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i.com Homepage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Home] [Up] [Contents] [Preface] [Bibliographical Note] [A Note on the Text] [WHAT IS ART?]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XII  XIII  XIV  XV  XVI  XVII  XVIII  XIX  XX [CONCLUSION] [Appendix I] [Appendix II] [Notes]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TRANSLATED BY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XIV

   
I know that the majority of people who are not only regarded as intelligent but are indeed intelligent, capable of understanding the most difficult scientific, mathematical and philosophical reasonings, are very rarely capable of understanding a most simple and obvious truth, if it is such as requires that they admit that a judgement they have formed about something, sometimes with great effort, a judgement they are proud of, which they have taught to others, on the basis of which they have arranged their entire life — that this judgement may be wrong. And therefore I have little hope that the arguments I am presenting about the perversion of art and taste in our society will be, not accepted, but even seriously discussed, and yet I must speak out to the end what I have been ineluctably brought to by my study of the question of art. This study has brought me to the conviction that almost everything regarded as art, and good art, and the whole of art in our society, is not only not true and good art, nor the whole of art, it is not even art at all, but only a counterfeit of it. This statement, I know, is very strange, and seems paradoxical, and yet if we once recognize as true that art is a human activity by means of which some people convey their feelings to others, and is not the service of beauty, the manifestation of an idea, and so on, then it must needs be admitted. If it is true that art is an activity by means of which one man, having experienced a feeling, conveys it consciously to others, then we must inevitably admit that of all that among us is called the art of the upper classes — all these novels, stories, dramas, comedies, paintings, sculptures, symphonies, operas, operettas, ballets, etc., which pass for works of art — there is hardly one in a hundred thousand that originated in a feeling experienced by its author; the rest are manufactured works, artistic counterfeits, in which borrowing, imitation, effectfulness and diversion replace infection by feeling. That the proportion of true works of art to the number of these counterfeits is one to hundreds of thousands, or even less, can be proved by the following calculation. I read somewhere that there are 30,000 artist-painters in Paris alone. There must be the same number in England, the same in Germany, the same in Russia, Italy and some smaller countries combined. So that there should be altogether about 120,000 artist-painters in Europe, and as many musicians, and as many artistic writers. If these 300,000 people produce at least three works each per year (and many produce ten or more), then every year yields a million works of art. How many have there been in the last ten years, and how many in all the time since upper-class art separated from popular art? Millions, obviously. Yet who among the greatest connoisseurs of art has actually not received an impression from all these alleged works of art, but at least come to know of their existence? To say nothing of all the working people, who have no idea of these works, the people of the upper class cannot know even one-thousandth of all these works and do not remember the ones they did know. All these objects come in the guise of art, produce no impression on anyone, except at times an impression