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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TRANSLATED BY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X

   
As a result of the unbelief of people of the upper classes, the art of these people became poor in content. But, besides that, while becoming more and more exclusive, it became at the same time more and more complex, fanciful and unclear. 상류 계급 사람들의 불신앙의 결과로서, 이 사람들의 예술은 내용이 저하되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배타적이 되어가는 가운데, 그것은 동시에 더욱더 복잡하고, 비현실적이며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갔다.
When an artist of the whole people — such as Greek artists or the Jewish prophets once were — created his works, he naturally strove to say what he had to say in such fashion that his work would be understood by all people. But when an artist created for a small circle of people who lived in exceptional conditions, or even for one person and his courtiers, for a pope, a cardinal, a king, a duke, a queen, a king’s mistress, he naturally sought only to influence these people who were known to him and who lived in certain conditions with which he was familiar. And this easier way of calling up feelings pushed the artist involuntarily towards expressing himself in allusions unclear to everyone else and comprehensible only to the initiate. First of all, one could say more that way, and, secondly, this manner of expression contained within itself, even for the initiate, a certain special charm of obscurity. This manner of expression, consisting of euphemisms, mythological and historical allusions, came into use more and more, and seems to have reached its extreme limits recently in so-called decadent art. Recently, not only have vagueness, mysteriousness, obscurity and inaccessibility to the masses been considered a merit and a condition of the poeticality of artistic works, but so, too, have imprecision, indefiniteness and ineloquence. 전체 사람들의 예술가 — 옛날에 있었던 그리스 예술가들 혹은 유태인 선지자들처럼 — 가 그의 작품들을 만들었을 때, 그는 당연히 그의 작품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외적인 상황들에서 사는 조그만 범주의 사람들을 위해, 혹은 한 사람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교황, 추기경, 왕, 군주,여왕, 왕비를 위해 만들었을 때, 그는 당연히 오직 그에게 알려져 있으며 그가 친밀한 특정 상황들 안에 사는 이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추구하였다. 그리고 느낌들을 불러내는 이런 더 쉬운 방법은 예술가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게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없으며 오직 회원들에게만 납득될 수 있는 암시들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쪽으로 밀어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방법으로 더 많이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며, 둘째로, 이런 표현 방식은 심지어 회원들에게도 그 자체 안에서 모호함 같은 어떤 특별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이런 표현 방식은, 완곡어법들, 신화적 및 역사적 암시들로 구성되어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게 되었고, 최근에 소위 데카당 예술에서 그 극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최근 들어서 민중들을 향한 모호함, 신비함, 애매함 및 난해함이 예술적 작품들의 시성의 장점이자 현상으로 여겨져 왔을 뿐만 아니라, 부정확함, 불확정성 및 눌변도 그러했다.
Théophile Gautier, [56] in his preface to the famous Fleurs du Mal, says that Baudelaire rid his poetry, as far as possible, of eloquence, passion, and a too exactly copied truth — ‘‘leloquence, la passion, et la verité calquée trop exactement’. 디오필 구띠에는, 그의 유명한 Fleurs du Mal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보들레르는 그의 시에서 가능한 한 웅변, 열정, 그리고 너무나 정확히 닮은 진리를 제거했다고 한다, ‘l’eloquence, la passion, et la verité calquée trop exactement’.
And Baudelaire did not only say this, but also proved it in his poems, and still more so in the prose of his Petits poèmes en prose, the meaning of which must be puzzled out like a rebus, and the majority of which remain unriddled. 그리고 보들레르는 이것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들에서, 더 나아가서 그의 산문 Petits poèmes en prose에서  이것을 증명했으며, 그 의미는 수수께기처럼 풀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풀 수 없는 체로 있다.
The poet Verlaine, following after Baudelaire, and also considered great, even wrote a whole Art poétique, in which he advises writing like this: 보들레르 뒤를 이어서 훌륭하다고 여겨진 시인 베르렌은 심지어 대단한 Art poétique을 썼으며, 여기서 그는 이렇게 쓸 것을 권고한다:
   

De la musique avant toute chose,

Et pour cela préfere l’Impair

Plus vague et plus soluble dans l’air,

Sans rien en lui qui pèse ou qui pose.

무엇보다 음악은,
그리고 그것은 불균형을 좋아하며,
공기 속에 더 희미하고 더 쉽게 녹으며,
그 안에 무겁거나 당길 것이 없다.

Il faut aussi que tu n’ailles point

Choisir tes mots sans quelque méprise:

Rien de plus cher que la chanson grise

Où l’Indécis au Précis se joint.

그리고 또 당신은 아무런 모욕 없이
당신의 말들을 골라서는 안 된다:

비틀거리는 노래보다 귀한 것은 없으니
거기엔 정확한 본능이 엮여 있다.

And further on:

그리고 나아가서:

De la musique encore et toujours!
Que ton vers soit la chose envolée
Qu’on sent qui fuit d’une âme en allée
Vers d’autres cieux à d’autres amours.

음악은 다시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시구들이 날개가 되어
다른 하늘 안에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나는 영혼으로 날아감을 느끼게 한다.

Que ton vers soit la bonne aventure
Éparse au vent crispé du matin
Qui va fleurant la menthe et Ie thym .. .
Et tout Ie reste est littérature. [57]

당신의 시구는 행운이 되어
싸늘한 아침 바람에 흩어져
민트와 타임 향을 맡으며 간다...
그러면 나머지 모두는 문학이라.

After these two come Mallarmé,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of the young poets, who says directly that the charm of a poem consists in our having to guess its meaning, that there should always be some riddle in a poem: 그리고 이들 두 사람 다음으로 말라메가 등장하며, 그는 젊은 시인들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그는 시의 매력은 우리가 그 의미를 추측해야 함에 있으며, 시에는 언제나 약간의 수수께끼가 존재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Je pense qu’il faut qu’il n’y ait qu’allusion. La contemplation des objets, l’image s’envolant des rêveries suscitées par eux, sont le chant: les Parnassiens, eux, prennent la chose entièrement et la montrent; par là ils manquent de mystère; ils retirent aux esprits cette joie délicieuse de croire qu’ils creent. Nommer un objet, c’est supprimer les trois quarts de la jouissance du poète qui est faite du bonheur de deviner peu à peu; le suggérer voila le rêve. C’est le parfait usage de ce mystère qui constitue le symbole: évoquer petit à petit un objet et en dégager un état d’âme par une série de déchiffrements.

. . . Si un être d’une intelligence moyenne et d’une prépara­tion littéraire insuffisante ouvre par hasard un livre ainsi fait et pretend en jouir, il y a malentendu, il faut remettre les choses à leur place. Il doit y avoir toujours énigme en poésie, et c’est le but de la littérature; il n’y en a pas d’autre — d’évoquer les objets. [58]

나는 오직 암시 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상들에 대한 감상은, 그것들이 불러내는 공상들 속에 스쳐가는 영상은,  노래다: 시인들은, 그들의 역할로서, 사물을 전체로 면서 그것을 드러낸다; 결국 그것들은 신비가 결여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들에서 그것들이 창조하고 있다고 믿는 달콤한 즐거움을 앗아 간다. 대상에 이름을 정하는 것은 조금씩 추측해 보는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시인의 즐거움의 사분의 삼을 억누르는 것이다; 암시 — 그것은 바로 꿈이다.

