answer is, that we do when occasion requires, give help to Kings, and that, so to say, a divine help, "putting on the whole armour of God". And this we do in obedience to the injunction of the Apostle, "I exhort, therefore, that first of all,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for Kings and all that are in authority", and the more any one excels in piety, the more effective help does he render to Kings, even more than is given by soldiers who go forth to fight and slay as many of the enemy as they can. And to those enemies of our faith who require us to bear arms for the commonwealth, and to slay men, we reply: "Do not those who are priests at certain shrines, and those who attend on certain gods, as you account them, keep their hands free from blood that they may with hands unstained and free from human blood offer the appointed sacri­fices to your gods?"'

그가 말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셀서스는 우리에게 전력을 다해서 황제를 도울 것을, 그리고 정의를 수호함에서 그와 함께 노력하고, 그들 위해서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한다면 그의 지휘 아래서 싸우거나 그와 함께 군대를 지휘할 것을 명령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도 기회가 된다면 황제에게 도움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신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이것을 행할 것이며,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황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탄원, 기도, 중재, 감사함을 행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신앙이 깊을수록, 황제들에게 더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며, 병사들이 싸움에 나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도살하여 제공하는 것보다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공공복리를 위해서 무기를 들라고 요구하는 우리의 신앙의 적들에게, 우리는 대답한다: “특정 신전들에 사제로서 봉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특정한 신들을 모시는 사람들도, 당신들이 생각하기로, 그들의 손들을 피로부터 깨끗이 하도록 하여서, 인간의 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손으로 당신들의 신 앞에 지정된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하지 않는가?”‘

And, finishing this chapter with an explanation that Christians are of more use by their peaceful life than are soldiers, Origen says: 'And none fight better for the King than we do. We do not indeed fight under him, although he require it.'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평화스러운 삶으로서 병사들보다 더 많은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설명으로서 이 장을 마치면서,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리들보다 황제를 위해서 잘 싸우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그의 아래서 싸우지 않는다, 비록 그가 그것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Such was the attitude of the Christians of the first centuries towards war, and so did their teachers speak when addressing those who ruled the world; and they spoke so when hundreds and thousands of martyrs were perishing for professing the Christian faith. .

기독교인들의 최초 수세기 동안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바로 이러하였으며, 그들의 교사들도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에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수백 수천명의 순교자들이 사라져갈 때에도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And now? Now no question is asked as to whether a Christian can take part in war. All young men, educated in the teaching of the Church which is called Christian, when the time comes each autumn present themselves at the Army Office and, with the assistance of Church pastors, violate the law of Christ. Only recently one peasant turned up who on Gospel grounds refused military service. The teachers of the Church expounded to him his error; but, as the peasant believed not them but Christ, he was put into prison and kept there till he renounced Christ. And all this is done 1800 years after a quite clear and definite commandment was an­nounced to Christians by our God: Do not con­sider the people of other nations to be enemies, but account all men as brothers and treat them as you treat people of your own nation: and therefore, not only do not kill those whom you call your enemies, but love them and do good to them.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기독교인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기독교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교육받은 모든 젊은이들이, 매년 가을이 오면 병무청에 나타나서 교회의 목자들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을 파괴하고 있다. 오직 최근에서야 복음서를 근거로 병역의무를 거부한 한 명의 농부가 나타났다. 교회의 교사들은 그에게 그의 잘못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농부는 그들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그는 감옥에 투옥되어 그가 그리스도를 부인할 때까지 갇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명료하고 명확한 계명이 우리의 하나님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선포된 뒤에도 행해졌다: 다른 국가의 사람을 원수들로 여기지 말라, 오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여길 것이며 그들을 너희가 너희 자신의 민족을 대우하듯이 여기라, 너희가 원수라고 부르는 자들을 죽여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