of amusement on an idle crowd of rich people, and disappear without a trace. To this it is usually replied that if it were not for this huge number of unsuccessful attempts, there would be no true works of art. But this reasoning is the same as if a baker, in reply to the reproach that his bread is no good, were to say that if it were not for a hundred ruined loaves, there would not be one that is well baked. It is true that wherever there is gold there is also a lot of sand; but this can in no way serve as a pretext for saying a lot of stupid things in order to say something intelligent. 내가 아는 바는, 지성적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지성적이며 가장 어려운 과학, 수학 및 철학적 추론들을 이해할 수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단순하며 명백한 진리를, 만일 그것이 예를 들자면 그들이 어떤 것에 대해, 때로는 엄청난 노력으로 형성한 판단이, 그들이 자랑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판단이, 그것으로 그들의 전체 인생을 안배해 왔다고 인정하는 것이 — 이런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요하는 것이라면 — 아주 거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예술과 취향의 왜곡에 대해 내가 제시하는 논거들이, 수용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심지어 심각하게 논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술의 문제에 관한 나의 연구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내가 맞이하게 된 것을 끝까지 말하고야 말 것이다. 이 연구는 나로 하여금 예술로, 그리고 훌륭한 예술로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예술 전체가, 진실하며 선한 예술이 아니며, 예술 전체가 아니며, 심지어 예술조차 아닐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모조일 뿐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하였다. 나도 알다시피, 이런 선언은 매우 이상하며,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예술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느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함에 의한 인간적인 활동이며, 아름다움의 추종이나 개념의 표현, 등등이 아니라는 것을 진실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만일 예술이 한 사람이, 느낌을 경험하고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라는 것이 참이라면,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상류 계급들의 예술이라 불리는 우리들 중에 있는 모든 것  — 이 모든 소설들, 단편들, 드라마들, 코미디들, 그림들, 조각들, 심포니들, 오페라들, 오페레타들, 발레들, 등, 이것들이 예술 작품들로 여겨지고 있다 — 에 관해서, 수십만 개 중에서 그것의 작가에 의해 경험된 느낌은 거의 하나도 없으며; 나머지는 제조된 작품들, 예술의 모조품들이며, 그것에서 차용, 모방, 효과 및 전환으로 느낌에 의한 감염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이들 모조품들의 숫자에 대한 진정한 예술 작품들의 비율은 수십만 개 중의 하나이거나, 심지어 더 적다는 것은 다음의 계산으로 증명될 수 있다. 나는 어디에선가 파리만해도 30,000명의 예술-화가들이 있다고 읽었다. 영국에도 동일한 수치일 것이며, 독일도 마찬가지, 러시아, 이탈리아 및 일부 작은 국가들을 합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에는 줄 잡아 120,000명의 예술 화가들이 있을 것이며, 그만큼의 음악가들, 그리고 그만큼의 예술 작가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들 300,000명의 사람들이 매년 적어도 세 개의 (많은 사람들은 열 개 이상을 만든다)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면, 매년 백만 개의 예술 작품들이 생산된다. 과거 10 년 동안 얼마나 많았으며, 상류 계급들의 예술이 대중 예술로부터 분리된 후 모든 기간 동안 얼마나 많았는가? 확실히 수백만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 감정가들 중에서 누가 소위 이 모든 예술 작품들로부터 인상을 받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겠는가? 이들 작품들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는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상류 계급 사람들은 심지어 이 모든 작품들의 천분의 일도 알 수 없으며 그들이 알았던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모든 물건들은 예술을 가장하여 나오며, 이따금 부유한 사람들 같은 한가한 군중들에게 즐거운 인상을 주는 외에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인상을 주지 않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에 대해 흔히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이토록 엄청난 숫자의 실패한 시도들이 없었다면, 참된 예술 작품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만일 어떤 빵 굽는 사람이, 그의 빵이 안 좋다는 비난에 대답하여, 망쳐버린 수백 개의 빵 덩어리들이 없었다면, 잘 구워진 한 개가 없을 것이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또한 많은 모래가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 말이 결코 어떤 지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 수 많은 멍청한 것을 말함에 대한 구실이 될 수 없다.
