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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TRANSLATED BY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XVI

   
How determine whether art is good or bad in its content?  예술이 내용 면에서 선한지 악한지 어떻게 결정되는가? 
Art, together with speech, is a means of communication, and therefore also of progress — that is, of mankind’s movement forward towards perfection. Speech enables people of later generations to know all that preceding generations knew and that the best of their most advanced contemporaries know through experience and reflection; art enables people of later generations to experience all the feelings that people experienced before them and that the best of the most advanced people experience now. And just as in the evolution of knowledge — that is, the forcing out and supplanting of mistaken and unnecessary knowledge by truer and more necessary knowledge — so the evolution of feelings takes place by means of art, replacing lower feelings, less kind and less needed for the good of humanity, by kinder feelings, more needed for that good. This is the purpose of art. And therefore art is better in its content in so far as it fulfils this purpose better, and is worse in so far as it fulfils it less. 예술은, 언어와 함께, 통신의 수단이며, 그러므로 또한 진보의 — 즉, 완벽을 향한 인류의 전진의 — 수단이다. 언어는 다음 세대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앞서간 세대들이 알았던 그리고 그들의 가장 진보한 동시대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경험과 사유를 통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다음 세대의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 이전에 사람들이 경험한 그리고 현재 가장 진보한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모든 느낌들을 경험하도록 한다. 그리고 지식의 혁명 — 즉, 오류에 물든 그리고 불필요한 지식을 밀어내고 더 참되고 더 필요한 지식으로 대체함 — 과 마찬가지로, 느낌들의 혁명은 예술에 의하여 발생하며, 인류의 선을 위해 덜 친절하고 덜 필요한 저급한 느낌들을, 그러한 선을 위해 더 필요하고 더 친절한 느낌들로 교체한다. 이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이런 목적을 더 훌륭히 충족시키는 한 그 내용에서 더 선한 것이며, 덜 충족시키는 한 더 악한 것이다.
The evaluation of feelings — that is, the recognition of these or those feelings as being more or less good, meaning more or less needed for people’s good — is accomplished by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a given time. 느낌들에 대한 평가 — 즉, 사람들의 선을 위해 더 혹은 덜 유익함으로, 더 혹은 덜 필요하다는 의미로서 이런 혹은 저런 느낌들에 대한 인식 — 는 주어진 시대의 종교적 의식에 의해 수행된다.
In every specific historical age and in every human society there exists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 of life which is the highest that has been reached by the people of that society and which defines the highest good for which that society strives. This understanding is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the given time and society.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is always clearly expressed by certain advanced members of the society, and is more or less vividly felt by all.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corresponding to its expression, always exists in every society. If it seems to us that there is no religious consciousness in society, that is not because there is indeed none, but because we do not want to see it. And often we do not want to see it because it exposes our life, which often does not conform to it. 모든 제각기 역사 시대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사회에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그 사회의 민중에 의해 도달된 최고의 경지이자 그 사회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을 정의하는 것인 때가 존재한다. 이 깨달음은 주어진 시대 및 사회의 종교적 의식이다. 이 종교적 의식은 언제나 사회의 어떤 진보한 구성원들에 의해 명백히 표현되며, 모든 사람들에 의해 다소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종교적 의식은, 그 표현과 일치하면서, 언제나 모든 사회에 존재한다. 만일 사회에 아무런 종교적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그것을 인식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노출시키며, 우리의 삶이 그것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society is the same as the direction of a flowing river. If a river flows, there is a direction in which it flows. If a society lives, there is a religious consciousness that indicates the direction in which all the people of this society more or less consciously strive. 사회의 종교적 의식은 흐르는 강의 방향과 동일하다. 만일 강이 흐른다면, 흐름에는 방향이 있다. 만일 사회가 살아간다면, 이 사회의 모든 민중이 많든 적든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종교적 의식이 존재한다.
And therefore religious consciousness has always existed and exists now in every society. And the feelings conveyed by art have always been evaluated in correspondence with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Only on the basis of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of its time has it ever been possible to single out from the whole boundlessly diverse sphere of art the art which conveyed those feelings which realized in life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the given time. Such art has always been highly appreciated and encouraged; but art that conveyed feelings coming from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a previous time — backward, outlived art — has always been condemned and despised. The rest of art, conveying the great variety of feelings by means of which people communicate among themselves, was not condemned but was allowed, as long as it did not convey any feelings contrary to religious consciousness. Thus, for instance, among the Greeks, art conveying the feelings of beauty, strength and manliness (Hesiod, Homer, Phidias) was singled out, approved and encouraged, while art that conveyed feelings of coarse sensuality, dejection and effeminacy was condemned and despised. The Jews singled out and encouraged art that conveyed the feelings of devotion and obedience to the God of the Jews and his covenants (some parts of the Book of Genesis, the Prophets, the Psalms), and condemned and despised art that conveyed feelings of idolatry (the golden calf); while the rest of art — stories, songs, dances, decoration of houses, utensils, clothing — which was not contrary to religious consciousness was neither noticed nor discussed. This is how the content of art has been evaluated always and everywhere, and this is how it ought to be evaluated, because such an attitude towards art comes from the properties of human nature, and these properties do not change. 그러므로 종교적 의식은 모든 사회에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에 의해 전달된 느낌들은 언제나 이 종교적 의식과 일치하도록 평가되어 왔다. 오로지 그 시대의 이 같은 종교적 의식에 기초해서 전체적으로 끝없이 다양한 예술의 영역으로부터 주어진 시대의 종교적 의식을 삶에 실현한 그런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을 간추려 내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예술은 언제나 높이 평가되었고 진흥되었다; 그러나 이전 시대의 — 후진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의 —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은 언제나 비난 받고 경멸되어 왔다. 나머지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통신하는 수단으로서 매우 다양한 느낌들을 전달 하는 것으로, 종교적 의식에 반하는 느낌들을 전달하지 않는 한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그리스인들에게는, 미, 힘, 및 용맹 (헤시오드, 호며, 피디아스)의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이 선별되어 인정을 받고 진흥된 반면, 천박한 관능, 우울, 나약함의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은 비난 받고 경시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하나님 및 그의 계약 (창세기의 일부, 선지자, 시편)에 대한 헌신 및 복종의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을 선별하여 장려하였으며, 우상 (금송아지)의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을 비난하고 경멸하였다; 한편 나머지 예술 — 이야기, 가요, 춤, 주택의 장식,도구들, 의상 — 은 종교적 의식에 반대하지 않는 경우 눈에 띄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논의되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예술의 내용이 언제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평가되어 온 방법이며, 이 점이 바로 예술이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이다, 왜냐하면 예술에 대한 그러한 경향은 인간 본성의 특성들로부터 나오며 이런 특성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I know that according to an opinion widely spread in our time religion is a superstition which mankind has outlived, and it is therefore supposed that in our time there exists no religious consciousness common to all people according to which art could be evaluated. I know that this is the opinion spread among the supposedly educated circles of our time. People who do not recognize Christianity in its true sense, who therefore invent various sorts of philosophical and aesthetic theories for themselves which conceal from them the meaninglessness and depravity of their lives, cannot think otherwise. These people intentionally, and sometimes unintentionally, confuse the concept of religious cult with the concept of religious consciousness, and think that by rejecting cult they are thereby rejecting religious consciousness. But all these attacks on religion and the attempts to establish a world outlook opposite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are the most obvious proof of the presence of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which exposes the life of people not in accord with it. 나는,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의견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에게 쓸모 없는 미신이며,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이 평가될 수 있는 공통적 종교적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됨을 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소위 교육받은 부류들 사이에 퍼져있는 의견임을 안다.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교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무의미함 및 타락을 가려주는 다양한 종류의 철학 및 미학 이론들을 자신들을 위해 고안해 내며, 정 반대로는 생각해 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의도하지 않게, 종교적 의식(儀式)의 개념을 종교적 의식(意識)의 개념과 혼동하며, 의식(儀式)을 거부함으로써 종교적 의식(意識)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이 모든 공격들 및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에 반대되는 세계관을 확립하려는 시도들은 이 같은 종교적 의식의 실재를 가장 명확히 증거하는 것이며, 종교적 의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노출시킨다.
