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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I have done the best I could with this work which has occupied me for fifteen years on a subject close to me — art. In saying that it has occupied me for fifteen years, I do not mean to say that I have spent fifteen years writing it, but only that when I began writing about art fifteen years ago, I thought the task I had undertaken would be finished without interruption; but it turned out that my thoughts on this subject were then still unclear, that I could not expound them in a way that would satisfy me. Since then, I have thought this subject over incessantly, and have started writing six or seven times, but each time, after writing quite a lot, I felt unable to bring the thing to a conclusion and abandoned work on it. Now I have finished this work, and however poorly I have done it, I hope that my basic thought about the false path that the art of our society has taken and is following, and the cause of this, and what makes up the true purpose of art, is correct, and that therefore my work, though far from complete, and requiring a great many explanations and additions, will not be in vain, and that art will sooner or later abandon the false path it has taken. But in order for that to happen and for art to take a new direction, it is necessary that another human spiritual activity — science, upon which art has always been closely dependent — also abandon the false path on which it finds itself. 나는 십오 년 동안 나에게 밀접한 주제 — 예술 — 로 나를 붙들어 놓았던 이 작업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십오 년 동안 나를 붙들어 놓았다고 말함에 있어서, 내가 그것을 집필하느라 십오 년을 소비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오 년 전 예술에 관해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짊어 진 과제가 쉼 없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당시의 내 생각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들을 나를 만족시킬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밝혀 졌다.  그 때 이후, 나는 이 주체를 끊임 없이 곰곰이 생각했으며, 여섯 번 혹은 일곱 번이나 집필을 시작했지만, 그 때마다, 상당한 양을 쓰고 나서, 나는 그것이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에 대한 작업을 포기했다. 이제 이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아무리 빈약하게 이루어 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예술이 취했으며 따라 가고 있는 위선적인 행로, 그리고 이것의 원인, 그리고 예술의 참된 목적에 대한 나의 기본적 생각이 타당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므로 나의 작업이, 비록 결코 완전하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설명들 및 증보들이 필요하지만, 헛되지 않을 것, 그리고 예술은 조만간 그것이 취한 위선적 행로를 포기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고 예술이 새로운 방향을 잡기 위해서, 또 다른 인간의 영적 활동 — 학문, 예술은 언제나 이것에 밀접하게 의지해 왔다 — 이 또한 스스로 찾아 가고 있는 위선적 행로를 포기해야 한다.
Science and art are as closely tied to each other as lungs and heart, so that if one organ is perverted, the other cannot function properly. 과학과 예술은 허파와 심장처럼 서로에게 긴밀히 매여 있다, 그래서 만일 하나의 기관이 왜곡되면, 다른 쪽이 적절히 작동할 수 없다.
True science studies and introduces into human consciousness the truths and the knowledge which are regarded as most important by the people of a certain period and society. Art transfers these truths from the realm of knowledge to the realm of feeling. Therefore, if the path that science follows is false, so, too, will the path of art be false. Science and art are like those barges with kedge-anchors, ‘machines’ as they were called, that used to work our rivers. Like the boats that carry the anchor ahead and drop it, science prepares for the movement, the direction of which is given by religion, while art is like the winch worked from the barge, which, by pulling the barge to the anchor, accomplishes the movement itself. And therefore the false activity of science inevitably entails an equally false activity of art. 참된 과학은 사람의 의식 안에 특정한 시기 및 사회의 민중들에 의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진리들 및 지식을 연구하여 소개한다. 예술은 이 진리들을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느낌의 영역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만일 과학이 따르고 있는 행로가 거짓이라면, 예술의 행로 역시 거짓일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우리의 강들에서 흔히 작업하는 '기계들'이라 불리는 작은 닻을 지닌 바지들과 같다. 저 앞에 닻을 가지고 가서 떨어뜨리는 배들처럼, 과학은 움직임을 준비하고, 그것의 방향은 종교에 의해 주어지는 반면, 예술은 바지로부터 동작되는 윈치와 같고, 그것은 바지선을 닻으로 끌고 감으로서, 움직임 자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과학의 위선적 활동은 똑같은 위선적 예술 활동을 수반한다.
As art in general is the conveying of various kinds of feelings — and yet we call art in the narrow sense of the word only that which conveys feelings we recognize as important — so, too, science in general is the conveying of all possible knowledge — and yet we call science in the narrow sense of the word only that which conveys knowledge we recognize as important. 예술이 일반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느낌의 전달인 것처럼 — 그렇지만 우리는 좁은 의미의 말로 오직 우리가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느낌들을 전달하는 것만을 예술이라 부른다 — 과학 역시 일반적으로 모든 가능한 지식의 전달이다 — 그렇지만 우리는 좁은 의미의 말로 오직 우리가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을 과학이라 부른다.