We are surrounded by works that are considered artistic. Thousands of lyrics, thousands of long poems, thousands of novels, thousands of dramas, thousands of paintings, thousands of musical compositions appear one after another. All the poems describe love, or nature, or the author’s state of mind, and all of them observe metre and rhyme; all the dramas and comedies are splendidly designed and performed by excellently trained actors; all the novels are divided into chapters, they all describe love, and contain affecting scenes, and describe true details of life; all the symphonies contain their allegro, andante, scherzo and finale, and they all consist of modulations and chords and are played by musicians trained to the point of refinement; all the paintings, in their gilt frames, vividly portray persons and accessories. But among these works of various kinds of art there is one in a hundred thousand which is not simply a little better than the others, but differs from all the rest in the way a diamond differs from glass. The one cannot be bought for any money, so precious it is; the rest not only have no value but are of negative worth, because they deceive and pervert taste. And yet superficially, for a man with a perverted or atrophied sense of understanding of art, they are exactly the same. 우리는 예술적이라고 여겨지는 작품들에 둘러 싸여 있다. 수천의 서정시들, 수천의 장시들, 수천의 소설들, 수천의 드라마들, 수천의 그림들, 수천의 음악 작곡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모든 시들은 사랑 혹은 자연, 혹은 작가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고, 그 모든 것들은 운율과 압운을 준수한다; 모든 드라마들 및 코미디들은 화려하게 디자인되고 뛰어나게 훈련된 배우들에 의해 공연된다; 모든 소설들은 장들로 나뉘어지고, 그것들은 모두 사랑을 묘사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담으며, 삶에 대한 참으로 세세한 것까지 묘사한다; 모든 심포니들은 그것들에 알레그로, 안단테, 스케르쪼 및 피날레를 담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변조들 및 화음들로 이루어지며, 세련된 경지까지 훈련된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된다; 모든 그림들은, 금테를 두른 틀 안에, 사람들 및 부속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이들 다양한 종류의 예술 작품들 중에는 다른 것들보다 단순히 약간 나은 것이 아니라, 다이아몬드가 유리와 다른 것처럼 모든 나머지와 다른 수십만 개 중의 하나가 있다. 그 하나는 그것이 너무나 귀중한 것이라서 어떤 돈으로도 사들일 수 없다; 나머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취향을 속이고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천박한 점에서, 왜곡되었거나 마비된 예술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것들은 정확히 같은 것이다.
The difficulty of recognizing artistic works in our society is also increased by the fact that in false works the superficial worth is not only no worse but is often better than in true works; often the counterfeit strikes us more than the true work, and the content of the counterfeit is more interesting. How to discriminate? How to find this one work, not differing in any way superficially, among the hundreds of thousands of works deliberately made to resemble the true one perfectly? 우리 사회에서 예술적인 작품들을 인식함의 어려움은 또한 위선적인 작품들에서 인위적인 가치는 더 악할 뿐만 아니라 종종 참된 작품들 안에서 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높아진다; 가끔 모조품이 참된 작품보다 더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모조품의 내용은 더 흥미롭다.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떻게 이 한 작품을, 외관상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의도적으로 참된 것을 완전히 닮도록 만든 수십만 개의 작품들 중에서 찾아낼 것인가?
For a man of unperverted taste, a labouring man, not a city-dweller, this is as easy as it is for an animal with an unspoiled scent to find, among thousands of trails in forest or field, the one it needs. An animal will unerringly find what it needs; so, too, a man, if only his natural qualities are not perverted in him, will unerringly choose out of thousands of objects the true work of art that he needs, that infects him with the feeling experienced by the artist; but this is not so for people whose taste has been ruined by their upbringing and life. The sense of artistic perception is atrophied in these people, and in evaluating works of art they must be guided by reasoning and examination, and these reasonings and examinations ultimately confuse them, so that the majority of people in our society are totally unable to distinguish a work of art from the crudest counterfeit. People spend long hours sitting in concerts and theatres, listening to the works of the new composers, and they consider it their duty to read the novels of the famous new novelists, and to look at paintings that depict either something incomprehensible or the same things over and over — which they see much better in reality; and above all they consider it their duty to admire it all, fancying that these are all works of art, and they walk right past the true works of art, not only without paying attention, but even with scorn, simply because these works are not counted as works of art in their circle. 