If there does occur a progress — that is, a movement forward — in mankind, then there must inevitably exist an indicator of the direction of this progress. This indicator has always been religion. All of history shows that the progress of mankind cannot be accomplished otherwise than with the guidance of religion. And if the progress of mankind cannot be accomplished without the guidance of religion — and progress is always being accomplished, which means it is also being accomplished in our time — then there must be religion in our time. And so, whether the so-called educated people of our time like it or not, they must recognize the existence of religion — not the religion of cult, Roman Catholic, Protestant, etc., but religious consciousness — as the necessary guide of progress in our time as well. And if there exists a religious consciousness among us, then our art must be evaluated on the basis of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and in exactly the same way as always and every­where, the art which conveys feelings coming from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should be singled out from all indifferent art, should be recognized, highly appreciated and encouraged, while art that is contrary to this consciousness should be condemned and despised, and the remaining indifferent art should neither be singled out nor encouraged. 만일 인류 안에 진보 — 즉, 앞으로의 움직임 — 가 일어 난다면, 그렇다면 필연코 이런 진보의 방향에 대한 지침이 존재한다. 이 지침은 언제나 종교였다. 역사의 모든 것은 인류의 진보가 종교의 인도가 없다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만일 인류의 진보가 종교의 인도로 성취될 수 없다면  —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성취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종교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든 말든, 그들은 또한 우리 시대의 진보의 필요한 지침으로서 종교 — 의식(儀式)의 종교, 로마 카톨릭, 개신교, 등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 의식  — 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들 안에 종교적 의식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예술은 반드시 이 종교적 의식을 토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은 모든 사소한 예술로부터 선별되어, 높이 인정되고, 장려되어야 하며, 한편으로 이런 의식에 반대되는 예술은 비난 받고 경시되어야 하고, 여타의 사소한 예술은 선별되어서도 장려되어서도 안 된다.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in its most general practical application, is the consciousness of the fact that our good, material and spiritual, individual and general, temporal and eternal, consists in the brotherly life of all people, in our union of love with each other. This consciousness was expressed not only by Christ and all the best people of the past; it is not only repeated in the most diverse forms and from the most diverse sides by the best people of our time; but it already serves as a guiding thread for the whole complex labour of mankind, which consists, on the one hand, in destroying the physical and moral obstacles that hinder the union of people, and, on the other hand, in establishing those principles, common to all, which can and must unite people into one universal brotherhood. It is on the basis of this consciousness that we must evaluate all the phenomena of our life, including our art, singling out from its whole sphere that which conveys feelings coming from this religious consciousness, highly appreciating and encouraging this art, while rejecting that which is contrary to this consciousness, and not ascribing to the rest of art a significance that is not proper to it.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은, 가장 일반적 실용적 적용에서, 우리의 선이, 물질적 및 정신적, 개인적 및 일반적, 일시적 및 영원성측면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형제애적인 삶,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연합함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다. 이 의식은 그리스도 및 과거의 모든 가장 선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선언되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선한 사람들에 의해 가장 다양한 형식 안에 그리고 가장 다양한 측면들 안에서만 반복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 전체의 복잡한 노력을 향한 지침이 되는 맥락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모든 이들에게 공통인 것으로, 사람들의 연합을 저해하는 육체적 및 도덕적 장애물들을 파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보편적 형제애로 결합되어 질 수 있고 그리 되어야만 하는 그런 원리들을 확립함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현상들을 평가하여야만 하고, 우리의 예술을 포함하여, 그 전체 영역에서 이런 종교적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느낌들을 전달하는 것을 골라내고, 이런 예술을 높이 인식하고 장려하는 한편, 이런 의식에 반대되는 것을 거부하며, 나머지 예술에 대하여서는 그에 적절하지 않은 의미들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The chief mistake made by upper-class people in the time of the so-called Renaissance — a mistake which we still perpetuate — consisted, not in ceasing to appreciate and ascribe significance to religious art (people of that time could not ascribe any significance to it because, just like the upper-class people of our time, they could not believe in what the majority regarded as religion), but in putting in place of this absent religious art a worthless art that had pleasure as its only aim — that is, they began to single out, appreciate and encourage as religious an art that in no way deserved such appreciation and encouragement. 소위 르네상스 시대에 상류 계급 사람들이 범한 주된 오류 — 여전히 우리가 계속하고 있는 오류 — 는 종교적 예술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기를 중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상류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중이 종교로 여기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쾌락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쓸모 없는 예술을 이런 공허한 종교적 예술로 대신함에 있다 — 즉, 그들은 결코 평가나 장려를 받을 수 없는 그런 것을 골라내어, 종교적 예술로 평가하고, 장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One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said that people’s main trouble is not that they do not know God, but that they have put in place of God that which is not God. It is the same with art. The main trouble of the upper-class people of our time is not that they have no religious art, but that in place of lofty religious art, singled out from everything else as especially important and valuable, they have singled out the most worthless and generally the most harmful art, which aims at giving pleasure to some and which by that exclusiveness alone is already contrary to the Christian principle of universal union which constitutes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In place of religious art, an empty and often depraved art has been set up, and this conceals from people the need for that true religious art which should be present in life, in order for it to be improved. 교부(敎父)들 중의 한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들의 주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점이라고 했다. 우리 시대 상류 계급 사람들의 주된 문제는 그들이 아무런 종교적 예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숭고한 종교적 예술 대신에, 그 외에 특별히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것에서 골라 낸 다음, 그들은 가장 가치 없고 일반적으로 가장 해로운 예술을 골라 내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려는 의도하며 오직 그러한 배타성만으로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을 구성하는 보편적 연합에 이미 대치된다는 점이다. 종교적 예술을 대체함으로써, 공허하고 흔히 타락한 예술이 만들어 져서는, 이것이 삶에 존재해야 하며, 삶이 개선되도록 하려는 그런 참된 종교적 예술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서 숨긴다.