The degree of importance both of the feelings conveyed by art and of the knowledge conveyed by science is determined for people by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the given time and society — that is, the general understanding among people of that time and society of the purpose of their life.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 및 과학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 중요성의 정도는 주어진 시대 및 사회의 종교적 의식 — 즉, 사람들의 삶의 목적에 대한 그 시대 및 사회의 사람들 사이의 일반적 이해 —에 의해 사람들을 위해 확정된다.
That which contributes most of all to the fulfilment of this purpose is studied most of all and is considered the chief science; that which contributes less is considered less important; that which does not contribute at all to the fulfilment of the purpose of human life is not studied at all, or, if it is studied, this study is not considered science. So it has always been, and so it should be now, because such is the property of human knowledge and human life. But the science of the upper classes of our time, which not only recognizes no religion, but considers all religion to be superstition, could not and cannot do this. 이런 목적의 달성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것이 가장 많이 연구되고 핵심적인 과학으로 여겨진다; 적게 기여하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사람의 삶의 목적의 달성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것은 전혀 연구되지 않으며, 혹은, 연구되더라도, 이 연구는 과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으며, 그것은 지금도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사람의 지식 및 사람의 삶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상류 계급들의 과학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미신이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행할 수 없었으며, 행할 수 없다.
And therefore the men of science of our time maintain that they study everything equally, but since there is too much of everything (everything being an infinite number of objects), and it is impossible to study everything equally, this is maintained only in theory; in reality, what is studied is not everything and is studied far from equally, but is only that which, on the one hand, is more needed, and, on the other, is more pleasing for those who occupy themselves with science. And for men of science who belong to the upper classes, what is needed most of all is to maintain the order in which those classes enjoy their privileges; and what is most pleasing is what satisfies idle curiosity, does not call for great mental effort, and can have practical applications.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연구한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것이란 너무 많아서 (모든 것은 무한한 개체의 수이기에), 그리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오직 이론으로만 주장된다; 현실은, 연구되는 것은 모든 것이 아니며 전혀 공평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편으로, 더 필요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과학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에게 더 즐거운 것이 연구된다. 상류 계급들에 속하는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그런 계급들이 그들의 특권을 향유하기 위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즐거운 것은 한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엄청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실용적 용도들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And therefore one area of science, including theology, philosophy as applied to the existing order, history and political economy of the same sort, is occupied predominantly with proving that the existing order of life is the very one which ought to exist, which came into being and continues to exist by unchanging laws, not subject to human will, and therefore any attempt to violate it is unlawful and useless. The other area — experimental science, including mathematics, astronomy, chemistry, physics, botany, and all natural science — is occupied only with what has no direct relation to human life, with what is curious and may have profitable applications to the life of upper-class people. And to justify the choice of subjects of study, made in accordance with their own position by the men of science of our time, they have invented a theory of science for science’s sake, exactly like the theory of art for art’s sake. 그리고 그러므로 과학의 한 분야는, 기존 질서에 적용되는 신학, 철학, 동일한 종류의 역사, 정치 경제를 포함하는 것으로, 삶의 기존 질서가 존재해야만 하는 바로 그것이고, 그것은 불변의 법칙들에 의해 생겨났고 존재해 나가며, 사람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범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법적이며 무용한 것임을 증명하려 압도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다른 분야 — 실험 과학, 즉, 수학, 천문학, 화학, 식물학, 및 모든 자연 과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 는 오직 사람의 삶에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에, 신기하며 상류 계급 사람들의 삶에 이득이 생기는 용도를 가질 있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연구 주제들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에 의한 그들 자신의 위치와 일치하게, 그들은, 정확히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위한 과학 이론을 창안했다. 
As according to the theory of art for art’s sake it appears that to be occupied with all those objects which please us is art, so, according to the theory of science for science’s sake, the study of objects that interest us is science.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든 대상들에  몰두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이는 것처럼, 과학을 위한 과학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대상들의 연구가 과학인 것처럼 보인다.
So that one part of science, instead of studying how people should live in order to fulfil their destiny, demonstrates the lawfulness and immutability of the bad and false existing order of life; and the other — experimental science — occupies itself with questions of simple curiosity or with technical improvements. 그래서 과학의 한 부분은, 사람들이 그들의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연구함 대신에, 악하며 위선적인 기존 삶의 질서의 합법성 및 불변성을 증명하며; 다른 부분 — 실험 과학 — 은 단순한 호기심에 혹은 기술적 개선들에 관한 문제들에 몰두한다.