And having so understood these very simple, definite commands of Christ, not subjected to any interpretation, I asked myself: How would it be if the Christian world believed in these command­ments not in the sense that they must be sung or read for the propitiation of God, but that they must be obeyed for the welfare of man? How would it be if people believed in the duty of keeping these commandments as firmly as they believe, for in­stance, that one must say one's prayers every day, go to Church every Sunday, avoid flesh food on Fridays, and fast every Lent? How would it be if people believed these commandments even as much as they believe in the demands made by the Church? And I pictured to myself the whole of Christendom living and educating the young according to these commandments. I pictured to myself that it was inculcated on us all and on our children from child­hood upwards, by word and by example- not as now, that a man must maintain his dignity and pre­serve his rights against others (which can only be done by humiliating and offending others), but that it was taught that no man has any rights or can be superior or inferior to another, and that he only is inferior to all and most ignoble who desires to set himself above others; that there is no more humiliating condition for a man than that of being angry with another; and that my conviction that someone is insignificant or mad cannot justify my anger against him or my strife with him. Instead of all the arrangements of our life, from the shop-windows to the theatres, novels, and women's dresses, which excite sexual desire, I imagined to myself that it was suggested to us and to our children by word and deed, that to amuse oneself with voluptuous books, theatres, and balls, is the basest kind of amusement, and that every act which has for its aim to adorn or show off the body is the very basest and most shameful of acts. Instead of the organization of our life, in which it is considered necessary and good that a young man should be dissolute until he marries, and instead of a way of life that separates married couples being considered most natural; instead of the legalization of a class of women set apart for the service of depravity; in­stead of the admission of and the sanctification of divorce- instead of all this, I imagined to myself that it was instilled into us by word and deed that the condition of a man who has reached the age for sexual relations and has not renounced them but yet remains single and unmarried, is an abnormity and a shame, and that a man's desertion other with whom he has come together and the exchanging of her for another, is not only an unnatural action, like incest, but is a cruel, inhuman action. Instead of our whole life being founded on violence, instead of each of us being punished or punishing from childhood to advanced old age, I imagined to my­self that it was instilled into us all by word and deed that revenge is a most degrading animal feeling, and that violence is not merely a shameful thing but one which deprives a man of true happiness, and that the only happiness of life is such as need not be defended by violence and that the highest respect is deserved, not by him who takes or retains what is his from others, but by him who gives up the most and serves others most. Instead of it being con­sidered admirable and right that each man should be sworn in and should surrender all that he holds most valuable- that is to say, his whole life- to the will of he knows not whom, I imagined that it was instilled into all that man's reasonable will is that highest sanctuary which he may yield to no one else, and that to bind oneself by oath to anyone, and about anything, is a repudiation of one's rational being and a defilement of that highest sanctuary. I pictured to myself that instead of these national enmities which are instilled into us under the guise of love of one's country, and instead of those ap­plauded slaughters called war, which from childhood are represented to us as the most heroic deeds- I imagined that we were imbued with horror at and contempt for all those activities, political, diplo­matic, and military, which promote the separation of peoples; and that it was suggested to us that the recognition of any kingdoms, exclusive laws, fron­tiers, or territories is an indication of most savage ignorance; and that to go to war- that is to say, to kill people, people personally unknown to us, with­out any grounds- is the most horrible villainy, to which only a lost and perverted man, degraded to the level of a beast, can descend. I pictured to myself that all men believed this, and I asked: What would be the result?

나는 그렇게 하여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한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어떤 해석에도 지배당하지 않도록, 깨닫고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만일 기독교 세계가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노래하고 읊어지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지켜져야 된 의미로 이 계명들을 믿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일 사람들이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교회에 가며, 금요일에는 육식을 피하고, 사순절마다 금식하듯이 확고하게 믿고서 이들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서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에 의해서 정해진 규칙들을 믿듯이 이 계명들을 믿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 계명들을 따라서 살면서 어린 세대들을 가르치는 전체 기독교 사회를 상상해보았다. 나는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어릴 적부터 어린들에게 말과 행동으로서 가르쳐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처럼,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위엄을 지니고서 다른 사람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마음을 상하게 하고 화내게 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권리를 가지거나 우월하거나 열등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보다도 자신을 높이려 하는 자는 모든 사람들 보다도 열등하고 가장 비천하며;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보다도 더 창피한 상태가 없으며; 누군가가 하찮다거나 미쳤다는 나의 생각이 그에 대한 분노나 그와의 싸움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가르쳐지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의 삶의 모든 계획들, 상점의 진열장에서 극장들, 소설들, 그리고 성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여자의 의복들 대신에, 향락적인 책들, 극장들, 그리고 무도회들로서 자신을 즐기는 것은 가장 저속한 취미이며, 육체를 장식하거나 과시하려는 목적을 위한 모든 행위들은 가장 저속하고 수치스러운 행위들이라는 것을, 말과 행위들로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넌지시 비추어 주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젊은 사람은 결혼할 때까지 방탕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며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삶의 조직 대신에,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이 분리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삶의 방식 대신에; 한 계층의 여자들이 타락을 위한 봉사에 마련되는 것을 합법화하는 대신에; 이혼의 허가와 축복 대신에- 이 모든 것들 대신에, 성적인 관계들이 가능한 나이에 이르렀고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아직 독신이며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비정상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며, 자신이 함께 해왔던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로 바꾸는 것은 근친상간처럼 부자연스러운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행위임을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사회를 나는 상상해 보았다. 우리의 전체 삶이 폭력 위에 기초하는 대신에, 우리 각자가 어린시절부터 상당히 늙은 나이에 이르기까지 억압받거나 억압하는 대신에, 원한은 가장 비열한 동물적인 감정이며, 폭력은 수치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 진정한 행복을 박탈한다는 것을, 그리고 삶의 유일한 행복은 폭력으로 보호될 필요가 없는 그런 것임을, 그리고 최고의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소유함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장 귀하게 섬기는 데서 얻어 진다는 것을 말과 행위로서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지는 것을 나 스스로 상상해 보았다. 제각기 사람이 맹세를 하여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의지에 자신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전체 삶- 을 내맡기는 것을 찬미하며 타당하다고 여기는 대신에, 사람의 이성적인 의지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신성한 것이며, 자신을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서 맹세로서 묶어 두는 것은 자신의 이성적인 존재를 포기한 것이며, 그러한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것임이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그려보았다.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 아래에 우리에게 가르쳐진 이런 민족적 원한관계 대신에, 그리고 전쟁이라고 불리는 찬양받는 도살들 대신에,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들에게 가장 영웅적인 행위들이라고 대변되어 왔지 않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외교적 그리고 군사적인 그 모든 행위들에 우리가 전율과 비난을 느끼도록 배울 것을; 그리고 어떤 국가나, 배타적인 법률들, 국경들이나 또는 영토들을 인정함은 가장 야만적인 무지의 표시라는 것을;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 은, 짐승의 수준까지 나빠져서, 오직 타락하고 죄악에 빠진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극악무도한 처사라는 것을 배우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믿는 것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을까?