상징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신비의 완벽한 사용이다: 대상을 조금씩 불러내고 일련의 해독들을 통해 그로부터 마음의 상태를 해방시키는 것:

... 만일 보통의 지성과 충분하지 않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 이렇게 지어진 책을 우연히 열어 보고 그것을 즐기려 시도한다면, 오해가 존재하며, 대상들이 반드시 제자리에 놓여져야 한다. 시에는 언제나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의 목적이다; 다른 것 — 대상들을 불러내는 것 — 외는 없다.

Thus, among the new poets, obscurity is made a dogma, as the French critic Doumic, who has yet to recognize the truth of this dogma, quite correctly says: ‘Il serait temps aussi de finir avec cette fameuse théorie de l’obscurite que la nouvelle ecole a elevee en effet à la hauteur d’un dogme. [59] 그리하여, 새로운 시인들  사이에서, 모호함은 신조로 되어 있으며, 프랑스 비평가 두미는, 이미 이런 신조의 진면목을 인식하였으므로, 아주 정확히 말한다: '우리는 또한 사실상 새로운 학파로서 신조의 위치로 격상되어 버린 이런 유명한 모호함의 이론과는 절교해야 할 때다.'
But it is not only French writers who think this way.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 작가들 뿐만이 아니다.
The poets of all other nationalities think and act in the same way: Germans, Scandinavians, Italians, Russians and Englishmen; all modern artists in all branches of art think in the same way: in painting, in sculpture and in music. Guided by Nietzsche and Wagner, artists of modern times think that there is no need for them to be understood by the crude masses, that it is enough for them to evoke poetic states in ‘the best nurtured men’, to use the expression of one English aesthetician. [60] 다른 모든 국적들의 시인들도 똑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독일인들, 스칸디나비아인들, 이탈리아인들, 러시아인들 및 영국인들; 그리고 모든 예술 분야들의 모든 현대 작가들은 동일하게 생각한다: 미술에서, 조각에서 그리고 음악에서. 니체와 바그너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그것들이 무식한 대중들에 의해 이해될 필요가 없다고, 즉, 어떤 영국 미학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들이 '최고로 양육된 사람들' 안에 시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족하다고 생각한다.
So that what I say may not seem unsubstantiated, I will cite at least a few examples here of French poets who are in the forefront of this movement. The name of these poets is legion.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여기에 이런 움직임의 전방에 있는 프랑스 시인들의 적어도 몇 예들을 인용할 것이다. 이들 시인들의 이름은 무수하다.
I have chosen the new French writers, because they express the new trend in art more clearly, and the majority of Europeans imitate them. 나는 프랑스 신진 작가들을 골라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명확하게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표현하며, 유럽인들 대부분이 그들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Besides those whose names are already regarded as famous, such as Baudelaire and Verlaine, the following are the names of some of these poets: Jean Moreas, Charles Morice, Henri de Régnier, Charles Vignier, Adrien Romaille, René Ghil, Maurice Maeterlinck, C. Albert Aurier, Remy de Gourmont, Saint-Pol-Roux le Magnifique, Georges Rodenbach, Comte Robert de Montesquiou-Fezensac. These are symbolists and decadents. Then come the Magi: Josephin Peladan, Paul Adam, Jules Bois, M. Papus et al. [61] 보들레르 및 베를렌처럼, 이름들이 이미 유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외에, 다음은 몇몇 이런 시인들의 이름이다: 장 모레아, 샤를 모리스, 앙리 드 레니에, 샤를 비니에, 아드리앙 로마이에, 르네 길, 모리스 마터링크, C. 알베르 오리에, 레미 드 구몽, 상폴루즈 마니피크, 죠지 로든바하, 꽁트 로베르 드 몽테스키외 페젠사. 이들은 상징주의자들이자 데카당파들이다. 다음으로 마법주의자들이다: 조세핀 펠라당,  폴 아담, 줄르 봐, M. 파피 등.
Besides these, there are one hundred and forty-one more writers enumerated by Doumic in his book. 이들 외에도, 두미가 그의 책에서 열거하는 141 여명의 작가들이 있다.
Here are samples from those considered the best among these poets. I begin with the most famous, recognized as a great man deserving of a monument — Baudelaire. This, for instance, is a poem from his famous Fleurs du Mal: 여기 이들 시인들 중에서 최고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가져온 예들이 있다. 기념비적인 위대한 인물로 인정되는 가장 유명한 사람 보들레르 부터 시작하겠다. 이것은, 예를 들면, 그의 유명한 Fleurs du Mal에서 가져온 시이다.

Je t’adore a l’egal de la voute nocturne,

O vase de tristesse, ô grande taciturne,

Et t’aime d’autant plus, belle, que tu me fuis,

Et que tu me parais, ornement de mes nuits,

Plus ironiquement accumuler les lieues

Qui séparent mes bras des immensités bleues.

 

Je m’avance à l’attaque, et jegrimpe aux assauts,

Comme apres un cadavre unchoeur de vermisseaux,

Et je chéris, ô bête implacable et cruelle!

Jusqu’à cette froideur par où tu m’es plus belle! [62]

오 크고 조용한 슬픔의 꽃병이여

나는 그대를 한 밤의 창공처럼 숭배하며,

나의 미인이여 그대가 나를 멀리하고,

그대가 나의 밤들의 장식처럼 보이고,

나의 팔 들을 푸른 심연들에서 떼어 놓는

거리를 더욱 얄궂게 늘여만 가도

더욱 그대를 사랑 하노라.

 

마치 시체에 달려드는 한 무리의 지렁이들처럼,

나는 공격자에 다가가, 폭행자를 기어 오른다,

그대를 내게 더 아름답게 하는 차가움을,

나는 달랠 수 없이 잔인한 짐승을 사랑한다.

   
Here is another by the same Baudelaire: 보들레르의 다른 예를 보자:
   

DUELLUM

 

Deux guerriers ont couru l’un sur l’autre; leurs armes

Ont éclaboussé l’air de lueurs et de sang.

Cesjeux, ces cliquetis du fer sont les vacarmes

D’unejeunesse en proie àl’amour vagissant.

 

Les glaives sont brisés! comme notrejeunesse,

Ma chère! Mais les dents, les ongles acérés,

Vengent bientot l’épée et la dague traitresse.

— O fureur des coeurs murs par l’amour ulcérés!

 

Dans Ie ravin hanté des chats-pards et des onces

Nos héros, s’étreignant méchamment, ont roulé,

Et leur peau fleurira l’aridité des ronces.

 

— Ce gouffre, c’est l’enfer, de nos amis peuplé!

Roulons-y sans remords, amazone inhumaine,

Afin d’éterniser l’ardeur de notre haine! [63]

결투

 

두 전사가 서로에게 달려 들었다; 그들의 무기들은

하늘에 섬광과 피를 튀겼다.

이 시합들, 이 쇳덩이의 부딪힘은

울어대는 사랑의 제물이 된 젊음의 소음이다.

 

날들이 부러졌다! 우리의 젊음처럼,
이런! 그러나 이빨, 강철같은 손톱들은,
곧 칼과 날을 세운 비수에 보복한다.

— 오, 사랑으로 부패된 성숙한 마음들의 분노여!