It is true that art which satisfies the demands of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is totally unlike former art, but despite this dissimilarity, for a man who does not deliberately conceal the truth from himself, it is quite clear and definite what constitutes the religious art of our time. In former times, when the loftiest religious consciousness united only one part of human society among others, even though a very large part — Jews, Athenians, Roman citizens — the feelings conveyed by the art of those times came from a desire for the power, grandeur, glory and prosperity of those societies, and the heroes of art could be people who contributed to that prosperity by their strength, perfidy, cunning, cruelty (Odysseus, Jacob, David, Samson, Hercules, and all mighty men).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does not single out any ‘one’ society of people, but, on the contrary, demands the union of all, absolutely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and places brotherly love for all people above all other virtues, and therefore the feelings conveyed by the art of our time not only cannot coincide with the feelings conveyed by former art, but must be opposed to them.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의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예술은 전적으로 이전의 예술과는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스스로에게 진리를 숨기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 시대의 종교적 예술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명백하고 확실하다. 이전 시대는, 즉, 숭고한 종교적 의식이 여타의 사회들 중에서 오직 일부의 인간 사회만을 연합할 때는, 비록 매우 큰 일부 — 유대인, 아테네인, 로마 시민 — 일지라도, 그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은 그 사회들의 권력, 위엄, 영예 및 번영에 대한 갈망에서 왔으며, 예술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힘, 배신, 책략, 잔인성으로서 그러한 번영에 기여한 사람들(오디세우스, 야곱, 다윗, 삼손, 헤라클레스, 및 모든 능력자들)일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은 사람들의 어떤 "특정한" 사회를 가리지 않으며, 반대로, 모든, 예외 없이, 전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연합을 요구하며,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과는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그것들과 대치된다.
Christian, truly Christian, art could not establish itself and has not yet established itself precisely because Christian religious consciousness was not one of those small steps with which mankind regularly proceeds, but was an enormous revolution which, if it has not yet changed, is bound inevitably to change mankind’s whole understanding of life and the whole internal arrangement of that life. True, the life of mankind, like the life of an individual man, proceeds regu­larly, but amidst this regular movement there occur turning points, as it were, which sharply divide the life before from the life after. Christianity was such a turning point for mankind, or so at least it should seem to us, who live by Christian consciousness. Christian consciousness gave a different, new direction to all human feelings, and therefore completely changed both the content and the significance of art. The Greeks could make use of Persian art, and the Romans of Greek art, as the Jews did of Egyptian art — the basic ideals were the same. The ideal was now the grandeur and prosperity of the Persians, now the grandeur and prosperity of the Greeks or Romans. One and the same art was transferred to different conditions and suited to a new nation. But the Christian ideal changed and turned over everything in such a way that, as the Gospel says, ‘what was great among men is abomination in the sight of God’. [102] The ideal became not the grandeur of a pharaoh or a Roman emperor, not the beauty of a Greek or the wealth of Phoenicia, but humility, chastity, compassion, love. The hero was no longer the rich man, but the beggar Lazarus; Mary of Egypt, not in the time of her beauty, but of her repentance; [103] not the acquirers of wealth, but those who gave it away; not those who lived in palaces, but those who lived in catacombs and hovels; not people ruling over others, but people who recognize no other power than God’s. And the highest work of art was no temple of victory with statues of the victors, but the image of a human soul so transformed by love that a tortured and murdered man could pity and love his tormentors.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예술은 확립될 수 없었으며,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의식은 인류가 일정하게 나아가고 있는 조그만 발걸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거대한 혁명으로서, 아직 변모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삶에 대한 전체적 깨달음 및 그런 삶의 전체적 내적 정돈을 필연적으로 바꾸어 나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의 삶은, 개인의 삶처럼, 일정하게 전진한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적인 움직임 사이에 전환점들이 발생하며, 다시 말하자면 그것들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예리하게 갈라 놓는다. 그리스도교는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한 전환점이거나, 혹은, 그리스도교적인 의식으로 사는 우리에게 적어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교적인 의식은 모든 인간의 느낌들에 대해 상이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그러므로 예술의 내용과 의미를 완전히 변모시켰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의 예술을, 로마인들은 그리스 예술을 이용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예술 — 기본 이t상들은 동일하였다 — 을 이용하였다. 때때로 이상은 페르시아인들의 장엄함 및 번영이었으며, 때때로 그리스인들 혹은 로마인들의 장엄함 및 번영이었다. 하나이자 동일한 예술이 상이한 상황들에 전파되어 새로운 나라에 적응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복음서에서 '사람들 사이에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혐오이니라'라고 말하듯, 모든 면에서 바뀌고 전도되었다. 이상은 파라오 혹은 로마 황제의 장엄함이 아니며, 그리스의 아름다움 혹은 페니치아의 부가 아니라, 겸손, 순결, 연민, 사랑이 되었다. 주인공은 더 이상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였으며; 이집트의 마리아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회개하는 모습이었으며; 부를 축적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었으며; 궁궐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하 묘지들 및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외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예술 작품은 승리자의 형상들이 있는 승리의 사원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이미지로서 너무나도 사랑으로 변모되어 고문 받고 살해 당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고통 준 사람을 연민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And therefore people of the Christian world have difficulty resisting the inertia of pagan art, with which they have grown up all their lives. The content of Christian religious art is so new for them, is so unlike the content of former art, that it seems to them that Christian art is a denial of art, and they cling desperately to the old art. And yet in our time this old art, no longer having its source in religious consciousness, has lost all meaning, and we must renounce it, whether we will or no.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 함께 성장해온 이교도 예술의 무기력함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교적인 종교적 예술의 내용은 그들에게 너무나 새롭고, 이전 예술의 내용과는 너무나 달라서, 그리스도교 예술은 그들에게 마치 예술을 부인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은 옛날 예술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우리 시대 안에서 이 옛날 예술은 더 이상 종교적 의식(意識)에 그 근원을 두지 않으며, 모든 의미를 잃어 버렸으며, 그리고 우리는 원하든 아니하든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The essence of Christian consciousness consists in each man’s recognition of his sonship to God, and their consequent union with God and with each other, as it is said in the Gospel, [104] and therefore the content of Christian art is such feelings as contribute to the union of men with God and with each other. 그리스도교적인 의식의 핵심은, 복음서에 기록된 바, 각자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에 따라 하나님 및 사람이 서로의 연합함의 인식에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의 내용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및 서로와 연합함에 기여하는 느낌들이다.