왜곡되지 않은 취향의 사람, 노동하는 사람, 도시 거주자가 아닌 사람에게, 이것은 동물이 단순한 냄새로, 숲 속이나 들판의 수천의 흔적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찾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동물은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만일 그의 천부적 재질들이 그의 안에서 왜곡되지 않는다면, 수천 가지의 물건들 중에서 그가 필요로 하는 참된 예술 작품을 골라 낼 것이며, 그것이 예술가에 의해 경험된 느낌으로 그를 전염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교육 및 인생에 의해 취향이 손상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렇지 않다. 예술적 인식에 대한 지각은 이 사람들 안에서 마비되며, 그리고 예술 작품들을 평가함에서 그들은 추론 및 시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하며, 이들 추론 및 시험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천박한 모조품들로부터 가려내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연주회장 및 극장들에 앉아서 보내며, 새로운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들은 유명하고 새로운 소설가들의 소설들을 읽는 것을,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혹은 똑같은 것을 되풀이 해서 묘사하는 그림들을 바라보는 것 — 사실 그들은 그것을 훨씬 잘 보게 된다 — 을 의무로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찬미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기고, 이것들이 모두 예술 작품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들은 참된 예술 작품들을 바로 지나쳐 걸으며,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경멸하는데, 단순한 이유인 즉, 그들의 범주에서 이들 작품들은 예술 작품들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The other day I was returning home from a stroll in a depressed state of mind. As I approached the house, I heard the loud singing of a large circle of peasant women. They were greeting and honoring my daughter, who has married and came for a visit. This singing, with shouts and banging on scythes, expressed such a definite feeling of joy, cheerfulness, energy, that without noticing it I became infected by it, and approached the house more cheerfully, reaching it quite cheered up and merry. I found that everyone in the house who had been listening to this singing was in the same excited state. That very evening an excellent musician, famous for his performing of classical pieces, and especially of Beethoven, came to visit us and played Beethoven’s sonata Opus 101. 어느 날 나는 우울한 마음에 산책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 다가가다가 농부 여자들이 많이 모여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나의 딸을 환영하며 경의를 표했는데, 그녀는 결혼하여 방문하러 왔었다. 이 노래는, 소리치고 낫을 두드리면서 그토록 확실한 환희, 유쾌함 및 에너지를 표현하여서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것에 감염되었으며, 더 쾌활하게 집으로 다가 갔으며, 도착해서는 무척 기운이 났으며 즐거웠다. 나는 집 안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 저녁 한 훌륭한 음악가가, 그는 클래식 소품들, 그리고 특히 베토벤의 것에 대한 그의 연주로 유명하던 터에, 우리를 방문하여 베토벤의 소나타 작품 101번을 연주했다.
I consider it necessary to observe, for those who would explain my opinion of this sonata of Beethoven by my non-understanding of it, that, being very susceptible to music, I understood all that others understand in this sonata, as well as in other works of Beethoven’s late period, in the same way as they do. For a long time I had been priming myself so as to admire these formless improvisations which make up the content of the works of Beethoven’s late period, but the moment I treated the matter of art seriously and compared the impression I get from the works of Beethoven’s late period with the pleasant, clear and strong musical impression produced, for example, by the melodies of Bach (his arias), Haydn, Mozart, Chopin — where these melodies are not encumbered by complications and adornments — or of Beethoven himself in his early period, and above all with impressions received from Italian, Norwegian and Russian folk songs, from Hungarian czardas, [93] and other such simple, clear, strong things, then that certain vague and almost morbid excitement from the works of Beethoven’s late period, which I had artificially called up in myself, was at once destroyed. 이 베토벤의 소나타에 대한 나의 의견에 대해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음악에 매우 감수성이 있어서, 이 소나타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최근 시기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오랫동안 나는 베토벤의 최근 시기의 작품들의 내용을 구성하는 이들 형식이 없는 즉흥곡들을 찬미하고자 예비 지식을 준비해왔지만, 내가 예술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베토벤의 최근 시기의 작품들로부터 내가 얻는 인상을, 예를 들면, 바하 (그의 아리아들), 하이든, 모짜르트, 쇼팽의 — 여기서 이들의 선율들은 복잡함 및 꾸밈들로 채워져 있지 않다 — 혹은 베토벤 자신의 초기의 선율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쾌하고, 명료하며 강력한 음악적 인상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및 러시라 민요들로부터, 헝가리의 차르다시, 그리고 그와 같은 다른 단순하며, 명료하고, 강력한 것들로부터 받은 인상들과 비교하자마자, 베토벤의 최근 시기의 작품들로부터 나온 그처럼 확실히 모호하며 거의 병적이던 흥분이, 그것은 내가 나 자신 안에 불러 내었던 것이지만, 당장 소멸되어 버렸다.