Formerly I had asked myself what would result from putting Christ's teaching, as I then understood it, into practice, and had involuntarily replied: Nothing. We shall all pray, receive the blessings of the sacraments, believe in the redemption and in salvation for ourselves and for the whole world through Christ, and nevertheless that salvation will come about not from what we do, but because the end of the world will arrive. Christ will come in his own time,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establish the kingdom of God, independently of our life. Now Christ's teaching as it had revealed itself to me had another meaning,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on earth depended on us also. The fulfillment of Christ's teaching ex­pressed in the five commandments, would establish the kingdom of God. The kingdom of God on earth is the peace of all men one with another. Peace among men is the highest blessing attainable by man on earth. So did the kingdom of God present itself to all the Hebrew prophets. And so has it presented itself, and does present itself, to the heart of every man. All the prophecies promise peace to mankind.

이전에 나는, 내가 그 당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였던 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을 때 저절로 대답하였다: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고, 성례식의 축복들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자신들과 전체 세계의 구속과 구원을 믿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원은 우리가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지정한 시간에 영광으로 오실 것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여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것이며, 우리의 현재의 삶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은 또한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다섯 가지 계명들로서 표현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완성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은 모든 사람들 서로에게 평화이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지상의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축복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렇게 모든 히브리의 선지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나타났었으며, 나타내어지고 있다. 모든 예언들은 인류에게 평화를 약속한다.

The whole of Christ's teaching consists in giving the kingdom of God, that is peace, to man. In the Sermon on the Mount, in the talk with Nicodemus, in his charge to his disciples, and in all his sermons, Christ speaks only of the things that divide men and hinder them from being at peace and entering the kingdom of God. All the parables are but a description of what the kingdom of God is and an explana­tion that only by loving one's brother-men and being at peace with them can one enter it. John the Baptist, Christ's forerunner, said that the kingdom of God was drawing near and that Jesus Christ would give it to the world.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전체는 하나님의 왕국을, 즉 평화를, 사람에게 주는 것에 있다. 산상수훈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린 명령에서,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갈라 놓으며 그들이 평화로워지는 것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모든 비유들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인지의 묘사이며 오직 자기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스도를 먼저 알렸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워 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것을 세상에 줄 것이라고 말했다.

Christ says that he brought peace on earth (John xiv. 27):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fearful.'

그리스도는 자신이 지상에 평화를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And those five commandments of his really give man this peace. All five commandments have but that one aim- peace among men. Men need only trust Christ's teaching and obey it and there will be peace on earth; and not such a peace as men de­vise, temporary, accidental, and partial, but a general peace, inviolable and eternal.

그리스도의 그 다섯 가지 계명들은 진실로 사람에게 이런 평화를 준다. 모든 다섯 가지 계명들은 오직 이런 한 가지 목적을 가진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러면 평화는 지상에 올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안한 것처럼 일시적이며, 우연하고, 부분적인, 평화가 아니라, 침범할 수 없고 영원한 보편적인 평화이다.