The first area of science is harmful not only in that it muddles people’s concepts and provides false solutions, but also in that it exists and takes up the place that ought to be taken by true science. It is harmful in that every man, in order to set about studying the most important questions of life, needs first, before resolving them, to refute those structures of falsehood that have been heaped up over the ages and that are maintained by all the powers of the mind’s inventiveness with regard to each of the most essential questions of life. 과학의 첫째 분야는 사람들의 개념들을 흐리게 하고 거짓 해법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참된 과학에 의해 차지되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그것이 해로운 것은, 삶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의문들의 연구에 착수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먼저, 그것들을 해결하기 전에, 옛날부터 쌓여져 온 그리고 삶의 핵심적 의문들 각각에 대해 모든 정신적 독창성의 힘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위선적 구조들을 논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이다.
And the second area — the very one that modern science is so especially proud of, and which is regarded by many as the only genuine science — is harmful in that it diverts people’s attention from really important subjects to insignificant ones, and, besides that, is directly harmful in that, granting the false order of things which is justified and maintained by the first area of science, the greater part of the technical achievements of this area of experimental science turn not to the benefit of mankind but to its harm. 그리고 두 번째 분야 — 현대 과학이 그토록 특별히 자랑스러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참 과학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으로 — 는 사람들의 관심을 진정으로 중요한 주제들로부터 사소한 것들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해롭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첫째 분야의 과학에 의해 정당화되고 유지되는 사물의 거짓 질서를 인정하면서, 이 분야의 실험 과학의 기술적 성취들의 더 많은 부분이 인류의 이익으로가 아니라 해악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Only to people who have devoted their lives to these studies does it seem that all the discoveries made in the realm of natural science are very important and useful. But it seems so to these people only because they do not look around themselves and do not see what is really important. They need only tear themselves away from the psychological microscope under which they examine the objects they study and look around themselves in order to see how worthless is all the knowledge that is a source of such pride to them — I am not speaking of imaginary geometry, [115] the spectral analysis of the Milky Way, the form of atoms, the size of the skulls of Stone Age people, and other such trifles, but of the knowledge of micro­organisms, X-rays, and so on — compared with the knowledge we have neglected and left to be perverted by professors of theology, jurisprudence, political economy, financial science, and so on. We need only look around ourselves to see that the proper activity of genuine science is not the study of something we have accidentally become interested in, but of how human life should be arranged — the questions of religion, morality, social life, without resolving which all our knowledge of nature is harmful and worthless. 오직 이러한 연구들에 그들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이루어 진 모든 발견들이 매우 중요하며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오직 그들이 자신들의 주위를 돌아 보지 않으며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토록 자랑거리인 모든 지식들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깨달으려면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대상들을 검사하는 심리적 현미경에서 자신들을 오직 떼어 놓을 필요가 있다 — 내가 말하는 것은, 상상의 기하학, 은하계의 스펙트럼 분석, 원자들의 형태, 석기시대 사람들의 골격의 크기, 등 사소한 것들이 아니라, — 우리가 무시했던 그리고 신학, 법학, 정치 경제, 금융 과학, 등의 교수들에 의해 왜곡되도록 남겨졌던 지식과 비교하여 — 미생물들, 엑스레이들, 등의 지식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주위를 둘러 봄으로써 참된 과학에 과한 적절한 활동이 우리가 우연히 흥미를 지니게 된 어떤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의 삶이 배치되어야 하는가 — 종교, 윤리, 사회적 삶의 문제들로서, 이들에 대한 해결 없이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해롭고 가치 없는 것이다 — 에 대한 연구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We rejoice and feel proud that our science makes it possible for us to exploit the energy of a waterfall and make this power work in factories, or that we have pierced tunnels through mountains, and so on. But the trouble is that we make this power of the waterfall work not for the benefit of people, but for the enriching of capitalists, who produce objects of luxury or tools for destroying human beings. The same dynamite with which we blow up mountains to make tunnels through them, we also use in war, which we not only do not want to renounce, but which we regard as necessary and for which we are constantly preparing. 우리는 우리의 과학이 낙수의 힘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며 이 힘이 공장들에서 작동하도록 만든다는 것, 혹은 우리가 산들에 터널을 뚫었다는 것을 즐거워 하고 자랑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낙수의 힘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부유하게 하도록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며, 그들은 인간의 삶들을 파괴하는 사치품들 혹은 도구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에 터널을 만들기 위해 산들을 날려 버리는 동일한 다이너마이트를, 우리는 또한 전쟁에 사용하며, 우리는 이것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필요하다고 여기며, 그것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있다.