The expression, the union of men with God and with each other, may appear vague to people accustomed to hearing these words so often abused, and yet the words have a very clear meaning. These words mean that the Christian union of people, contrary to the partial, exclusive union of some people, is one that unites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연합함"이란 표현은 이 말들이 너무나 자주 오용되는 것을 들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모호하게 보이겠지만, 이 말은 매우 명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들은 사람들의 그리스도교적 연합은, 일부 사람들의 배타적 연합인 부분적인 것과는 반대로,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연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Art, all art, has in itself the property of uniting people. All art causes those who perceive the feeling conveyed by the artist to unite in soul, first with the artist, and secondly with all who have received the same impression. But non-Christian art, by uniting certain people with each other, thereby separates them from other people, so that this partial union often serves as a source not only of disunity but of hostility towards other people. Such is all patriotic art, with its hymns, poems, monuments; such is all Church art — that is, the art of particular cults, with its icons, statues, processions, services, churches; such is military art; such is all refined art, essentially depraved, accessible only to people who oppress others, people of the idle, wealthy classes. Such art is backward, non-Christian, uniting some people only in order to separate them still more sharply from other people and even to place them in an attitude of hostility towards other people. Christian art is that alone which unites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 either by calling up in them the awareness that they are all in the same position with regard to God and their neighbors, or by calling up in them one and the same feeling, even the most simple, but not contrary to Christianity and proper to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예술은, 모든 예술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연합하는 속성을 지닌다. 모든 예술은 예술가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을 인식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우선 예술가와, 그리고 둘째로 동일한 인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연합되게 한다. 그러나 비 그리스도교적 예술은, 특정한 사람들을 서로 연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하며, 그리하여 이 편파적 연합은 분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의 원천으로서 작용한다. 애국적 찬양들, 시들, 기념비들을 담은 모든 애국적 예술이 그러하다; 교회 예술 — 즉, 성상들, 조상(彫像)들, 행렬들, 예배들, 교회들을 담은 특정한 숭배들에 관한 예술 — 이 그러하다; 군대 예술이 그러하며; 모든 세련된 예술, 근본적으로 타락하여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 나태한 자들, 부유한 계급들에게만 열려 있는 예술이 그러하다. 그러한 예술은 후진적이며, 비 그리스도교적이며, 일부의 사람들을 결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욱 철저히 분리하고 심지어 그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 경향을 띠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적 예술은 단지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 그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들의 이웃과 관련하여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자각을 그들 안에 불러 내거나, 혹은 그들 안에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 심지어 가장 단순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치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을 불러 옴으로써 — 연합하는 것이다.
Good Christian art of our time may fail to be understood by people owing to formal flaws or to people’s lack of attention, but it must be such that everyone can experience the feelings that are being conveyed to them. It must be art not of some one circle of people, not of some one rank, one nationality, one religious cult — that is, it must not convey feelings accessible only to a person brought up in a certain way, only to a nobleman, a merchant, or only to a Russian or a Japanese, or a Catholic, a Buddhist, etc., but feelings accessible to any man. Only such art can be considered good art in our time, can be singled out from the rest of art and encouraged. 우리 시대의 훌륭한 그리스도교 예술은 형식상 결함들 혹은 사람들의 관심 부족으로 사람들의 깨달음에 못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그들에게 전달되는 대로의 느낌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범주의 사람들의, 어떤 한 계급, 한 국적, 한 종교적 숭배의 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길러진 어떤 사람에게만, 귀족, 상인에게만, 혹은 러시아인 혹은 일본인 혹은 천주교인, 불교인, 등에게만 이용 가능한 느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용 가능한 느낌들을 전달하여야만 한다. 오직 그러한 예술만이 우리 시대에 훌륭한 예술로 여겨질 수 있으며 나머지 예술들에서 선별되어 장려될 수 있다.
Christian art, meaning the art of our time, must be catholic in the direct sense of the word — that is, universal — and must therefore unite all people. And there are only two kinds of feelings that unite all people: feelings that come from the consciousness of sonship to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and feelings of the simplest, most everyday sort, accessible to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such as the feelings of merriment, tenderness, cheerfulness, peacefulness, and so on. Only these two kinds of feelings constitute in our time the subject matter of art that is good in content. 그리스도교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예술의 의미로서, 반드시 직접적인 의미에서 만인에 이르는(catholic) — 즉, 보편적인(universal) — 것이어야 하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연합하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연합하는 느낌들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됨 및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로부터 나오는 느낌들, 그리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상적인 종류의 느낌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열려 있는 것으로, 즐거움, 부드러움, 명랑함, 평화로움, 등의 느낌들 같은 것이다. 오직 이들 두 가지 느낌들이 우리 시대에서 내용에 있어서 선한 예술의 주제를 구성한다.
The effect produced by these two apparently so dissimilar kinds of art is one and the same. The feelings that come from the consciousness of sonship to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such as feelings of firmness in the truth, trust in the will of God, self-denial, respect and love for man — feelings that come from Christian religious consciousness; and the simplest feelings — of being moved or made joyful by a song or an amusing joke understandable to all, or by a moving story, or a drawing, or a doll — produce one and the same effect: the loving union of people. It sometimes happens that people, while together, are, if not hostile, at least alien to each other in their moods and feelings, and suddenly a story, a performance, a painting, even a building or, most frequently, music, will unite them all with an electric spark, and instead of their former separateness, often even hostility, they all feel unity and mutual love. Each rejoices that another feels the same thing he does, rejoices at the communion that has been established not only between him and all those present, but also with all people now living who will receive the same impression; moreover, one feels the mysterious joy of a communion beyond the grave with all those in the past who experienced the same feeling, and chose who will experience it in the future. This effect is produced equally by art that conveys the feelings of the love of God and one’s neighbor and by everyday art that conveys the simplest feelings common to all people. 이들 두 가지 명백하게 지극히 다른 예술의 종류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효과는 하나이자 동일하다. 하나님의 자녀 됨 및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의 의식으로부터 오는 느낌들, 예로 들면 진리 안에서 확고한 느낌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 자기 부정, 사람에 대한 존경 및 사랑 —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느낌들; 그리고 가장 단순한 느낌들 — 어떤 노래 혹은 모든 이에게 이해되는 재미있는 농담에 의해, 혹은 감동적인 이야기, 혹은 그림, 혹은 인형에 의해 감동받거나 즐거워지는 느낌들 — 은 하나이며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사람들의 사랑하는 연합인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서, 적대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기분 혹은 느낌에서 서로 이질적인 일이 종종 있다, 그리고 갑자기 어떤 이야기, 연주, 그림, 심지어 어떤 건축물 혹은, 가장 흔하지만, 음악이 그들 모두를 전기적 불꽃과 함께 그들 모두를 연합하며, 그들의 이전의 괴리감, 가끔 심지어 적대감 대신에, 그들 모두는 일체감 및 서로의 사랑을 느낀다. 각자는 다른 사람이 그와 동일하게 느낀다는 것에 즐거워하며, 그와 참여한 모든 사람들 사이에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상을 받게 될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교제도 즐거워하며; 게다가, 과거에 동일한 느낌을 경험하였으며, 미래에 누가 그것을 경험할 것인지 결정한 모든 사람들과 무덤을 초월한 교제의 신비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효과는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에 대한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에 의해서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인 가장 단순한 느낌들을 전달하는 일상의 예술에 의해서 공히 만들어 진다.
The difference between evaluating the art of our time and that of former times consists above all in this, that the art of our time — that is, Christian art — being based on a religious consciousness that calls for the union of people, excludes from the sphere of art which is good in content all that conveys exclusive feelings which do not unite people but which separate them, and regards such art as bad in content, while, on the other hand, it includes in the category of art that is good in content an area of art which hitherto was not regarded as worthy of being singled out and respected — universal art, conveying feelings which are most simple and insignificant, yet accessible to all people without exception, and which therefore unite them. 우리 시대의 예술과 과거 시대들의 예술을 평가함에 있어서의 차이는 무엇보다 이 점에 있다, 즉, 우리 시대의 예술은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인 예술 — 은 사람들의 연합을 명령하는 종교적 의식(意識)에 기초함으로써, 내용이 선한 예술의 영역으로부터 사람들을 연합하지 않고 분리시키는 배타적 느낌들을 전달하는 모든 것을 배제시키며, 그런 예술을 내용상 악하다고 여기는 반면, 한편으로, 내용상 선한 예술의 범주에 안에 여태까지 선별되고 존중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던 예술의 — 보편적인 예술로서, 이것은 가장 단순하며 하찮은 느낌들을 전달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열려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을 연합하는  — 영역을 포함한다.