 

살쾡이들과 표범들에게 쫓기어 골짜기 안으로,

우리의 영웅들은, 사악하게 몸을 감고 굴렀고,

그들의 살갗은 시린 검은 딸기가 피게 한다.

 

— 그 구덩이는 지옥, 우리 친구들이 우글거린다!

우리 증오의 향기가 영원하도록,

그곳에 후회 없이 구르자, 무자비한 아마존!

   
To be precise, I must say that there are less incomprehensible poems in the collection, but there is not one that is simple and can be understood without some effort — an effort seldom rewarded, because the feelings conveyed by the poet are not good ones, and are quite base. 정확히 말하자면, 선정된  시들 중에는 덜 난해한 것은 없지만, 단순하며 약간의 노력 — 거의 보상 받지 못하는 노력 —  없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틀림없이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시인에 의해 전달되는 느낌들은 선한 것들이 아니며, 너무나 천하기 때문이다.
And these feelings are always expressed with deliberate originality and absurdity. This intentional obscurity is particularly noticeable in prose, where the author could speak simply if he wished to. 그리고 이런 느낌들은 언제나 의도적 독창력과 모순으로 표현된다. 이런 고의적 애매함은 특히 산문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서 작가는 단순히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Here is an example from his Petits poèmes en prose. The first piece is L’Ètranger. 여기에 보들레르의 Petits poèmes en prose에서 가져온 예가 있다. 첫 단편은 L’Ètranger이다.

Qui aimes-tu le mieux, homme énigmatique, dis? ton père, ta mère, ta soeur ou ton frère?

—Je n’ai ni père, ni mère, hi soeur, ni frère.

—Tes amis?

—Vous vous servez là d’une parole dont le sens m’est resté jusqu’a cejour inconnu.

—Ta patrie?

—J’ignore sous quelle latitude elle est située.

—La beauté?

—Je l’aimerais volontiers, déesse et imortelle.

—L’or?

—Je Ie hais comme vous haïssez Dieu.

—Eh! qu’aimes-tu done, extraordinaire étranger?

—J’aime les nuages ,. . les images qui passent . . . là-bas . . . là-bas ... les merveilleux nuages! [64]

그대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알 수 없는 사람이여, 나에게 말해 달라: 그대의 아버지,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누이, 혹은 그대의 형제는?

나는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혹은 형제도 없다.

그대의 친구들은?

그래서 그대는 이날까지 내게 알려지지 않은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는군.

그대의 조국은?

나는 그것이 어느 위도에 있는지 모른다.

아름다움은?

나는 기꺼이 그것, 여신 그리고 불멸을 사랑하겠다.

황금은?

나는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증오한다.

'그럼, 괴상한 이방인이여 그대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는 구름들을 ... 스치는 구름들을... 저기 ... 저기... 놀라운 구름들을 사랑한다!

The piece entitled La soupe et les,nuages probably portrays the poet being misunderstood even by the woman he loves. Here is this piece: La soupe et les,nuages이란 제목의 소품은 아마도 심지어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오해 받고 있는 시인을 묘사한다. 이 단편을 보자:
Ma petite folle bien-aimée me donnait à dîner, et par la fenêtre ouverte de la salle à manger, je contemplais les mouvantes architectures que Dieu fait avec les vapeurs, les merveilleuses constructions de l’impalpable. Et je me disais, à travers ma contemplation: Toutes ces fantasmagories sont presque aussi belles que les yeux de ma belle bien-aimée, la petite folle monstrueuse aux yeux verts.’ 나의 바보 같은 작은 애인은 내게 저녁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의 열린 창을 통해 나는 신이 수증기로 만드는 움직이는 조형물들을, 만질 수 없는 놀라운 구조물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감상하면서 생각했다: '이 모든 주마등은 거의 괴물같이 작은 녹색 눈을 가진 바보인 나의 아름다운 애인의 눈처럼 아름답구나.'
Et tout à coup je reçus un violent coup de poing dans le dos, et j’entendis une voix rauque et charmante, une voix hystérique et comme enrouee par l’eau-de-vie, la voix de ma chère petite bien-aimée, qui disait: ‘Allez-vous bientot manger votre soupe, s . . . b . . . de marchand de nuages?’ [65]

그리고 갑자기 나는  등에 강한 주먹을 맞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술을 마셔 쉰 것처럼, 쉬고 매력적인 목소리, 히스테릭한 목소리, 나의 작은 애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며칠 있다 스프를 드실 건가요 ㄱ——— ㅈ——— 구름장수씨?

However artificial this work is, with some effort one can guess what the author wished to say, but there are pieces that are entirely incomprehensible, to me at least. 이 작품이 아무리 인위적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전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단편들이 있다.
Here, for instance, is Le Galant tireur, the meaning of which I entirely fail to grasp: 여기 Le Galant tireur를 예를 들면, 나는 이 작품의 의미를 전적으로 알아 낼 수가 없다.
Comme la voiture traversait le bois, il la fit arrêter dans le voisin-age d’un tir, disant qu’il lui serait agréable de tirer quelques balles pour tuer le Temps. Tuer ce monstre-là, n’est-ce pas l’occupation la plus ordinaire et la plus légitime de chacun? — Et il offrit galamment la main à sa chère, délicieuse et exécrable femme, a cette mystérieuse femme a laquelle il doit tant de plaisirs, tant de douleurs, et peut-être aussi une grande partie de son génie. 마차가 공원을 가로지르자, 그는 사격장 근처에 멈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몇 방 쏘는 것이 즐거울 것이라 말했다. 그 괴물을 죽이는 것이 우리 각자의 가장 평범하고 합법적인 직업이 아닌가? —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그의 사랑스럽고, 향긋하며 형편없는 아내에게, 그에게 그토록 많은 쾌락들을, 그토록 많은 고통들을, 그리고 역시 아마도 그의 천재성의 큰 부분을 주는 그토록 신비한 아내에게 내밀었다
Plusieurs balles frappèrent loin du but proposé; l’une d’elles s’enfonça même dans le plafond; et comme la charmante créature riait follement, se moquant de la maladresse de son époux, celui-ci se tourna brusquement vers elle, et lui dit: ‘Observe? cette poupée, là-bas, à droite, qui porte le nez en l’air et qui a la mine si hautaine. Eh bien! cher ange, je me figure que c’est vous.’ Et il ferma les yeux et il lâcha la détente. La poupée fut nettement decapitée.

Alors s’inclinant vers sa chère, sa délicieuse, son exécrable femme, son inévitable et impitoyable Muse, et lui baisant respectueusement la main, il ajouta: ‘Ah, mon cher ange, combienje vous remercie de mon adresse!’ [66]

몇 발은 과녁에서 벗어났다; 한 발은 심지어 천장에 박혔다; 그리고 매력적인 여자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남편의 부정확함을 놀렸다, 후자는 느닷없이 그녀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저기 오른쪽에 있는 인형, 코를 하늘로 내밀고 거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보여? 글쎄, 내 작은 천사야, 나는 그게 너라고 여길 작정이야.'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인형은 깨끗이 머리가 날아갔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랑스럽고, 그의 향긋하며, 그의 형편없는 아내, 그의 피할 수 없고 인정 없는 뮤즈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정중하게 입맞추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오, 나의 사랑하는 천사여, 나의 정확함에 대해 어떻게 당신에게 고맙다고 할까!'.