If we now know how to make preventive inoculations against diphtheria, to find a needle in a body by means of X-rays, to straighten a hunchback, to cure syphilis, to perform extraordinary surgeries, and so on, we would not be so proud of these achievements, however indisputable, if we fully understood the true purpose of genuine science. If only one-tenth of the forces now spent on objects of mere curiosity and practical application were spent on true science, on arranging the lives of people, then the greater part of those who are now ill would not have those illnesses, of which only a tiny portion are now cured in clinics and hospitals; there would be no undernourished, hunchbacked children growing up in factories, there would be no fifty per cent infant mortality, as now, whole generations would not become degenerate, there would be no prostitution, no syphilis, no killing of hundreds of thousands in war, no horrors of insanity and suffering which present-day science regards as a necessary condition of human life. 우리가 현재 디프테리아에 대한 예방 접종들을 만드는 법, 엑스레이를 이용해 몸 속에서 바늘을 찾는 법, 곱사등을 펴는 법, 매독을 치료하는 법, 특이한 수술들을 행하는 법 등을 안다면, 이들 업적들에 대해, 아무리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참된 과학의 진정한 목적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 및 실용적 적용의 대상들에 지금 소비되는 단지 십 분의 일 정도의 정도라도, 참 과학에, 사람들의 삶들을 조정하는데 사용된다면, 지금 병든 사람들의 더 많은 일부가 그런 질병들을 갖지 않을 것이나, 단지 그들 중 아주 적은 일부만이 진료소 및 병원들에서 치료되고 있다; 영양 실조에 걸리고 등이 굽은 채 공장들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없을 것이며, 지금과 같이 오십 퍼센트의 영아 사망률도 없을 것이며, 전체 세대들이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며, 매춘도, 매독도,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살해도, 아무런 정신병의 공포 및 오늘날의 과학이 인간의 삶의 필연적 상태라 여기는 고통도 없을 것이다.
We have so perverted the concept of science that people of our time find odd the mention of such sciences as would make it so that there is no infant mortality, no prostitution, no syphilis, no degeneracy of whole generations, no mass killing of people. It seems to us that science is only science when a man in a laboratory pours a liquid from one vial into another, breaks down the spectrum, cuts up frogs and guinea-pigs, or produces, in a special scientific jargon, some obscure theological, philosophical, historical, juridical, or politico-economical lacework of conventional phrases, half-intelligible to himself, which purports to show that things are as they ought to be. 우리는 과학의 개념을 너무나 왜곡시켜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영아 사망이 없고, 매춘도 없으며, 매독도 없고, 전체 세대들의 쇠퇴들도 없으며, 인명에 대한 대량 살상도 없도록 만드는 그와 같은 과학들을 언급함을 이상하게 여긴다. 우리에게는 마치 과학이 어떤 사람이 실험실에서 한 개의 약 병에서 다른 병으로 액체를 붇고, 스펙트럼을 분리하며, 개구리와 기니 피그를 자르거나, 혹은, 특별한 직업적 용어 안에서, 자신도 반만 알아 볼 수 있으면서, 사물이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모호한 신학적, 역사적, 법률적, 혹은 정치 경제적인 진부한 용어들의 끈을 생산할 때에 비로소 참된 과학인 것처럼 보인다.
But science, genuine science — a science that would indeed merit the respect now demanded by representatives of one part, and the least important part, of science — does not consist in that; genuine science consists in discovering what ought or ought not to be believed; in discovering how the overall life of mankind ought or ought not to be arranged: how to arrange sexual relations, how to bring up children, how to use the land, how to cultivate it without oppressing others, how to relate to foreigners, how to relate to animals, and many other things important for human life. 그러나 과학, 진정한 과학은 — 사실 과학의 한 분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분야의, 대변자들에 의해 지금 요구되는 존중을 장점으로 하는 과학 — 은 그러한 점에 있지 않다; 참된 과학은 무엇이 믿어져야 하며 않아야 하는지를 발견함에; 인류의 전반적 삶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며 않아야 하는지를 발견함에: 성관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토지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경작해야 하는지, 외국들과 어떻게 관련 지어야 하는지, 사람의 삶에 중요한 동물들 및 기타 사물들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하는지에 있는 것이다.
Such has true science always been, and such it ought to be. And such science is emerging in our time; but, on the one hand, this true science is rejected and refuted by all those scientists who defend the existing order of life; and, on the other hand, it is considered empty and useless, an unscientific science, by those who are engaged in experimental science. 참된 과학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으며, 그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은 우리 시대에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참된 과학은 기존 삶의 질서를 옹호하는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반박되며, 다른 한편으로, 실험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공허하고 무용한, 일종의 비과학적인 과학으로 여겨진다.