When the performance was over, everyone present, though it was obvious that they were all bored, eagerly praised the profound work of Beethoven as they thought they should, not forgetting to mention that they had not understood this later period before, but now saw that it was the very best. And when I allowed myself to compare the impression produced on me by the peasant women’s singing, an impression experienced by everyone who had heard it, with that of this sonata, the lovers of Beethoven only smiled scornfully, considering it unnecessary to respond to such strange talk. 연주가 끝났을 때,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비록 그들 모두가 지루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심오한 베토벤의 작품을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로 열렬히 칭송했으며, 전에는 이 후기의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나서서 농부 여자들의 노래가 내게 만들어 준 인상을,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경험된 인상을, 이 소나타의 인상과 비교하였을 때, 베토벤의 찬미자 들은 단지 경멸하듯 웃었으며, 그런 이상한 대화를 상대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And yet the women’s song was true art, conveying a definite, strong feeling. While the 101st sonata of Beethoven [94] was only an unsuccessful attempt at art, containing no definite feeling and therefore not infecting one with anything. 하지만 여자들의 노래는 참된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실하며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베토벤의 소나타 101번이 단지 예술을 향한 실패에 끝난 시도였으며, 그것은 아무런 확실한 느낌도 담지 않았고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것으로도 전염시키지 않았다. 
For my work on art I have spent this winter reading, diligently and with great effort, the famous novels and stories of Zola, Bourget, [95] Huysmans and Kipling, which are praised all over Europe. And at the same time, in a children’s magazine, I chanced upon a story by a completely unknown writer about the preparations for Easter in a poor widow’s family. [96] The plot of the story is that the mother, having with difficulty obtained some white flour, poured it out on the table to be kneaded and went to get some yeast, asking the children not to leave the cottage and to watch over the flour. The mother left and the neighbours’ children came running to the window, shouting for the ones in the cottage to come out and play. The children, forgetting their mother’s order, run outside and start playing. The mother comes back with the yeast and finds a mother hen on the table throwing what is left of the flour to the dirt floor for her chicks to peck up from the dust. The mother, in despair, scolds the children. The children cry. The mother feels sorry for the children, but there is no more white flour, and so, to cheer them up, the mother decides to make a kulich [97] from sifted rye flour, glaze it with egg-white, and put eggs around it. ‘Rye bread’s my delight — it’s the grandpa of white’ — the mother recites this proverb to the children to comfort them for not having a kulich made from white flour. And the children suddenly go from despair to joyful rapture, each one repeating the proverb, and they look forward to the kulich with all the more merriment. 예술에 관한 나의 작업을 위해 나는 이번 겨울을, 부지런히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졸라, 부제, 휘스만, 및 키플링의 유명한 소설들 및 단편들을 읽으며 보냈는데, 그것들은 전 유럽을 통해서 예찬 받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아동 잡지에서, 나는 우연히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쓴, 한 가난한 과부의 가정의 부활절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이야기의 구성은 어머니가, 어렵사리 약간의 밀가루를 구했으며, 그것을 반죽하기 위해 테이블에 쏟아 붇고 약간의 이스트를 구하러 가면서, 아이들에게 오두막집을 떠나지 말고 밀가루를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어머니는 나갔고 이웃의 아이들이 창문으로 달려와서 오두막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나와서 놀자고 소리쳤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당부를 잊어 버리고, 바깥으로 달려나가 놀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이스트를 가지고 돌아오고 엄마 암탉이 테이블에 올라서 놓아 둔 밀가루를 더러운 바닥으로 그 병아리들이 먼지를 내며 쪼아 먹도록 내던지는 것을 발견한다. 어머니는, 실의에 차서, 아이들을 꾸짖는다. 아이들이 운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느끼지만, 하얀 밀가루는 더 이상 없고, 그래서,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호밀 가루를 체질하여 쿨리치를 만들기로 하고, 그것에 달걀 흰자위를 바른다, 그리고 그것의 둘레에 계란을 놓는다. '호밀 빵은 나의 즐거움 — 그것은 할머니의 하얀 빵' — 어머니는 이 속담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한다, 쿨리치를 하얀 밀가루로 만들지 못한데 대해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러자 아이들은 갑자기 실망에서 벗어나 즐거워 외치고, 저마다 그 속담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 한층 즐거움으로 쿨리치를  기다린다.