The works of Verlaine, another celebrity, are no less fanciful and no less incomprehensible. Here, for instance, is the first of his Ariettes oubliées: 다른 명사인 베르렌의 작품들은, 덜 비현실적도 아니며 덜 이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 그의 작품 잊혀진 작은 아리아(Ariettes oubliées)의 첫 부분을 예로 들겠다:

Le vent dans la plaine

Suspend son haleine. — Favart

 

C’est l’extase langoureuse,

C’est la fatigue amoureuse,

C’est tous les frissons des bois

Parmi l’étreinte des brises,

C’est vers les ramures grises

Le choeur des petites voix.

 

O le frele et frais murmure!

Cela gazouille et susure,

Cela ressemble au cri doux

Que l’herbe agitée expire . . .

Tu dirais, sous l’eau qui vire,

Le roulis sourd de cailloux.

 

Cette âme qui se lamente

En cette plainte dormante,

C’est la nôtre, n’est-ce pas?

La mienne, dis, et la tienne,

Dont s’exhale l’humble antienne

Par ce tiède soir, tout bas. [67]

평원의 바람이

그 숨을 멈추다. — 파바트

 

그건 나른한 황홀경,

그건 애정의 피로,

그건 나무들의 모든 떨림

회색 빛 가지들 근처에,

그건 산들바람의 포옹 속에,

작은 목소리들의 합창이다.

 

오, 연약하고 신선한 물소리!

졸졸졸 잘잘잘,

그건 흔들리는 잔디가 내쉬는...

마치 부드러운 외침 같다

당신은 굽이치는 물 밑 자갈들이

무겁게 구른다고 말하겠지.

 

이처럼 졸리운 애도 속에

애통해 하는 영혼은

그건 우리 것이지, 그렇지?

그래, 나의 것 그리고 너의 것,

이 온화한 밤에, 내쉬는

부드러운 합창.

What is this chœur des petites voix, and this cri doux que l’herbe agitée expire? And what is the meaning of the whole thing? For me it remains entirely incomprehensible. Here is another ariette: 작은 목소리의 합창(chœur des petites voix) 와 이 부드러운 잔디가 내쉬는 부드러운 외침(cri doux que l’herbe agitée expire)이 무엇인가? 전체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는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다른 아리에타가 있다.

Dans l’interminable

Ennui de la plaine

La neige incertaine

Luit comme du sable.

평원의 끝없는

지루함 속에

흐릿한 눈이

모래처럼 빛난다.

Le ciel est de cuivre

Sans lueur aucune,

On croirait voir vivre

Et mourir la lune.

하늘은 황동이며

반짝임도 없다

당신은 지켜본다 생각하리

달이 나서 죽는다고.

Comme des nuées

Flotte gris les chênes

Des forêts prochaines

Parmi les buées.

구름이 회색으로 꿈틀거리듯

근처 숲들 안에

안개들 사이에서

참나무들이 떠돈다.

Le ciel est de cuivre

Sans lueur aucune.

On croirait voir vivre

Et mourir la lune.

하늘은 황동이며

반짝임도 없다

당신은 지켜본다 생각하리

달이 나서 죽는다고.

Corneille poussive

Et vous les loups maigres,

Par ces bises aigres

Quoi done vous arrive?

까옥거리는 까마귀

그리고 너희 앙상한 늑대들,

이처럼 에이는 바람에

너희에게 무슨 일인가?

Dans l’interminable

Ennui de la plaine,

La neige incertaine

Luit comme du sable. [68]

평원의 끝없는

지루함 속에

흐릿한 눈이

모래처럼 빛난다.

How is it that the moon lives and dies in a sky of brass, and how is it that snow shines like sand? All this is not only incomprehensible, but, under the pretext of conveying a mood, is a series of false comparisons and words. 어떻게 황동 하늘에 달이 살고 죽는가, 그리고 어떻게 눈이 모래처럼 빛나는가? 이 모든 것은 이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분을 전달한다는 구실로, 잘못된 비교들 및 단어들의 나열이다.
Besides these artificial and obscure poems, there are others which are intelligible but quite bad both in forrn and content. Such are all the poems entitled La Sagesse. The greatest place in these poems is taken up by very bad manifestations of the most banal Catholic and patriotic feelings. There are, for instance, such stanzas as this: 이들 인위적이며 애매한 시들 외에도, 지적이지만 형식 및 내용에서 매우 나쁜 것들이 있다. 지혜(La Sagesse)라는 제목의 모든 시들도 그러하다. 이 시들에서 최고의 자리는 가장 진부한 카톨릭 및 애국적 느낌들에 관한 매우 나쁜 표현들이 차지한다.

Je ne veux plus penser qu’a ma mère Marie,
Siège de la sagesse et source de pardons,
Mere de France aussi de qui nous attendons
Inébranlablement l
honneur de la patrie. [69]

지혜가 머무는 곳 그리고 용서의 원천,

나는 이제 나의 어머니 마리아 만을,

흔들림 없이 조국의 영광을  기대하는

또한 프랑스의 어머니를  생각하련다.