Books and tracts appear, for instance, proving the obsolescence and absurdity of religious fanaticism and the necessity of establishing a reasonable religious world view that corresponds to our time, and yet many theologians occupy themselves with refuting these works, sharpening their wits again and again to maintain and justify long-outlived superstitions. Or there appears a tract showing that one of the main reasons for the poverty of the people is the landlessness of the proletariat that exists in the West. It would seem that science, genuine science, should welcome this tract and develop further conclusions from it. But the science of our time does nothing of the sort; on the contrary, political economy proves the opposite — namely, that landed property, as well as any other, ought to be concentrated more and more in the hands of a small number of owners, as is asserted, for instance, by contemporary Marxists. In the same way, it would seem that the business of genuine science is to prove the unreasonableness and unprofitableness of war, of capital punishment, or the inhumanity and perniciousness of prostitution, or the senselessness, harmfulness and immorality of using drugs or animal foods, or the unreasonableness, wickedness and backwardness of patriotic fanaticism. And there exist such works, but they are all regarded as unscientific. While those works are considered scientific which either prove that all these phenomena must exist or which are engaged with questions of idle curiosity that have no relation to human life. 예를 들면, 종교적 광신주의의 쇠퇴와 모순 및 우리 시대와 일치하는 합리적인 종교적 세계관을 확립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서적들 및 소책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이들 작품들을 논박함에 몰두하고, 케케묵은 미신들을 유지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재능을 자꾸 되풀이 하여 날카롭게 다듬는다. 혹은 민중들의 가난에 대한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가 서구에 존재하는 프롤로타리아의 무토지임을 보여지는 논문이 등장한다. 과학, 참된 과학이라면 이 논문을 환영하고 그것으로부터 나아가 결론들을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과학은 그러한 것은 행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치 경제는 반대를 증명한다 — 즉, 토지 재산,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더욱 더 소수의 소유자들 손에 집중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예들 들면,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참된 과학의 사명은 전쟁의, 혹은 사형의 불합리성 및 무 이익성을, 혹은 매춘의 비인간성 및 해악성을, 혹은 마약 혹은 동물 음식들의 사용이 몰 지각성, 해악성 및 비윤리성을, 혹은 애국적 광신주의의 불합리성 및 후진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비과학적이라 여겨진다. 반면에 이 모든 현상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혹은 사람의 삶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가한 호기심에 대한 의문들에 관여하는 그런 작품들이 과학적이라 여겨진다.
The deviation of the science of our time from its true purpose can be seen with striking clarity in the ideals that some men of science set up for themselves and which are not rejected but are acknowledged by the majority of scientists. 우리 시대의 과학이 그 진정한 목적으로부터 일탈함은 일부 과학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설정한 그리고 대다수 과학자들에 의해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되는 이상들에서 놀라우리 만치 명료하게 깨달아 질 수 있다.
These ideals are voiced not only in stupid, fashionable books describing the world 1,000 or 3,000 years from now, but also by sociologists who regard themselves as serious scientists. These ideals are that food, instead of being obtained from the earth by agriculture and the raising of livestock, will be prepared in laboratories by chemical means, and that human labour will be replaced almost entirely by the utilization of natural forces 이런 이상들은 지금부터 1,000 혹은 3,000을 묘사하는 멍청하고, 최신식인 책들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진지한 과학자들로 여기는 사회학자들에 의해서도 표명되고 있다. 이런 이상들인 즉, 음식은, 농업에 의해 땅으로부터 얻어지거나 가축의 사육에 의하는 대신에, 화학적인 수단들로 실험실들에서 마련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노동은 거의 전적으로 자연적인 힘들의 활용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Man will not, as he does now, eat an egg laid by a hen he has raised, or bread grown in his own field, or an apple from a tree he has been tending for years, which blossomed and ripened before his eyes, but will eat tasty, nourishing food prepared in laboratories by the combined labours of many people, in which he will take no part. 사람은, 지금은 그러고 있지만, 그가 키운 암탉이 낳은 달걀, 혹은 그 자신의 들판에서 재배되는 빵, 혹은 그가 수년 동안 돌보고 있었으며 그의 눈 앞에서 꽃이 피고 익은 나무로부터 사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혼합된 노동들에 의해 실험실에서 준비된 맛있고 영양 많은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그는 노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There will be almost no need for man to labour, and thus all people will be able to give themselves to that same idleness to which the ruling upper classes now give themselves. 사람이 노동한다는 것은 거의 필요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지금 지배하는 상류 계급들이 스스로 누리는 것과 동일한 나태함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Nothing shows more obviously than these ideals how far the science of our time has deviated from the true path. 그 어느 것도 얼마나 멀리 우리 시대의 과학이 참된 길로부터 이탈하였는지 이들 이상들보다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People in our time, the vast majority of people, lack wholesome and sufficient nourishment (the same holds for housing, clothing, and all primary necessities). Moreover, this same vast majority of people are forced to work constantly, beyond their strength and to the detriment of their well-being. Both misfortunes can very easily be removed by abolishing mutual struggle, luxury, the improper distribution of wealth, and generally by abolishing the false, harmful order of things and arranging human life in a reasonable way. Yet according to science,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is immutable, like the movement of the heavenly bodies, and therefore the task of science lies not in elucidating the falseness of this order and establishing a new, reasonable system of life, but in feeding all the people while maintaining the existing order, and giving them all the opportunity to be as idle as the ruling classes are now, living their depraved life.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방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건강에 유익하고 충분한 영양이 부족하다(주택, 의복, 및 모든 기본 생필품들에도 공히 적용된다). 게다가, 이렇게 똑같이 방대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힘을 초과해서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해치면서까지 끊임 없이 일하도록 강요 받는다. 두 가지 불행들은 상호 투쟁, 사치, 부의 부적절한 분배, 그리고 위선적이며, 해로운 사물의 질서를 폐지하고 인간의 삶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조정함으로써 매우 쉽게 제거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에 따르면, 기존 사물의 질서는, 마치 천체들의 움직임처럼, 불변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임무는 이런 질서의 허위를 해명함 및 새롭고 합리적인 삶의 시스템을 확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기존 질서를 유지하면서 먹이고, 그들에게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지배 계급들처럼 한가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줌에 있다는 것이다.