And what then? The reading of the novels and stories of Zola, Bourget, Huysmans, Kipling and others, with the most provoking subjects, did not touch me even for a moment, but I was vexed with the authors all the time, as one is vexed with a man who considers you so naive that he does not even conceal the method by which he wants to catch you. From the first lines you see the intention behind the writing, and all the details become superfluous — you feel bored. Above all, you know that the author never had any other feeling than the desire to write a story or a novel. And therefore no artistic impression results from it. Yet I could not tear myself away from the unknown author’s story about the children and the chicks, because I immediately became infected by the feeling which the author had obviously lived, experienced and conveyed. 그리고 어떤가? 졸라, 부제, 휘스만, 키플링 및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 및 단편들에 대한 독서는, 가장 성가시게 하는 주제들을 지니고 있어서, 잠시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작가들에게 화가 났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우리를 너무 순진하다고 여김으로써 그가 심지어 우리를 붙들어 두기를 원하는 방법조차 숨기지 않기에 화를 내는 것과 같다. 당신은 첫째 행들에서 글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알며, 모든 상세함이 과잉이 된다 —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단편이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 외에 결코 아무런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무런 예술적 인상이 그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과 병아리들에 대한 단편을 쓴 무명의 작가로부터 나 자신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즉시 명백히 그 작가가 살았고, 경험했으며 전달한 느낌에 의해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In Russia we have the painter Vasnetsov. [98] He painted the icons for the Kiev cathedral; everyone praises him as the founder of some sort of new Christian art of a lofty sort. He worked for decades on these icons. He was paid tens of thousands of roubles. And all these icons are bad imitations of imitations of imitations, and do not contain one scintilla of feeling. And this same Vasnetsov drew an illustration for Turgenev’s story The Quail’ (which tells of how a father killed a quail in his son’s presence and then felt sorry for it), portraying the sleeping boy, with a protruding upper lip, and above him, like a dream, the quail. And this illustration is a true work of art. 러시아에 바스네초프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키에프 성당의 성상들을 그렸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숭고한 종류의 일종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예술의 창시자로 칭송한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 성상들을 만들었다. 그는 수만 루블을 지불 받았다. 그리고 이 모든 성상들은 모방의 모방의 조잡한 모방들이었으며, 티끌만큼의 느낌도 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동일인 바스네초프는 뚜르게네프의 단편 '메추라기'(이 이야기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메추라기를 죽였는지 그리고 그리고 그것에 미안해 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를 그렸고, 그것은 잠자는 아이를 묘사하는데, 튀어나온 위 입술, 그리고 그의 위에는, 마치 꿈과 같이, 메추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삽화는 참된 예술 작품이다.
In the English Academy, two paintings come next to each other. One is by J. C. Delmas and portrays the temptation of St Anthony. The saint is on his knees, praying. Behind him stand a naked woman and some animals. One can see that the artist liked the naked woman very much, but could not have cared less about Anthony, and that the temptation not only does not frighten him (the artist) but is, on the contrary, highly agreeable to him. And therefore, if there is art in this painting, it is very bad and false.