Such art cannot fail to be recognized as good in our time, because it achieves the very aim that Christian religious consciousness sets before mankind in our time. 그러한 예술은 우리 시대에서 선하다고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종교적 의식이 우리 시대의 인류 앞에 제시하고 있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Christian art either calls up in people those feelings which, through love of God and one’s neighbor, draw them towards greater and greater union, which make them ready for and capable of this union, or else it calls up in them feelings which show that they are already united in the oneness of life’s joys and sorrows. And therefore Christian art in our time can be and is of two kinds: (1) religious art, which conveys feelings coming from a religious consciousness of man’s position in the world with regard to God and his neighbor; and (2) universal art, which conveys the simplest everyday feelings of life, such as are accessible to everyone in the world. Only these two kinds of art can be considered good art in our time.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더욱 더 큰 연합을 향해 이끄는,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연합을 대비하고 가능하게 하는 그런 느낌들을 불러 일으키거나, 혹은 그것은 이미 그들 안에 삶의 기쁨들 및 슬픔들 에 대해 하나로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느낌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은 두 가지 종류일 수 있으며 그렇다: (1) 종교적인 예술, 이것은 하나님 및 그의 이웃에 관해 세상에서 그의 위치에 대한 종교적 의식을 통해 나오는 느낌들을 전달하며; (2) 보편적 예술, 이것은 삶의 가장 일상적인 느낌들을 전달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그러한 것이다. 오직 이들 두 가지 종류의 예술 만이 우리 시대에 선한 예술로 여겨질 수 있다.
The first kind, religious art, conveying positive feelings (the love of God and one’s neighbor) as well as negative ones (indignation, horror at the violation of this love), manifests itself mainly in verbal form and partly in painting and sculpture; the second kind, universal art, conveying feelings accessible to everyone, manifests itself in words, painting, sculpture, dance, architecture, and mainly in music. 첫 번째 종류로, 종교적 예술은, 긍정적 느낌들 (하나님 및 그의 이웃에 관한 사랑)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 (이런 사랑의 침해에 대한 분노, 공포)를 전달하며, 주로 언어 형식 및 부분적으로 그림이나 조각 안에 나타난다; 두 번째 종류로, 보편적 예술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느낌들을 전달하며, 언어, 그림, 조각, 무용, 건축 안에, 그리고 주로 음악 안에 나타난다.
If I were asked to point to examples of each of these kinds of art in modern art, then, as examples of the highest religious art coming from the love of God and one’s neighbour, I would point in literature to Schiller’s Robbers; and among more recent works, to Les pauvres gens of Victor Hugo and his Les Misérables; to the stories, tales, and novels of Dickens — A Tale of Two Cities, The Chimes, and others; to Uncle Tom’s Cabin; to Dostoevsky, most of all to his Dead House; to Adam Bede by George Eliot. 내가 현대 예술에서 이런 종류의 예술에 대해 각기 예들을 들어 보라고 요청 받는다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최고의 종교적 예술의 예들로서, 나는 문학 안에서는 쉴러의 Robbers; 그리고 좀더 최근의 작품들 중에는 빅터 휴고의 Les pauvres gens 및 Les Misérables; 디킨즈의 단편 소설, 이야기 및 소설 A Tale of Two Cities, The Chimes, 그리고 기타 작품들; Uncle Tom’s Cabin;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보다 Dead House; 조지 엘리어트의  Adam Bede를 들 것이다.
Among paintings of modern times, strange as it seems, there are almost no works of the kind that directly convey the Christian feelings of love of God and one’s neighbour, especially among famous painters. There are Gospel paintings, very many of them, all representing historical events with a great wealth of detail, yet they do not and cannot convey religious feelings which their authors do not have. There are many paintings that portray the personal feelings of various people, but there are very few paintings — and most of those by little-known painters, and not finished pictures but more often sketches — that portray deeds of self-denial and Christian love. Such is the sketch by Kramskoy, worth many of his paintings, which portrays a drawing room with a balcony, past which a returning army is solemnly marching. A nurse with a baby and a little boy stand on the balcony. They admire the marching army. But the mother, her face covered with a handkerchief, weeps, leaning on the back of the sofa. Such, too, is the painting by Langley which I have already mentioned; such, too, is the painting by the French artist Morion, [105] depicting a lifeboat hastening in a bad storm to help a foundering steamer. There are also paintings that approach this kind, portraying the labouring man with respect and love. Such are the pictures of Millet, particularly his drawing of the man with the hoe; to this same kind belong paintings by Jules Breton, Lhermitte, Defregger [106] and others. As examples of paintings that call up indignation and horror at the violation of the love of God and one’s neighbour, Ge’s Judgement may serve, as may Liezen-Mayer’s Signing the Death Sentence. [107] Paintings of this kind are also very few. For the most part, a preoccupation with technique and beauty overshadows feeling. Thus, for instance, Gerome’s painting, Pollice verso, [108] expresses not so much a feeling of horror at what is happening as a fascination with the beauty of the spectacle. 현대의 그림들 중에서,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특별히 유명한 화가들 중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느낌들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작품들의 종류는 거의 없다. 복음서 회화들은 매우 많이 존재하지만, 모두다 역사적 사건들을 매우 풍부하게 상세히 나타내지만, 그것들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적 느낌들을 전달하지도 할 수도 없다.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느낌들을 묘사하는 많은 그림들이 있지만,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행위들을 묘사하는 그림들은 — 그리고 대부분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의 것이며, 완성된 그림들이라기 보다 흔히 스케치들이다 — 매우 적다. 이러한 것이 크람스코이의 스케치로서, 그의 많은 그림들이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발코니가 있는 응접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옆으로 귀환하는 군대가 엄숙하게 행진하고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간호사와 조그만 아이가 발코니에 서 있다. 그들은 행진하는 군대를 찬미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덮고서 울고 있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다. 그와 같은 것은 또한 랭리의 그림으로, 나는 이미 이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와 같은 것은 또한 프랑스 화가 모리온의 그림으로, 지독한 폭풍 속에서 가라 앉고 있는 기선을 구조하고자 서두르는 구명정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런 종류에 접근하고 있는 그림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노동하는 남자를 존경과 사랑으로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밀레의 그림들로, 특히 괭이를 든 남자의 그림이다; 이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것들은 줄리 브레톤, 레르미트, 디프레거 등의 그림들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침해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불러 오는 그림들의 예들로서, 지의 Judgement가 합당할 것이며, 리젠 메이어의 Signing the Death Sentence도 그러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그림들은 역시 매우 적다. 대체적으로, 기교와 미에 대한 집착은 느낌을 흐리게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제로움의 그림, Pollice verso는 구경거리의 미에 매료되어 무엇이 일어 나고 있는지에 대해 공포의 느낌을 그다지 크게 표현하지 못한다.