With all that, it is forgotten that nourishment on bread, vegetables, fruits grown from the earth by one’s own labour is the most pleasant, healthful, light and natural nourishment, and that the work of exercising one’s muscles is as necessary a condition of life as the oxygenating of the blood by means of breathing.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땅에서 가꾼 빵, 채소, 과일에 의한 음식물이 가장 상쾌하며, 건강하고, 가볍고 자연적인 음식물이라는 것, 그리고 호흡으로 피에 산소를 공급하는 만큼 자신의 근육들을 운동하게 하는 작업이 삶의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To invent ways for people to be well nourished by means of chemically prepared food and to make the forces of nature work for them, while the distribution of property and labour remains wrong, is the same as inventing a means of pumping oxygen into the lungs of a man who is locked up in a room with bad air, when all that need be done is to stop keeping the man in the locked room. 한편으로 재산과 노동의 분배가 왜곡되어 있으면서, 사람들이 화학적으로 준비된 음식으로 잘 먹게 되도록 그리고 자연의 힘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발명하는 것은, 사람을 방에 가두어 두기를 멈추는 것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임에도, 해로운 공기로 차있는 방 안에 갇혀있는 사람의 허파에 산소를 밀어 넣는 수단들을 발명하는 것과 동일하다.
No professors will ever set up a laboratory for the production of food that is better than the one that has been set up in the vegetable and animal world, and to use the fruits of this laboratory and participate in it, man has only to give himself to the ever-joyful need for labour, without which man’s life is a torment. And here the scientists of our age, instead of applying all their forces to removing what hinders man from using these blessings prepared for him, recognize the situation in which man is deprived of these blessings as immutable, and, instead of arranging the life of men so that they could work joyfully and be nourished by the earth, they devise ways of turning them into artificial freaks. It is the same as if, instead of taking a man from a locked room out into the fresh air, one invented ways of pumping the necessary oxygen into him, enabling him to live not in a house but in a stuffy basement. 어떤 교수들도 식물 및 동물 세계에 설치되어 있는 것보다 나은 음식 생산을 위한 실험실을 세우지 않을 것이고, 이 실험실의 결과들을 사용하며 그것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오직 노동에 대한 영원히 즐거운 필요에 내맡기기만 하면 되며, 그것이 없다면 사람의 삶은 고통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은, 사람이 그 앞에 준비되어 있는 이런 축복들을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힘들을 적용하는 대신에, 사람이 이런 축복들을 빼앗긴 상태가 불변이라고 인식하며,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고 땅에 의해 음식을 먹도록 사람들의 삶을 조정하는 대신, 인공적인 돌연변이로 변화시키는 방법들을 고안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꽉 닫혀 있는 방으로부터 신선한 공기로 사람으로 데리고 나오는 대신, 그가 집 안에서가 아니라 숨막히는 지하실에 살수 있도록 필요한 산소를 그에게 주입시키는 방법들을 발명하였다.
Such wrong ideals could not exist if science were not on the wrong path. 이토록 왜곡된 이상들은 만일 과학이 왜곡된 길을 가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다.
And yet the feelings conveyed by art arise on the bases given by science. 하지만,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은 과학에 의해 주어진 토대들 위에서 일어난다.
What feelings can be called up by this science which stands on the wrong path? One part of this science calls up backward feelings which have been outlived by mankind, feelings which in our time are bad and exclusive. The other part, occupied with the study of subjects that by their very essence have no relation to human life, cannot serve as a basis for art. 왜곡된 길에 서있는 이런 과학에 의해서 어떤 느낌들이 불러와 질 것인가? 이 과학의 한 부류는 인류에게 쓸모 없게 되어 버린 후진적인 느낌들을, 우리 시대에 악하며 배타적인 느낌들을 불러 온다. 다른 부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주제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서, 예술의 토대로서 작용할 수 없다.