The first commandment says: Be at peace with all men; do not allow yourself to consider any man insignificant or senseless (Matt. v. 22). If peace be infringed, employ all your strength to restore it. The service of God is the abolition of enmity (Matt. v. 23, 24). Be reconciled after the least difference, in order not to lose the true life. In this command­ment everything is said; but Christ foresees the snares of the world which disturb peace among men, and he gives the second commandment, against the snare of sexual relations, which disturb peace. Do not regard the beauty of the flesh as an amusement; avoid this snare in advance (verses 28-30); let a man take one wife and a woman one husband and on no account abandon one another (32). Another snare is the oath, which leads men into sin. Know in advance that this is evil, and take no vows (34-7). The third snare is revenge, calling itself human justice. Do not avenge yourself, and do not excuse yourself on the ground that you are wronged; bear with wrongs and do not return evil for evil (38-42). The fourth snare is the difference of nationalities-  the enmity of tribes and states. Know that all men are brothers, sons of one God, and do not infringe peace with anyone for the sake of national aims (43-8). If people fail to fulfill any one of those commandments, peace will be disturbed; but if they fulfill them all, the kingdom of peace will have come on earth. These five commandments exclude all evil from the life of man.

제 1 계명은 말한다: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라; 너희는 다른 사람을 하찮은 자 또는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마태복음 5장22절). 만일 평화가 깨지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너희의 전력을 다하라. 하나님께 봉사함은 원한을 파괴한다(마태복음 오장 23절). 가장 사소한 불화가 있더라도 화해하라, 그러면 참된 삶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계명 안에 모든 것이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흐트리는 세상의 유혹들을 예견하고 제 2의 계명, 즉 평화를 깨트리는 성 관계의 유혹들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즐거움으로 여기지 말라; 이런 유혹을 사전에 피하라(28-30절); 남자는 한 아내를 여자는 한 남편을 가질 것이며 어떤 이유든지 서로를 버리지 말라(32절). 다른 유혹은 맹세이다, 맹세는 사람들을 죄악으로 이끈다. 맹세는 악이며, 어떤 맹세도 하지 말 것을 사전에 알라(34-7절). 세 번째 유혹은 인간의 정의라고 부르는 복수이다. 복수하지 말라, 너희가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하지 말라; 모욕을 참으라 그리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38-42). 네 번째 유혹은 민족차별- 종족간 및 국가간의 적의이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알라, 그리고 국가의 목적을 구실로 어느 누구와도 평화를 깨트리지 말라(43-8). 만일 사람들이 이 계명들 중의 하나라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깨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든 것을 이행한다면, 평화의 왕국이 지상에 올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계명들은 사람의 삶에서 모든 악을 제거할 것이다.

With the fulfillment of these commandments the life of men will be such as every human heart seeks and desires. All men will be brothers, and everyone will be at peace with others, enjoying all the bless­ings of the world during the term of life appointed him by God. Men will beat their swords into plough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 hooks. Then the kingdom of God will have come: that kingdom of peace promised by all the prophets, which drew nigh in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and which Christ foretold and proclaimed in the words of Isaiah: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anointed me to preach good tidings to the poor; he hath sent me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to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at liberty them that are bruised;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Luke iv. 18, 19; Isaiah lxi. 1, 2).

이 계명들을 성취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찾고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될 것이며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울 것이며, 하나님이 지정해준 삶의 기간 동안 모든 행복을 누릴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으로 바꿀 것이며, 그들의 창은 낫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왕국이 올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선지자들이 약속하였으며, 세례 요한의 시대에 가까워졌으며, 그리스도가 이사야의 말로서 예언하고 선언했던 평화의 왕국이 올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우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19 이사야 61장 1,2절).

The commandments of peace given by Christ are simple and clear; they foresee all causes of strife and by averting it they throw open the king­dom of God on earth. Therefore Christ is actually the Messiah. He has fulfilled that which was promised. It is we who do not carry out what all men have always desired, though it is that for which we have prayed and still pray.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의 계명들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것들은 분쟁의 모든 원인들을 예상하고 그것을 막아 줌으로써,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활짝 열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진실로 구세주이다. 그는 약속한 것을 이행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원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왔으며 아직도 기도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실행하지 않는다.

   
       
   

1. 화를 내지 말라 ] 2. 성욕을 억제하라 ] 3. 맹세하지 말라 ] 4. 악에 저항하지 말라 ] 5. 국가를 구분하지 말라 ]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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