It is still more difficult to point in modern art to examples of the second kind, of good universal everyday art, especially in verbal art and in music. If there do exist works which by their inner content might be placed in this category, such as Don Quixote, the comedies of Molière, Dickens’s David Copperfield and Pickwick Papers, the tales of Gogol and Pushkin, and some of the writings of Maupassant, even so these works, by the exclusiveness of the feelings they convey, by the superfluity of specific details of time and place, and above all by the poverty of their content as compared with examples of universal ancient art (for instance, the story of Joseph and his brothers), are mostly accessible only to people of their own nation and even of their own circle. That Joseph’s brothers, being jealous over their father, sold him into slavery; that Potiphar’s wife wanted to seduce the youth; that the youth attained a high position, felt sorry for his brothers, for his favourite, Benjamin, and all the rest — these are all feelings accessible to a Russian peasant, to a Chinese, to an African, to a child, to an old man, to an educated man or an uneducated; and it is all written with such restraint, is so free of superfluous details, that the story can be transferred to any other milieu you like and still be as understandable and moving for everyone. Not so the feelings of Don Quixote or of Moliere’s heroes (though Moliere is all but the most universal and therefore the most excellent artist of modern times), still less of Pickwick and his friends. These feelings are very exclusive, not all-human, and therefore, to make them infectious, the authors have surrounded them — with abundant details of time and place. And this abundance of detail makes these stories still more exclusive, scarcely understandable for all those who live outside the milieu the author describes. 현대 예술에서 두 번째 종류의, 훌륭한 보편적 일상의 예술의, 특히 언어 예술 및 음악에서, 예들을 들기는 훨씬 어렵다. 만일 내적인 내용에서 이런 범주에 놓여 질 수 있는 작품들 — 예로, Don Quixote, 몰리에르의 희극들, 디킨즈의 David Copperfield 및 Pickwick Papers, 고골과 푸쉬킨의 이야기들, 그리고 모파상의 몇 가지 작품들 —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러함에도 이들 작품들은, 전달하는 느낌들의 배타성에 의해서, 시간과 장소의 구체적 상세함 들의 과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내용의 빈곤함으로 보편적인 고대 예술(예를 들면,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의 예들과 비교하여, 대부분 그들 자신의 민족 혹은 심지어 그들 자신의 범주의 사람들에게만 오직 적용이 가능한 것들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끼고 그들 노예로 팔아 버렸다는 것; 포티파르의 아내가 젊은이를 유혹하고자 했던 것; 젊은이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그의 형제들에 대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벤자민, 그리고 나머지 모두들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는 것 — 이것들은 러시아의 농부에게, 중국인에게, 아프리카인에게, 아이에게, 노인에게, 교육받았거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에게 모두 열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토록 신중함으로 쓰여져 지극히 남아도는 설명들로부터 자유로워서 이야기는 독자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환경으로도 옮겨 질 수 있으며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고 감동적이다. 돈키호테의 혹은 몰리에르의 주인공들 (비록 몰리에르는 거의 가장 보편적이며 그러므로 현대에 가장 뛰어난 예술가이지만) 가장  의 느낌들은 그렇지 못하며, 피크위크와 그의 친구들의 것은 훨씬 못하다. 이들 느낌들은 매우 배타적이며, 전적으로 인간적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전염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작가들은 느낌들을 시간과 장소를 풍부하게 기술함으로써 포장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풍부한 서술이 이들 이야기들이 더욱 더 배타적이게 만들며, 작가가 묘사하는 환경 바깥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해될 수 없게 만든다.
In the narrative of Joseph there was no need to describe in detail, as is done nowadays, Joseph’s blood-stained clothes, Jacob’s dwelling and clothes, and the pose and attire of Potiphar’s wife when, straightening a bracelet on her left arm, she said, ‘Come to me,’ and so on, because the feeling contained in this story is so strong that all details except the most necessary ones — for instance, that Joseph went into the next room to weep — all details are superfluous and would only hinder the conveying of the feeling, and therefore this story is accessible to all people, it touches people of all nations, ranks, ages, has come down to our time, and will live on for thousands of years. But take the details from the best novels of our time and what will remain? 요셉의 이야기는, 포티파르의 아내가 왼 팔에 팔찌를 늘어뜨린 채, '나에게 오세요', 등등을 말할 때, 오늘날 행해지듯, 요셉의 피에 물든 의복, 야곱의 거처와 의복, 그리고 그녀의 자태와 의상을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안에 담긴 느낌은 너무나 강렬해서 가장 필요한 것들을 제외한 모든 설명들 , 예를 들면, 요셉이 울기 위해 옆 방으로 갔다는 것  — 은, 모든 설명들은 군더더기이며 오직 느낌의 전달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모든 민족들, 계급들, 연령들에게 감동을 주며, 우리 시대까지 전해져 왔고, 수 천년 동안 살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소설들에서 설명들을 들어 낸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Thus it is not possible to point to works of modern verbal art that fully satisfy the demand of universality. Even such as do exist are mostly spoiled by what is called realism and would better be called artistic provincialism. 그러므로 보편성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현대의 언어 예술 작품들을 가려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존재하는 것조차도 대부분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서 망가지고 있으며 예술적 지방주의라 불림이 나을 것이다.
In music the same thing occurs as in verbal art, and for the same reasons. Owing to a poverty of content, of feeling, the melodies of modern composers are strikingly vapid. And so, to enhance the impression produced by the vapid melody, modern composers heap every worthless melody with complex modulations, not only in their own national harmony, but modulations exclusively peculiar to a certain circle, to a certain musical school. A melody — any melody — is free and can be understood by anyone; but as soon as it is tied to a certain harmony and encumbered by it, it becomes accessible only to people who are accustomed to this harmony, and becomes completely alien not only to other nationalities, but also to people who do not belong to the circle of those who have accustomed themselves to certain forms of harmony. So music, like poetry, turns round in the same false circle. Worthless, exclusive melodies, to be made attractive, are encumbered with harmonic, rhythmic and orchestral complications, become thereby still more exclusive, and not only not universal, but not even national — that is, accessible only to some people and not to the whole nation. 음악 안에서도 언어 예술 안에서처럼, 동일한 이유들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용, 느낌의 빈곤으로 인해, 현대 작곡가들의 선율들은 놀랍게도 생기가 없다. 그리하여, 맥 빠진 선율이 만들어 내는 인상을 개선하기 위해, 현대 작곡가들은 저마다 가치 없는 멜로디에, 복잡한 조바꿈들을, 그들 자신의 민족적 화성 뿐만 아니라, 특정 범주, 특정한 음악 학파에 배타적으로 고유한 조바꿈들 안에 쌓아 둔다. 한 가지 선율은  — 어떤 선율이든 — 자유로우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화성에 매이게 되고 그것에 의해 제약을 받자마자, 그것은 오직 이 화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하게 되며, 다른 국적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특정한 형식의 화성에 적응되어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이질적이 된다. 그래서 음악은, 시문학처럼, 똑같이 위선적 범주에서 맴돈다. 가치 없고 배타적인 선율들은, 매력적으로 되기 위해서, 화성적, 리듬적 및 오케스트라적인 복잡성으로 거치적거리게 되며, 그리하여 훨씬 더 배타적이며, 보편적이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족적이지도 않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민족이 아니라 오직 일부 사람들에게만 이용 가능하게 된다.