So that the art of our time, in order to be art, must by-pass science and make its own path, or else take direction from the unacknowledged science that is rejected by scientific orthodoxy. And this is what art does when it at least partially fulfils its purpose.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예술은, 예술이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을 우회하여 그 자신의 길을 만들거나, 혹은 과학적 정통파에 의해 거부되어 인정되지 않은 과학의 방향으로부터 방향을 잡아야 한다.
It is to be hoped that the work I have attempted to do with respect to art will also be done with respect to science; that the incorrectness of the theory of science for science’s sake will be pointed out to people, that they will be clearly shown the necessity of accepting the Christian teaching in its true meaning, and that on the basis of this teaching a re-evaluation will be made of all the knowledge we possess and of which we are so proud; that they will be shown how secondary and worthless experimental knowledge is, and how primary and important religious, moral and social knowledge are; and that such knowledge will not be left to the guidance of the upper classes only, but will constitute the chief object of all those free, truth-loving people who, not always in agreement with the upper classes, but running counter to them, have moved forward the true science of life. 희망하는 것은, 예술에 관해서 내가 행하고자 시도한 작업이 또한 과학에 관해서도 행해질 것; 과학을 위한 과학의 이론의 오류가 사람들에게 주의를 끌 것,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실된 의미로 수용할 필요를 깨알을 것,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토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으며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모든 시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질 것; 실험적 지식이 얼마나 부차적이며 무가치한 것인지,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 및 사회적 지식이 얼마나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인지를 그들이 깨닫게 될 것;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상류 계급들에 인도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상류 계급들과 언제나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대적하면서, 삶에 관한 참된 과학을 앞으로 전진시킨 자유롭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그런 사람들의 주된 목적을 구성할 것이다.
As for mathematics, astronomy, physics, chemistry, as well as biological, technical and medical sciences, they will be studied in so far as they contribute to liberating people from religious, juridical and social deceptions, or serve the good of all and not of one class. 수학, 천문학, 물리학,화학, 뿐만 아니라 생물, 기술 및 의료 과학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종교적, 법률적 및 사회적 기만들로부터 해방시킴에 기여하거나, 혹은 한 계급이 아니라 모두의 선에 봉사하는 한, 연구될 것이다.
Only then will science cease to be what it is now — on the one hand, the system of sophisms necessary for maintaining an obsolete order of life; on the other hand, a formless heap of varied knowledge, mostly of little use or altogether unnecessary — and become a harmonious, organic whole with a definite and reasonable purpose, understandable to all people — namely, the introducing into people’s consciousness of the truths that come from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오직 그 때에 과학은 지금의 상태 —  한편으로, 쓸모 없어진 삶의 질서를 유지함에 필요한 궤변들의 체계; 다른 한편으로, 형체가 없는, 대개 소용이 없거나 혹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다양한 지식 덩어리 — 를 중지할 것이며 확고한 그리고 합리적 목적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조화롭고 유기적인 전체 — 즉, 사람들의 의식 속에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意識)에서 나오는 진리들을 안내함 — 이 될 것이다.
And only then will art, which always depends on science, be what it can and should be — an organ of the life and progress of mankind as important as science. 그리고 그 때에 비로소, 언제나 과학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예술은 본래의 모습일 수 있고 본래의 모습  — 과학 만큼 중요한 삶의 한 기관 및 인류의 진보 — 이어야만 할 것이다.
Art is not pleasure, consolation, or amusement; art is a great thing. Art is an organ of mankind’s life, which transmutes people’s reasonable consciousness into feeling. In our time, the common religious consciousness of men is the consciousness of the brotherhood of men and their well-being in mutual union. True science should indicate various ways of applying this consciousness to life. Art should transmute this consciousness into feeling. 예술은 쾌락, 위안, 혹은 오락이 아니다; 예술은 위대한 것이다. 예술은 인류의 삶의 기관으로서, 그것은 사람들의 합리적 의식을 느낌으로 변화시킨다. 우리 시대에서, 사람들의 공통적인 종교적 의식은 사람들의 형제애에 대한 의식 및 상호 연합 안에서의 행복이다. 참된 과학은 반드시 이러한 의식을 삶에 적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암시해야 한다.
The task facing art is enormous: art, genuine art, guided by religion with the help of science, must make it so that men’s peaceful life together, which is now maintained by external measures — courts, police, charitable institutions; workplace inspections, and so on — should be achieved by the free and joyful activity of men. Art should eliminate violence. 예술을 맞이 하는 과제는 엄청나다: 예술, 참된 예술은, 과학의 도움을 동반한 종교에 의해 인도 되어, 사람들의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이, 지금은 외적인 방법들 — 법정들, 경찰, 자선 단체들; 작업장 검열들 — 에 의해 유지되고 있지만, 반드시 사람들의 자유롭고 즐거운 활동에 의해서 성취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은 반드시 폭력을 배제하여야 한다.