Before giving examples from other poets, I cannot help dwelling upon the remarkable celebrity of these two versifiers, Baudelaire and Verlaine, now recognized as great poets. How could the French, who had Chénier, Musset, Lamartine and, above all, Victor Hugo, who still recently had the so-called Parnassians: Leconte de Lisle, Sully-Prudhomme, et al., ascribe such significance to these two versifiers and consider them great, when they are so unskilful in form and quite base and banal in content? One of them, Baudelaire, had a world outlook that consisted of crude egoism erected into a theory and the supplanting of morality by the concept of beauty, indefinite as the clouds and invariably artificial. Baudelaire preferred a woman’s face painted rather than natural, and metal trees and a mineral simulacrum of water to the real things. 다른 시인들의 예들을 보여 주기 전에, 범상치 않은 유명신사이며, 이제 위대한 시인들로 인정되는, 이 두 시인들, 보들레르 및 베를렌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찌하여 쉐니에, 뮈세, 라마르틴 그리고 무엇보다 빅토르 위고를 배출한, 아주 최근에 소위 고답파 시인들 — 르꽁테 리슬, 쉴리 프뤼돔 등 — 을 배출한 프랑스인들이, 이 두 시인들이 그토록 형식에 미숙하고 내용적으로 너무나 천하고 진부함에도,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그들 중의 한 사람, 보들레르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구성된 세계관을 이론화하여, 구름들처럼 모호하고 변함없이 인위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으로 도덕성을 대체하였다. 보들레르는 자연보다 칠해진 여성의 얼굴을, 사실적인 것 보다 금속 나무들 및 유사 광천수를 더 선호하였다.
The world outlook of the other poet, Verlaine, consists of flabby licentiousness, the confession of his own moral impotence, and, as salvation from this impotence, the crudest Catholic idolatry. For all that, they are both not only totally devoid of naïvety, sincerity and simplicity, but are filled with artificiality, forced originality and self-conceit. So that in the least bad of their works one sees more of Messrs Baudelaire and Verlaine than of what they are portraying. And these two bad versifiers form a school and lead hundreds of followers after them. 또 하나의 시인 베를렌의 세계관은 나태한 방종, 자기 자신의 도덕적 불능의 고백, 그리고, 이른 불능으로부터의 구원으로서 천박한 카톨릭의 우상 숭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순박함, 성실성 및 소박함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위성, 강압적인 독창성 및 자기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 작품들 중 가장 조금 나쁜 것에서도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한 보들레르나 베를렌 같은 시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의 나쁜 시인들은 하나의 학파를 이루며 그들 뒤로 수백의 추종자들을 거느린다.
There is only one explanation of this phenomenon: that art for the society in which these two versifiers are active is not a serious, important matter of life, but is merely an amusement. And any amusement becomes boring with repetition. In order to make the boring amusement possible again, it must be renewed in some way: when Boston gets boring, whist is invented; when whist gets boring, preference is invented; when preference gets boring, some other new thing is invented, and so on. The essence of the matter remains the same, only the forms change. So it is with this art: its content, becoming more and more limited, finally reaches the point where artists of the exclusive classes think that everything has already been said, and it is no longer possible to say anything new. And so, to renew this art, they seek new forms. 이런 현상에 대해 오직 한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즉, 이들 두 시인들이 활동하는 사회의 예술은 삶에 있어서 진지하거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오락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오락이라도 반복된다면 지루해 진다. 지루한 오락이 다시 가능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쨌든 반드시 새로워 져야 한다: 보스톤이 지루해지면, 위스트가 고안된다; 위스트가 지루해지면 프레퍼런스가 고안된다; 프레퍼런스가 지루해지면,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이 고안된다, 그리고 또...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오직 형식들만 변할 뿐이다. 이런 예술도 그렇다: 그 내용이, 점점 더 한계에 이르러서, 마침내 배타적 계급들의 예술가들이 이미 모든 것들이 다 거론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며, 어떤 새로운 것을 언급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예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새로운 형식들을 추구한다.
Baudelaire and Verlaine, while inventing a new form, have also enhanced it with previously unused pornographic details. And the critics and public recognize them as great writers. 보들레르와 베르렌은, 새로운 형식을 고안하는 한편, 이전에 사용되지 않은 외설적 묘사들로 그것을 확장했다. 그리고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그들을 위대한 작가들로 인정한다.
This alone explains the success not only of Baudelaire and Verlaine, but of the entire decadent movement. 단 이것만으로도 보들레르와 베를렌 뿐만 아니라 전체 퇴폐주의 운동의 성공이 설명된다.
There are, for instance, poems by Mallarmé and Maeterlinck that have no meaning, and in spite of that, or perhaps because of it, they are published not only in separate editions numbering tens of thousands, but in collections of the best works of the younger poets. 예를 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라르메와 마터링크의 시들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이유로, 그것들은 수만에 달하는 인쇄부수로 뿐만 아니라, 청년 시인들 중 최고의 작품집들로 출판되었다.
Here, for example, is a sonnet by Mallarmé, published in the review Pan (1895, No. I): 예로서, 여기 말라르메의 소네트가 있으며 이는 평론지 Pan (1895, No. I)에 출판된 것이다.

À la nue accablante tu

Basse de basalte et de laves

À même les êchos esclaves

Par une trompe sans vertu

용암 그리고 현무암처럼
억누르는 낮은 구름에 조용해졌다.
좋지 않은 트럼펫이 만드는
심지어 되풀이되는 메아리들에

Quel sépulcral naufrage (tu

Le sais, écume, mais y baves)

Suprême une entre les épaves

Abolit le mât dévètu

어떤 무덤 같은 난파선이 (당신,
거기 노예 선이, 그 거품을 안다)
부서진 것들 중에 최고의 배가
벌거벗은 돛대를 부순다

Ou cela que furibond faute

De quelque perdition haute

Tout l’abîme vain éployé

혹은 어떤 가장 심한 파멸도

모자란다고  분노하는 이야기

온통 텅 빈 심연이 드러난다.

Dans le si blanc cheveu qui traîne

Avarement aura noyé

Le flanc enfant d’une sirène. [70]

늘어뜨린 아주 하얀 머리카락에

어떤 사이렌의 어린 옆구리가

탐욕스럽게 빠져들 것이다.

 

 

This poem is not exceptional in its incomprehensibility. I have read several poems by Mallarmé. They are all similarly devoid of meaning. 이 시는 그 난해성에서 예외적이 아니다. 나는 말라르메의 여러 시들을 읽었다. 그것들은 모두 비슷하게 의미가 없었다.
And here is an example from another famous contemporary poet — three songs by Maeterlinck. This, too, I have taken from Pan (1895, No. 2): 그리고  여기 동시대의 다른 유명한 시인의 것 — 마터링크의 세 가지 가사들 — 을 예로 들겠다. 이것 역시 Pan (1895, No. 2)에서 가져온 것이다:

Quand il est sorti

(J’entendis la porte)

Quand il est sorti

Elle avait souri . . .

그가 나갔을 때

(나는 문소리를 들었다)
그가 나갔을 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Mais quand il rentra

(J’entendis la lampe)

Mais quand il rentra

Une autre etait la ...

하지만 그가 왔을 때

(나는 불 켜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가 왔을 때

거기 다른 이가 있었다...

Etj’ai vu la mort

(J’entendis son âme)

Et j’ai vu la mort

Qui l’attend encore ...

그리고 나는 그게 죽음인 줄 알았다

(나는 그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죽음인 줄 알았다

침묵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On est venu dire

(Mon enfant, j’ai peur)

On est venu dire

Qu’il allait partir . ...

그들이 와서 말했다
(내 자식, 나는 두렵다)

그들이 와서 말했다

그는 멀리 가고 있었다...

Ma lampe allumée

(Mon enfant, j’ai peur)

Ma lampe allumée

Me suis approchee...

등불을 켜고서

(내 자식, 나는 두렵다)

등불을 켜고서

나는 더 가까이 올라갔다...

À la première porte

(Mon enfant, j’ai peur)

À la première porte

La flamme a tremblé . . .

첫째 문에서
(내 자식, 나는 두렵다)

첫째 문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À la seconde porte

(Mon enfant, j’ai peur)

À la seconde porte,

La flamme a parlé . . .

둘째 문에서

(내 자식, 나는 두렵다)

둘째 문에서

불빛이 말했다...

À la troisième porte

(Mon enfant, j’ai peur)

À la troisième porte

La lumière est morte . . .

셋째 문에서

(내 자식, 나는 두렵다)

셋째 문에서

빛이 사라졌다...

Et s’il revenait unjour

Que faut-il lui dire?

Dites-lui qu’on l’attendit

Jusqu’à s’en mourir ...

그리고 그가 언제 돌아 온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말하지?

그에게 그녀가 죽었다 말하렴

그들 기다리다가...

Et s’il interroge encore

Sans me reconnaître,

Parlez-lui comme une sceur,

Il souffre peut-être ...

그리고 그가 더 묻는다면

내가 누군지 깨닫지 못한 채,

누이처럼 그에게 말하렴,

그가 고통 받고 있을 거라고...

Et s’il demande où vous êtes

Que faut-il répondre?

Donnez-lui mon anneau d’or

Sans rien lui répondre . . .

그리고 그가 네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하지?

그에게 내 금반지를 주렴

그리고 아무것도 더 말하지 말렴...

Et s’il veut savoir pourquoi

La salle est déserte?

Montrez-lui la lampe éteinte

Et la porte ouverte . . .

그리고 그가 왜냐고 묻는다면

그 방이 텅 비었는지?