In music, apart from marches and dances by various composers, which approximate to the demands of universal art, one can point only to the folk songs of various peoples, from Russian to Chinese; in learned music, to very few works — the famous violin aria of Bach, the E-flat major nocturne of Chopin, and perhaps a dozen other things, not whole pieces but selected passages from the works of Haydn, Mozart, Schubert, Beethoven, Chopin. [109] 음악에는, 다양한 작곡가들의 행진곡들 및 무곡들과는 달리, 보편적 예술의 요구들에 근접하는 것으로, 러시아로부터 중국까지 오직 다양한 민족들의 민요를 들 수 있다; 깊이 있는 음악에는, 매우 적은 수의 작품들 — 바하의 유명한 바이올린 아리아, 쇼팽의 내림 마 장조 야상곡, 및 아마도 십여 곡의 다른 것들, 전체 작품들은 아니지만 하이든, 모짜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쇼팽의 작품들로부터 선곡된 악절들 — 을 들 수 있다.
Although the same thing is repeated in painting as in poetry and music — that is, works of weak content are made more interesting by being supplied with thoroughly studied accessories of time and place, which endow these works with temporal and local interest but make them less universal — still, in painting, more than in other kinds of art, one can point to works that satisfy the demands of universal Christian art, that is, which express feelings accessible to all people. 비록 시문학 및 음악에서처럼 미술에서도 똑같은 것이 반복되지만 — 즉, 빈약한 내용의 작품들이 시간과 장소라는 세밀히 연구된 부가장치들을 공급받음으로써 더 흥미 있도록 만들어지며, 그것들이 이들 작품들에 세속적이며 지역적 흥미를 부여하지만 그것들이 덜 보편적이게 만든다 —  미술에선 여전히 다른 예술의 종류들에서보다 더 많이, 보편적인, 즉,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느낌들을 표현하는, 그리스도교적 예술의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다.
In the arts of painting and sculpture, so-called genre painting and statues, portrayals of animals, landscapes, caricatures of a content understandable to all, and various sorts of ornaments are universal in content. There are many such works in painting and sculpture (porcelain dolls), but the majority of these objects — various ornaments, for instance — are not considered art, or are considered art of an inferior sort. In reality, all such objects, if they sincerely convey the feeling of the artist (however insignificant it may seem to us) and are understandable to all people, are works of genuine good Christian art. 미술 및 조각 예술들, 소위 그림과 조상이란 장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내용의 동물에 대한 묘사들, 풍경화들, 풍자만화들 및 다양한 종류의 장식들은 내용면에서 보편적이다. 그림과 조각 (도자기 인형)에서 그러한 작품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들 대상들 대다수 — 다양한 장식품들을 예로 들면 — 는 예술로 여겨지지 않거나, 혹은 저속한 종류의 예술로 여겨진다. 사실에 있어서, 그런 모든 대상들은, 만일 그것들이 진지하게 예술가의 느낌을 전달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진정으로 선한 그리스도교적인 예술 작품들이다.
I fear that at this point I will be reproached that, while denying that the concept of beauty should constitute the subject of art, I contradict myself by recognizing ornaments as objects of good art. This reproach is unjust, because the artistic content of various decorations consists not in beauty but in the feeling of admiration, of delight, which the artist experienced in the combining of lines or colours and with which he infects the viewer. Art was, and is, and cannot be anything else but the infection by one person of another or others with a feeling experienced by the infector. Among these feelings there is the feeling of admiring what pleases the eye. Objects pleasing to the eye may please a small or a large number of people, and some may please everyone. Such are almost all ornaments. A landscape painting of some exceptional locale or a very special genre painting may not be pleasing to everyone, but ornaments from Yakut to Greek are accessible to everyone and evoke the same feeling of admiration in everyone, and therefore this neglected kind of art should be valued in Christian society more highly than exclusive, pretentious paintings and sculptures. 나는 이러한 점에서, 미의 개념이 예술의 주제를 구성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한편, 장식품들을 훌륭한 예술의 대상들로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모순에 빠트린다는 점에서 비난 받을까 두려워 한다. 이런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양한 장식품들의 예술적 내용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찬미의, 희열의 느낌에 있으며, 예술가는 선들 혹은 색상들을 조합함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보는 사람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염자에 의해 경험된 느낌으로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혹은 여타의 사람들의 감염이었고 그러하며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없다. 이들 느낌들 가운데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찬미하는 느낌이 있다. 눈에 즐거운 대상들은 적거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도 있고, 일부는 모두를 즐겁게 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거의 모두 장식품들이다. 일부 예외적인 장소를 그린 풍경화 혹은 매우 특별한 장르의 그림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쿠트에서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장식품들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찬미의 느낌을 불러낸다, 그러므로 이런 소홀히 여겨지던 예술의 종류도 배타적이며, 가식적인 그림들 및 조각들보다 그리스도교적인 사회에서는 훨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Thus there exist only two kinds of good Christian art; all the rest that does not fit into these two kinds should be recogn ized as bad art, which not only should not be encouraged, but should be banished, rejected and despised as art that does not unite but divides people. Such, in verbal art, are all dramas, novels and poems that convey churchly or patriotic feelings, as well as exclusive feelings proper only to the rank of the wealthy, idle people — feelings of aristocratic honour, satiety, tedium, pessimism, and refined, perverse feelings coming from sexual love, which are totally incomprehensible to the vast majority of people. 그리하여 선한 그리스도교 예술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종류에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모두는 악한 예술로 인식되어야 하며, 장려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시키는 예술로서 추방되고, 거부되며 경멸되어야 한다. 언어 예술에서, 그러한 것들은 교회적인 혹은 애국적인 느낌들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나태한 사람들의 계급에만 적합한 배타적인 느낌들 — 귀족적 명예, 충만감, 권태, 비관주의의 느낌들, 성욕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세련되고 왜곡적인 느낌들 — 을 전달하는 모든 드라마들, 소설들 및 시들이며, 그것들은 전적으로 방대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In painting, such are all falsely religious and patriotic pictures, as well as pictures representing the amusements and delight s of exclusive, wealthy and idle living; and such are all so-called symbolic paintings, in which the very meaning of the symbol is accessible only to persons of a certain circle; and, chiefly, all paintings of sensual objects, all that outrageous female nudity which fills all exhibitions and galleries. To the same kind belongs almost all concert and operatic music of our time, beginning with Beethoven — Schumann, Berlioz, Liszt, Wagner — the content of which is accessible only to people who have cultivated in themselves a morbid nervous excitability aroused by this artificial and exceptionally complex music. 그림에서, 그러한 것들은 모두 위선적인 종교적 및 애국적 그림들이며,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며, 부유하고 나태한 삶의 즐거움 및 환희를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소위 상징주의 그림들로서, 상징의 의미 자체가 오로지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며; 그리고, 대체적으로, 관능적 대상들을 그린 모든 그림들, 모든 전시회들 및 화랑들을 채우는 그 모든 과도한 여성 누드가 그런 것들이다.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연주회 및 오페라 음악으로, 베토벤 — 슈만,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 으로부터 시작되어서, 그 내용은 이런 인위적 및 예외적으로 복잡한 음악에 의해 야기되는 오로지 병적인 신경의 자극성을 스스로 양성한 사람들에게 오로지 해당되는 것이다.