In the same catalogue there is, next to this, a small painting by Langley, [99] depicting a wandering beggar boy who has apparently been asked in by a woman who feels sorry for him. The boy, tucking his bare feet pathetically under the bench, is eating; the woman is watching, probably wondering if he wants more; and a girl of about seven, her head propped in her hand, is watching attentively, seriously, not taking her eyes from the hungry boy, obviously realizing for the first time what poverty is, what inequal­ity among people is, and for the first time asking herself questions: why is it that she has everything, while this boy is barefoot and hungry? She feels both pity and joy. And she loves the boy and the good . . . And one feels that the artist loved this girl and what she loved. And this picture, by a painter who, I believe, is little known, is a beautiful and true work of art.

영국 예술원에는, 두 그림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J.C. 델마스의 것으로 성 안토니의 유혹을 묘사한다. 성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옷 벗은 여자와 어떤 동물들이 있다. 우리는 예술가가 옷 벗은 여자를 매우 좋아 했지만, 하지만 안토니에 대해 관심을 덜 가질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유혹은 그 (예술가)를 놀라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에게 매우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그림에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천박하며 위선적이다. 동일한 카탈로그, 이 옆에는 랭리의 조그만 그림이 있는데, 떠돌이 거지 소년을 묘사하는데, 그는 그를 가엽게 여기는 한 부인에 의해 명백히 안으로 들어 오라는 청을 받는다. 그 소년은, 그의 맨 발을 벤치 밑에 병적으로 밀어 넣은 채 먹고 있고, 부인은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그가 달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약 일곱 정도의 소녀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데, 주의 깊고, 진지하게, 배고픈 소년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데, 분명히 가난이 무엇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닫고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 이 소년은 맨발에 배가 고픈가? 그녀는 연민과 동시에 환희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소년과 선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가 이 소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느낀다. 그리고 이 그림은, 내가 믿기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에 의한 것이지만, 아름답고 참된 예술 작품이다.
I remember seeing Rossi’s performance of Hamlet, [100] in which the tragedy itself and the actor playing the leading role are considered by our critics to be the last word in dramatic art. And yet, during the whole time of the performance, I experienced both from the content of the play and from its performance that special suffering produced by false simulacra of artistic works. Recently I also read an account of the theatre of a savage people, the Voguls. [101] One of those who were present describes the following performance: one big Vogul and another small one, both dressed in reindeer skins, represent a female reindeer and her calf. A third Vogul represents a hunter with a bow and snowshoes; a fourth imitates a bird’s song, warning the reindeer of danger. The drama consists of the hunter following the tracks of the mother reindeer and her calf. The deer run off the scene and come running back. The performance takes place in a small yurt. The hunter gets closer and closer to his quarry. The calf is worn out and clings to its mother. The mother stops to rest. The hunter catches up with them and takes aim. At that moment the bird peeps, warning the deer of the danger. The deer flee. Again the pursuit, again the hunter approaches, overtakes them, and shoots his arrow. The arrow hits the calf. Unable to run, the calf clings to its mother, and the mother licks its wound. The hunter sets another arrow to his bow. The spectators, according to the narrator’s account, sit stock still; one hears deep sighs and even weeping. And I felt, from the description alone, that this was a true work of art. 