And only art can do that. 오직 예술만이 그것을 해 낼 수 있다.
All that presently makes it possible for men to live together, independently of the fear of violence and punishment (and in our time an enormous part of the order of life is based on this) — all of it has been brought about by art. If through art there could be conveyed the customs of treating religious objects in a certain way, of treating parents, children, wives, relations, strangers, foreigners in a certain way, of treating elders, persons of higher rank, enemies, animals, the suffering in a certain way — and this has been observed by millions of people over generations, not only without the least violence, but in such a way that it cannot be shaken by anything but art — then this same art can evoke other customs, more closely corresponding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If art could convey the feeling of reverence for icons, for the Eucharist, for the person of a king, of shame at the betrayal of friendship, of loyalty to a flag, the necessity of revenging an insult, the need of donating one’s labour for the building and adorning of churches, the duty of defending one’s honour or the glory of one’s fatherland, then the same art can evoke reverence for each man’s dignity, for every animal’s life; it can evoke the shame of luxury, of violence, of revenge, of using for one’s pleasure objects that are a necessity for other people; it can make people sacrifice themselves to serve others freely and joyfully, without noticing it. 현재로 폭력 및 처벌 (그리고 우리 시대는 삶의 질서의 엄청난 부분이 이것에 기초하고 있다)에 의하지 않고,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것 — 그 모든 것은 예술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일 예술을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종교적 대상들을 대하는, 어떤 방법으로 부모들, 아이들, 아내들, 친척들, 낯선 사람들, 외국인들을 대하는, 어떤 방법으로 어른들, 직위가 높은 사람들, 원수들, 동물들을 대하는 관습들이 전달될 수 있다면 — 그리고 이것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 최소한의 폭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술 외에는 흔들릴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지켜져 왔다면 — 그렇다면, 이 동일한 예술은 다른 관습들도,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에 더욱 긴밀히 부합하도록, 일깨울 수 있다. 만일 예술이 성상들에 대한, 성체에 대한 느낌, 왕의, 우정의 배반에 대한 치욕의, 국기에 대한 충성의 화신, 모욕에 대한 복수의 필요성, 교회들의 건축 및 치장을 위한 노동을 기증할 필요, 자신의 조국의 명예 혹은 영광을 수호할 의무에 대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예술이 각기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모든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경을 불러 올 수 있다; 그것은 사치의, 폭력의, 복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필수품인 대상들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함의 수치를 일깨울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봉사하도록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Art should make it so that the feelings of brotherhood and love of one’s neighbour, now accessible only to the best people of society, become habitual feelings, an instinct for everyone. By calling up the feelings of brotherhood and love in people under imaginary conditions, religious art will accustom people to experiencing the same feelings in reality under the same conditions; it will lay in people’s souls the rails along which the life behavior of people brought up by art will naturally run. And uniting the most diverse people in one feeling and abolishing separation, the art of the whole people will educate mankind for union, will show them, not in reasoning but in life itself, the joy of general union beyond the barriers set up by life. 예술은, 지금은 비록 사회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만 볼 수 있지만, 형제애 및 이웃에 대한 사랑의 느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능으로, 일상적인 느낌들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상상의 상황들에서 형제애 및 사람들 안에 사랑의 느낌을 불러 옴으로써, 종교적 예술은 동일한 상황들 아래 현실에서도 동일한 느낌들을 경험함에 익숙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영혼들 안에 예술에 의해 길러진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자연스레 달려 갈 레일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다양한 사람들을 한 가지 느낌 안에 연합하고 분열을 폐지 함으로써, 전체 민중의 예술은 인류를 연합하기 위해 교육할 것이며, 추론으로서가 아니라 삶 자체로서, 삶에 의해 세워진 장벽들을 넘어서 보편적 연합의 즐거움을 그들에게 보여 줄 것이다.
The purpose of art in our time consists in transferring from the realm of reason to the realm of feeling the truth that people’s well-being lies in being united among themselves and in establishing, in place of the violence that now reigns, that Kingdom of God — that is, of love — which we all regard as the highest aim of human life. 우리 시대의 예술의 목적은,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느낌의 영역으로, 사람들의 행복은 스스로 연합됨에 그리고, 지금 만연하고 있는 폭력 대신에, 우리 모두가 사람의 삶의 가장 높은 목표로 여기는 하나님의 — 즉, 사랑의 — 나라를 확립함에 있다는 진리를 옮기는 것에 있다.
Perhaps in the future science will open to art still newer, higher ideals, and art will realize them; but in our time, the purpose of art is clear and definite. The task of Christian art is the realization of the brotherly union of men. 아마도 미래에 과학은 더욱 새롭고 숭고한 이상들에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것들을 실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예술의 목적은 명백하고 확실하다.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의 과제는 사람들의 형제애적인 연합의 실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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