그에게 어두운 등을 보여 주렴

그리고 문을 열어서...

Et s’il m’interroge alors

Sur la dernière heure?

Dites-lui quej’ai souri

De peur qu’il ne pleure . . . [71]

그리고 다음에 그가 내게 묻는다면

임종에 대해서?

내가 미소 지었다고 그에게 말하렴

두려워서 그가 울 것 같기에.

Who went out? Who came in? Who is talking? Who died? 누가 나갔지? 누가 들어 왔지? 누가 말하고 있는가? 누가 죽었나?
I ask the reader not to be lazy about reading the examples I cite in the first appendix from the better-known and esteemed young poets — Griffin, [72] Régnier, Moréas and Montesquiou. It is necessary in order to form a clear idea of the true state of art, and not to think, as many do, that decadence is an accidental, temporary phenomenon. 나는 독자들이 제일 부록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촉망 받는 젊은 시인들 — 그리핀, 레니에, 모레아스 및 몽테스키외 — 에게서 내가 인용하는 예들을 읽어 보기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예술의 참된 상태에 대한 명료한 개념을 형성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퇴폐주의가 우연한 것이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것은 필요하다.
To avoid the reproach of having picked out the worst poems, I have cited from each book the poem that happened to appear on the twenty-eighth page. 최악의 시들을 뽑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나는 각각의 책에서 스물 여덟 번째 페이지에 올라 있는 시를 인용하였다.
All the poems of these poets are equally incomprehensible, or comprehensible only with great effort and then not fully. 이들 시인들의 모든 시들은 똑 같이 난해하거나, 엄청난 노력이 있어야만 이해되며, 그럼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All the works of these hundreds of poets, of whom I have named only a few, are the same. And the same sort of poems are published by Germans, Scandinavians, Italians and us Russians. If not millions, at least hundreds of thousands of copies are typeset and printed (some sell in tens of thousands). To typeset, print, compose and bind these books, millions and millions of working days are spent — no less, I think, than for the building of a big pyramid. But not only that: the same thing goes on in all the other arts, and millions of working days are spent to produce objects just as incomprehensible in painting, music, drama. 이들 수백 명의 시인들의 모든 작품들은, 그것들에 대해 단지 몇 가지만 말했지만, 동일하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시들이 독일인들, 스칸디나비아인들, 이탈리아인들 및 우리 러시아인 들에 의해 출판된다. 수백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수십만 부가 활자화되어 인쇄되었다 (어떤 것은 수만 부가 팔린다). 이 책들을 활자화하고 인쇄하고, 정리하고, 제본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일이 소모된다 — 생각건대,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보다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 뿐이 아니다: 동일한 일이 다른 모든 예술들에서 일어나며, 미술, 음악, 연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난해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백만의 노동일이 소모된다.
Painting not only does not lag behind poetry in this, but even outstrips it. Here is a passage from the diary of an amateur of painting who visited the Paris exhibitions in 1894: [73] 미술은 이 점에서 시보다 뒤쳐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능가한다. 여기 1894년 파리 전시회를 다녀온 아마추어 미술가의 일기에서 가져온 글이 있다:
Today I attended three exhibitions: symbolists, impressionists and neo-impressionists. I looked at the paintings conscientiously and diligently — but again the same perplexity and, in the end, indignation. The first exhibition, of Camille Pissarro, is still the most comprehensible, though there is no drawing, no content, and the colours are most incredible. The drawing is so indefinite that one sometimes cannot tell which way a hand or head is turned. The content is mostly effets effet de brouillard, ejfet du soir, soleil couchant. [74] Several paintings with figures, but without subject. 오늘 나는 상징주의자들, 인상주의자들 및 신인상주의자들의 세가지 전시회들에 참석했다. 나는 진지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그림들을 관람하였다 — 그러나 다시금 똑같이 혼란스러웠으며, 결국에는 분통이 터졌다. 첫 번째 전시는, 까미유 피사로의 것으로, 그 중 가장 납득이 갔지만, 아무런 그리기도, 아무런 내용도 없었으며,  색상들은 당찮았다. 그리기는 너무나 애매해서 어느 방향으로 손이나 머리가 향하는지 때대로 분별할 수도 없었다. 내용은 대체적으로 효과들 — 안개 효과, 저녁 효과, 석양 — 이었다. 어떤 그림들은 형상들은 있어도 주제는 없었다.
In colouring there is a predominance of bright blue and bright green. And each painting has its basic tone, with which the painting is as if spattered. For example, the goose-girl has a basic tone of vert-de-gris, and there are spots of this colour everywhere: on her face, hair, arms, dress. In the same Durand-Ruel gallery, other paintings by Puvis de Chavannes, Manet, Monet, Renoir, Sisley — these are all impressionists. One of them — I could not make out his name, something like Redon — painted a blue face in profile. The whole face is just this blue tone, with some white. In Pissarro there is one watercolour done entirely in dots. In the foreground a cow, all painted in multicoloured dots. One cannot catch the general tone, whether one stands back or steps close. From there I went to look at the symbolists. I looked for a long time without asking anyone, trying to guess for myself what the point was — but it is beyond human comprehension.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struck my eye was a wooden haut-relief, of ugly execution, portraying a woman (naked) who with her two hands is squeezing streams of blood from her nipples. The blood flows down and becomes purple flowers. The hair first hangs down, then is pulled up, turning into trees. The figure is painted yellow all over, the hair is brown. 색상에선 옅은 청색 및 옅은 녹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각각의 그림은 기본 색조가 있었는데, 그림은 이런 방식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거위지기 여자는 기본 색조가 녹청색이며, 도처 그녀의 얼굴, 머리카락 팔, 의복 에 이 색상이 박혀 있었다. 동일한 듀란 루엘 화랑에, 쀠비 드 샤방, 마네, 르노와르, 시슬리가 그린 다른 그림들 — 이것들은 모두 인상주의자들이다 — 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는 — 그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레돈 비슷한 어떤 것인데 — 푸른색 측면 얼굴을 그렸다. 전체 얼굴은 바로 이 같은 약간 흰색을 띤 푸른 색조이다. 피사로에게 있어서 전체가 점들로 된 한가지 수채화법으로 이루어 진다. 전면에서 한 암소는, 모두 다양한 색상의 점들로 칠했다. 뒤로 물러서든 가까이 다가서든 일반적 색조를 감지할 수 없다. 거기로부터 나는 상징주의자들을 보러 갔다. 나는 아무에게도 질문하지 않고서 한참 동안 바라 보았으며, 요점이 무엇인지 짐작해 보고자 애를 썼다 —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이해의 경지를 벗어나 있다. 나의 시선을 끈 최초의 것들 중 하나는 목재로 된 높은 양각이었으며, 흉하게 만든 것으로, (나체의)여자가 두 손으로 자신의 젖꼭지로부터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짜내고 있는 것이었다. 피가 흘러 내려서 자주색 꽃들이 되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먼저 아래로 늘어지고 다음엔 끌어 올려져 나무들로 변한다. 윤곽은 전체적으로 노랗게 칠해지며, 머리카락은 갈색이다.
Then a painting: a yellow sea, and floating in it what might be a ship or might be a heart; on the horizon a profile with a halo and yellow hair that becomes the sea and gets lost in it. The paint in some paintings is applied so thickly that it comes out as something between painting and sculpture. A third work, still less comprehensible: a male profile, before it a flame and black stripes — leeches, it was later explained to me. I finally asked a gentleman who was there what it all means, and he explained to me that the statue was a symbol, that it represented La Terre, that the heart floating in the yellow sea was Illusion, and the gentleman with the leeches was Le Mal. There were several impressionist paintings among them: primitive profiles with some flower in their hand. Monochrome, no drawing, and either completely indefinite or else outlined with a broad black contour. 다음엔 어떤 그림: 노란 바다, 그리고 그 위에 배이거나 심장일 것 같은 것이 떠있다; 수평선엔 후광을 지닌 윤곽과 바다가 되며 그 안에 사라지는 노란 머리카락이 있다. 어떤 그림들에서 색칠은 너무나 두껍게 되어서 그림과 조각 사이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작품은, 여전히 이해가 덜 되는 것으로, 남자의 인물이 있으며, 그 앞에 화염과 검은 채찍들 — 뒤에 설명되기로 거머리들 — 가 있다. 나는 마침내 거기 있는 신사에게 그게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었고, 그는 내게 설명하기를, 그 형상은 상징이며, 그것은 (La Terre)을 나타내며, 노란 바다 위에 떠있는 심장은 환영(Illusion)이고, 거머리들과 함께 있는 신사들은 (Le Mal)이라고 했다. 그것들 중엔 몇 가지 인상주의 그림들이 있었다: 손에 몇 송이 꽃들을 든 원시적인 인물이다. 단색이며, 스케치도 없고, 두꺼운 윤곽을 두른 전적으로 애매하거나 그런 것이었다.