‘What, the Ninth Symphony belongs to the category of bad art?’ I hear indignant voices exclaim. '뭐라고, 제 9번 교향곡이 악한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고?' 나는 분노한 목소리들이 외침을 듣는다.
‘Without any doubt,’ I reply. All t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 only in order to find a clear, reasonable criterion by which to judge the merits of works of art. And this criterion, coinciding with simple and common sense, unquestionably shows me that Beethoven’s symphony is not a good work of art. Of course, for people brought up in the adulation of certain works and their authors, for people whose taste is perverted precisely because they were brought up in this adulation, to acknowledge such a famous work as bad is astonishing and strange. But what is to be done with the indications of reason and common sense? '한치의 의심도 없소,'라고 나는 대답한다. 내가 기록한 모든 것은, 나는 오로지 명료하고, 타당한 기준을 찾아서 예술 작품들의 장점들을 판별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단순하고 평범한 인식과 일치하며, 의문의 여지 없이 나에게 베토벤의 교향곡은 선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특정 작품들 및 그 작가들에 대한 극도의 찬사 속에 자라난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그들이 이런 찬사 안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취향이 왜곡된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유명한 작품을 악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놀랍고 이상하다. 하지만 이성과 상식의 징표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Beethoven’s Ninth Symphony is considered a great work of art. To test this assertion, I first of all ask myself: does this work convey the highest religious feeling? And I reply in the negative, because music by itself cannot convey these feelings; and therefore I next ask myself: if this work does not belong to the highest order of religious art, does it have the other property of good art of our time — the property of uniting all people in one feeling; does it belong to universal everyday Christian art? And I cannot help answering in the negative, because not only do I not see how the feelings conveyed by this work could unite people who have not been especially brought up to be subject to this complex hypnosis, but I cannot even imagine a crowd of normal people who could understand anything in this long, intricate and artificial work but short fragments drowning in a sea of the incomprehensible. And therefore I must conclude, whether I will or no, that this work belongs to bad art. Remarkably, to the end of this symphony there is attached a poem by Schiller which, though not clearly, does express precisely the thought that feeling (Schiller speaks only of the feeling of joy) unites people and evokes love in them. Despite the singing of this poem at the end of the symphony, the music does not correspond to the thought of the poem, because it is exclusive music and unites not all but only certain people, singling them out from the rest.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단정을 시험하기 위해, 나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 본다: 이 작품은 최고의 종교적 느낌을 전달하는가? 그리고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음악 자체는 이런 느낌들을 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음으로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만일 이 작품이 종교적 예술의 최고의 등급에 속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 시대의 선한 예술로서 다른 속성 — 모든 사람을 하나의 느낌으로 연합하는 속성 —을 가지는가? 이것은 보편적인 일상의 그리스도교적 예술에 속하는가? 그리고 나는 부정으로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의해 전달된 느낌들이 이런 복잡한 최면에 종속되도록 특별히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는 심지어 이처럼 길고 복잡하며 인위적인 작품이면서 난해함의 바다에 빠진 짧은 단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무리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원하든 아니하든, 이 작품이 나쁜 예술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교향곡의 말미에 쉴러의 시가 첨부되어 있고, 비록 명백하지 않지만, 이 시는 느낌(쉴러는 오직 환희의 느낌만을 이야기한다)이 사람들을 연합하고 그들 안에 사랑을 불러내는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다. 교향곡의 끝 부분에 이 시를 노래함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시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타적 음악이며 전부가 아니라, 나머지로부터 선택된, 오직 일부 특정한 사람들만을 연합하기 때문이다.
In exactly the same way many, many other works of art that are considered great among the upper classes of our society are to be evaluated. Thus, by this one firm criterion are also to be evaluated the famous Divine Comedy, the Jerusalem Delivered, and the greater part of the works of Shakespeare and Goethe, as well as the various portrayals of miracles in painting, Raphael’s Transfiguration, and others. Whatever the object that passes for a work of art, and however it is praised by people, in order to find out its worth it is necessary to apply to it the question of whether the object belongs to genuine art or to the artistic counterfeits. Having recognized a given object, based on the token of infectiousness for at least a small circle of people, as belonging to the realm of art, it is necessary, based on the token of general accessibility, to decide the next question: does the work belong to bad, exclusive art, opposed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of our time, or to Christian art which unites people? Then, having recognized the object as belonging to true Christian art, it is necessary, according to whether the work conveys feelings coming from the love of God and one’s neighbour, or merely those simple feelings that unite all people, to assign it a place either in religious or in universal everyday art.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우리 사회의 상류 계급들 사이에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많고, 많은 다른 예술 작품들도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한 가지 굳건한 기준에 의해 또한 유명한 Divine Comedy, the Jerusalem Delivered, 그리고 쉐익스피어 및 괴테의 작품들 중 더 훌륭한 일부,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 다양한 기적의 묘사들, 라파엘의 Transfiguration, 및 기타 작품들도 평가되어야 한다. 예술 작품으로 간주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아무리 그것이 사람들에게 칭송되든지, 그것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그 대상이 참된 예술에 속하는지 아니면 예술의 모조품들에 속하는지의 질문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어진 대상을 인식하고, 적어도 작은 범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염성의 징표를 토대로, 일반적 해당성의 징표를 토대로, 다음 질문을 정해볼 필요가 있다: 작품이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의식(意識)에, 혹은 사람들을 연합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에 대치되는, 악하고, 배타적인 예술에 속하는가? 그렇다면, 그 대상이 참된 그리스도교적인 예술에 속한다고 인식하였다면, 작품이 하나님 및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느낌들을 혹은 모든 사람들을 연합하는 단순한 느낌들을 전달하는가에 따라서 종교적 혹은 보편적 일상적 예술에서 위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Only on the basis of such testing will we be able to single out from the whole mass of what passes for art in our society those objects which constitute a real, important, necessary spiritual nourishment, and separate them from all the harmful and useless art that surrounds us. Only on the basis of such testing will we be able to rid ourselves of the pernicious consequences of harmful art and avail ourselves of the influence of true and good art, which constitutes its purpose, an influence beneficial and necessary for the spiritual life of man and of mankind. 오직 그러한 시험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예술로 여겨지는 전체 덩어리로부터 참되며, 중요하고, 필요한 영적인 양분을 형성하는 그런 대상들을 골라내고, 우리들을 둘러싼 모든 해롭고 쓸모 없는 예술로부터 그것들을 분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러한 시험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해로운 예술의 해독을 끼치는 결과들을 제거하고 참되고 선한 예술의 영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예술의 목적, 즉, 사람의 그리고 인류의 영적 삶에 유익하며 필요한 영향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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