나는 로시의 햄릿 공연을 본 것을 기억하며, 이 작품에서 비극 자체 그리고 주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는 우리의 비평가들이 여기는 극 예술의 마지막 화두다. 그리고 하지만, 전체 공연 내내, 나는 연극의 내용으로부터 그리고 그 공연으로부터 예술적인 작품들에 대한 위선적 모방에 의해 생겨나는 특이한 고통을 경험했다. 근래에 나는 또한 야만인, 보걸의 상연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참석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다음의 공연을 묘사한다: 덩치가 큰 보걸과 작은 보걸, 둘다 사슴 가죽을 입었고 암 사슴과 아기 사슴을 나타낸다. 셋째 보걸은 활과 눈 신발을 가진 사냥꾼을 나타낸다; 넷째는 새의 노래를 흉내 내며 사슴에게 위험을 알린다. 드라마는 사냥꾼이 어미 사슴과 아기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으로 구성된다. 사슴은 막을 뛰어 나갔다가 다시 달려 온다. 공연은 조그만 천막 집에서 이루어 진다. 사냥꾼은 그의 사냥감에 점점 가까워 진다. 아기 사슴은 지쳐서 어미에 매달린다. 어미는 휴식하고자 멈춘다. 사냥꾼은 그들을 따라잡고 그들을 겨냥한다. 그 순간 새가 쳐다 보고서, 사슴에게 위험을 알린다. 사슴은 달아난다. 다시 추적이 시작되고, 다시 사냥꾼은 다가 오며, 그들을 따라 잡는다, 그리고 그의 화살을 날린다. 화살이 아기 사슴을 맞힌다. 달릴 수 없어서 아기 사슴은 어미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어미 사슴은 상처를 핥는다. 사냥꾼은 다른 화살을 활에 놓는다. 구경꾼들은 ,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르면, 굳은 듯 앉아 있다; 어떤 이는 한숨을 쉬고 심지어 흐느낀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설명만을 들었는데도, 이것이 참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What I am saying will be taken as a mad paradox, at which one can only be amazed, and yet I cannot help saying what I think — namely, that people of our circle, of whom some write verses, stories, novels, operas, symphonies, sonatas, paint various sorts of pictures, make sculptures, while others listen to them and look at them, and still others evaluate and criticize it all, argue, denounce, triumph, erect monuments to each other, and have done so over the course of several generations, that all these people, artists, public, and critics, with very few exceptions, have never, save in early childhood and youth, before they heard any reasoning about art, experienced that simple feeling, familiar to the simplest man and even to a child, of being infected by the feelings of another, which makes us rejoice over another’s joy, grieve over another’s grief, merge our souls with another’s, and which constitutes the essence of art, and that therefore these people not only cannot distinguish true art from its counterfeits, but always mistake the worst and most false for genuine art, without noticing the genuine, because counterfeits are always more flashy, while true art is modest. 내가 말하는 것은 정신 나간 역설로 여겨질 것이며,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사람들은 오직 놀라겠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 즉, 우리 범주의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운문들, 단편들, 소설들, 오페라들, 심포니들, 소나타들을 쓰고, 다양한 종류의 그림들을 그리고, 조각들을 만들며,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에 청취하며 그것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평하고, 비난하며, 승리에 취하고, 서로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며,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그렇게 해왔다는 것, 이 모든 사람들, 예술가들, 대중들, 그리고 비평가들, 지극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초기 어린 시절 및 청년기를 빼고는, 이전에 결코 예술에 관한 어떤 추론을 들어 보지 못했으며, 단순한 느낌, 가장 단순한 사람에게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에게도 친숙한 느낌, 즉, 다른 사람의 느낌들에 의해 전염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다름 사람의 환희를 즐기도록, 다른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도록, 다른 사람의 영혼에 우리의 영혼을 결합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 하지만, 진실된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언제나 가장 최악이며 가장 위선적인 것을 진정한 예술로 오인한다는 것, 왜냐하면 모조품들은 언제나 더욱 현란하며, 반면에 참된 예술은 수수하기 때문이라는 것 —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Home] [Up] [Contents] [Preface] [Bibliographical Note] [A Note on the Text] [WHAT IS ART?]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XII  XIII  XIV  XV  XVI  XVII  XVIII  XIX  XX [CONCLUSION] [Appendix I] [Appendix II] [Notes]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Jesusi.com Homepage



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4/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