That was in the year 1894; now this tendency is still more strongly defined: Bocklin, Stuck, Klinger, Sasha Schneider and others. [75] 이것은 1894년에 있었다; 이제 이런 경향은 훨씬 더 강력하게 정의된다: 보클린,스턱, 클링거, 사샤 쉬나이더 및 등.
The same thing is also happening in the drama. We are shown an architect who for some reason has not fulfilled his earlier lofty intentions and consequently climbs on to the roof of a house he has built and throws himself off it head first; or some incomprehensible old woman who exterminates rats and who, for no apparent reason, takes a poetical child to the sea and drowns him there; or some blind men who sit on the seashore and for some reason keep repeat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or some bell that falls into a lake and rings there. [76] 연극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초기의 숭고한 의도들을 성취하지 못한 한 건축가가 결국은 그가 지은 어떤 가옥의 지붕에 올라가서 머리를 아래로 하고 뛰어 내리는 것; 혹은 생쥐들을 박멸하며, 아무런 명백한 이유 없이 시적인 한 아이를 바다에 데려가서 빠트리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노파; 혹은 바닷가에 앉아 있는 어떤 맹인이 어떤 이유에선지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연못에 빠진 어떤 종이 거기서 울리는 것을 구경하게 된다.
The same thing is also happening in music — an art which, it seems, ought to be understood in the same way by everyone. 음악 — 반듯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똑같은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 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A well-known musician of your acquaintance sits down to the piano and plays for you what he says is a new work of his or of one of the new composers. You listen to the strange, loud noises, marvel at the gymnastic exercises of the fingers, and see clearly that the composer wishes to suggest to you that the sounds he is producing are poetic yearnings of the soul. You see his intention, but no other feeling is communicated to you except boredom. The performance goes on for a long time, or so at least it seems to you, a very long time, because without perceiving anything clearly, you involuntarily recall the words of Alphonse Karr: ‘Plus ça va vite, plus ça dure longtemps. [77] And it occurs to you that it is perhaps a mystification, that the performer is testing you, throwing his hands and fingers randomly on the keys hoping you will get caught in the trap and start praising him at which point he will laugh and confess that he was merely testing you. But when it is finally over, and the musician rises, sweaty and excited, from the piano, obviously expecting to be praised, you see that it was all very serious.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음악가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그가 일컫는 바 그의 혹은 새로운 작곡가들 중의 한 사람의 새로운 작품을 연주한다. 당신은 이상하고 시끄러운 소음들에 귀를 기울이며, 체조에 가까운 손가락 훈련들에 감탄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영혼의 시적 갈망들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암시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는다. 당신은 그의 의도를 깨닫지만, 지루함 외에 어떤 느낌들도 당신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연주는 오랫동안 지속되거나, 적어도 당신에게 아주 오랜 동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알폰소 카르의 말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빨리 움직일 수록, 오래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홀리는 것이며, 연주자가 당신을 시험하고 있고, 그의 손들과 손가락들을 건반들에 마구잡이로 휘둘러서 당신을 함정에 빠지게 하고 그들 칭찬하기 시작하기를 바라며 그 점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단지 당신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내 끝나고, 음악가가 땀이 베고 흥분하여, 명백히 칭찬 받고자 기대하면서,  피아노에서 일어 날 때, 그것이 모두 너무나 진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The same things happens at all concerts with performances of Liszt, Wagner, Berlioz, Brahms and — the latest — Richard Strauss, and countless others who ceaselessly compose opera after opera, symphony after symphony, piece after piece. 똑 같은 일들이 리스트, 바그너, 베를리오즈, 브람스 그리고 — 가장 최근의 — 리처드 스트라우스, 그리고 끊임없이 오페라와 오페라를, 그리고 교향곡과 교향곡을 작곡하는 무수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모든 음악회들에서 일어난다.
The same thing happens in that area where it would seem difficult to be incomprehensible — the area of the novel and the short story. 똑 같은 일이 난해해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보일 것 같은 영역 — 소설 및 단편 소설의 영역 — 에서도 발생한다.
You read Là-bas by Huysmans, or short stories by Kipling, or L’Annonciateur from the Contes cruels of Villiers de l’Isle Adam, [78] etc., and all this is for you not only abscons [79] (a new word of the new writers), but utterly incomprehensible both in form and in content. Such, for instance, is the novel Terre promise by E. Morel, now appearing in the Revue Blanche, [80] as well as the majority of new novels: the style is quite bold, the feelings seem to be lofty, but one simply cannot understand what is happening where and to whom. 휘스만의 저 너머에(Là-bas) 혹은 키플링의 단편들, 혹은 빌리어 아일 아담의 잔인한 이야기들 중의 통지자 등을 읽어 보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난해할(abscons, 신 작가들의 신조어) 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내용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Revue Blanche에 올라 있는 E. 모렐의 약속의 땅(Terre promise)은 물론 대다수 새로운 소설들이 그러하다; 문체는 매우 대담하고, 느낌들은 고상해 보이지만, 우리는 어디에 누구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And all the young art of our time is like that. 그리고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 예술은 그와 같다.
People of the first half of our century — admirers of Goethe, Schiller, Musset, Hugo, Dickens, Beethoven, Chopin, Raphael, da Vinci, Michelangelo, Delaroche [81] — understanding nothing of this new art, often simply regard its works as tasteless madness and wish to ignore them. But this attitude towards the new art is completely unfounded, because, first of all, this art is spreading more and more, and has already won itself a firm position in society — just as romanticism did in the ‘thirties; second, and above all, because if we are able to judge the works of the latest, so-called decadent art in this way simply because we do not understand them, then there is an enormous number of people — including all working people and many non-workers — who in exactly the same way do not understand those works of art which we consider beautiful: the poems of our own favorite artists — Goethe, Schiller, Hugo; the novels of Dickens; the music of Beethoven and Chopin; the paintings of Raphael, Michelangelo, da Vinci, et al. 우리 세기 전반기의 사람들 — 괴테, 쉴러, 뮈세, 휴고, 디킨즈, 베토벤, 쇼팽, 라파엘, 다빈치, 미켈란젤로, 델라로쉬의 추종자들 — 은 이런 새로운 예술에 대해 전혀 모름으로써, 종종 그 작품들을 단순히 무미건조한 미친 짓으로 치부하며 그것들을 무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에 대한 이런 경향은 완전히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먼저 이 예술은 — 삼십 년대의 낭만주의처럼 —  점점 더 확산되어 이미 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단순히 우리가 최근의 작품들을, 소위 이런 방식의 퇴폐주의 예술을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런 작품들 — 우리가 가장 좋아 하는 예술가들의 시들 —  괴테, 쉴러, 휴고; 디킨즈의 소설들;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 라파엘, 미켈란젤로, 다빈치의 그림들, 등 — 을 정확히 똑같이 이해하지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 모든 노동자들 및 비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 이 존재한다.
If I have the right to think that large masses of people neither understand nor love what I recognize as unquestionably good, because they are not sufficiently developed, then I have no right to deny that it is possible for me not to understand or love the new works of art because I am insufficiently developed to understand them. And if I have the right to say that I, along with the majority of like-minded people, do not understand the works of the new art simply because there is nothing to understand and because it is bad art, then a still greater majority, the entire mass of working people who do not understand what I regard as beautiful art, have the same right to say that what I regard as good art is bad art and there is nothing in it to understand. 만일 내가, 많은 대중들이 그들이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선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권리가 있다면, 내가 예술 작품들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새로운 예술 작품들을 이해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권리도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단순히, 대다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내가  새로운 예술 작품들이 이해할 것이 없으며 악한 예술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내가 아름다움 예술이라 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동하는 사람들 전체 대중은, 내가 선한 예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악한 예술이며 거기에 이해할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I once saw especially clearly how wrong it is to condemn the new art when, in my presence, a poet who writes incomprehensible verses laughed with merry self-confidence at incomprehensible music, and soon afterwards a musician who composes incomprehensible symphonies laughed with the same self-confidence at incomprehensible poetry. I cannot condemn the new art and have no right to condemn it simply because, as a man brought up in the first half of the century, I do not understand it; I can only say that I am unable to understand it. The one advantage of the art which I recognize over the art of the decadents is that the art which I recognize is understood by a slightly larger number of people than present-day art. 나는 새로운 예술을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특히 명백히 깨달은 적이 있었는데, 나의 면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을 쓰는 한 시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음악에 대해 유쾌한 자신감으로 비웃고, 얼마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교향곡들을 작곡하는 한 음악가가 이해할 수 없는 시에 대하 똑같은 자신감으로 비웃은 때문이었다. 나는 새로운 예술을 비난할 수 없으며 그것을 비난할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세기의 전반에 자라난 사람으로서,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퇴폐주의자들의 예술에 대해 내가 인식하는 예술의 한 가지 이점은 내가 인식하는 예술이 현시대의 예술보다 약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이다.
From the fact that I am accustomed to a certain exclusive art and understand it, while I do not understand a still more exclusive art, I have no right to conclude that this art, my art, is the most true art, and that the art I do not understand is not true and is bad; I can only conclude from it that art, as it has become more and more exclusive, has become more and more incomprehensible for a larger and larger number of people, and in this movement towards greater and greater incomprehensibility, one step of which I occupy with my accustomed art, it has reached a point where it is understood by a very small number of the elect, and that this number of the elect keeps getting smaller and smaller. 내가 어떤 배타적 예술에 익숙하며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훨씬 더 배타적인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서, 나는 이 예술이, 나의 예술이, 가장 참된 예술이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이 참되지 않으며 악하다고 결론 내릴 권리가 없다; 나는 오직 그로부터, 예술이 더욱 더 배타적이 됨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더욱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결론 내릴 수 있으며, 더욱 더 심한 난해성을 향한 이런 움직임 안에서, 나는 그 한 걸음에 내가 적응한 예술로 채우고 있으며, 예술은 매우 적은 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 이해되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선택된 이들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As soon as the art of the upper classes became separated from the art of the whole people, there arose the conviction that art can be art and yet be incomprehensible to the masses. As soon as this thesis was allowed, it inevitably became necessary to allow that art may be comprehensible only to a small number of the elect, and, finally, only for two, or one — a best friend, one’s own self. This is what modern artists say straight out: ‘I create and I understand myself; if others do not understand me, so much the worse for them.’ 상류 계급들의 예술이 전체 대중들의 예술로부터 분리되자마자, 예술은 예술이 될 수 있고 그럼에도 민중들에게 난해할 수 있다는 신념이 떠올랐다. 이런 주장이 허용되자마자, 필연적으로 예술은 오직 선택된 적은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도 있으며, 마침내 오직 둘 혹은 하나 — 가장 좋은 친구, 자기 자신 — 를 위할 수도 있음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대 예술가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 나는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이해한다; 만일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그들을 위해 불행한 일이다.'
The assertion that art can be good art and yet be incomprehensible to a large number of people is so wrong, its consequences are so pernicious for art, and it is at the same time so widespread, so embedded in our notions, that no explanation of its utter incongruity can suffice. 예술은 선한 예술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난해할 수 있다는 단정은 틀린 것이며, 그 결과들은 예술에 매우 해롭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너무나 널리 퍼져 있고, 너무나 우리의 관념들 속에 심어져 있어서 그것이 도무지 당치 않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모자랄 것이다.
Nothing is more common than to hear said of alleged works of art that they are very good but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We are used to the assertion, and yet to say that a work of art is good but incomprehensible is the same as saying of some kind of food that it is very good but people cannot eat it. People may not like rotten cheese, putrid grouse and other such dishes appreciated by gastronomes with perverted taste, but bread and fruit are only good when people like them. It is the same with art: perverted art may be incomprehensible to people, but good art is always understood by everyone. 어떤 예술 작품들이 매우 훌륭한 것이지만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흔한 것은 없다. 우리는 그런 주장들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어떤 예술 작품이 선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 매우 훌륭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사람들은 썩은 치즈, 부패한 꿩 그리고 변질된 취향을 지닌 미식가들이 즐기는 그런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빵과 과일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좋아할 때 비로서 유익한 것이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왜곡된 예술은 사람들에게 난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된다.
It is said that the best works of art are such that they cannot be understood by the majority and are accessible only to the elect, who are prepared to understand these great works. But if the majority do not understand, they must be given an explanation, the knowledge necessary for understanding. But it turns out that this knowledge does not exist, that the works cannot be explained, and therefore those who say that the majority do not understand good works of art give no explanations, but say that in order to understand one must read, look at, or listen to the same work over and over again. But this is not to explain, it is to make accustomed. And one can get accustomed to anything, even the worst. As it is possible to get people accustomed to rotten food, vodka, tobacco, opium, so it is possible to get them accustomed to bad art, which in fact is being done.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으며 이들 위대한 작품들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설명, 즉, 이해에 필요한 지식이, 제공 되어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작품들은 설명될 수 없고, 그러므로 대다수 사람들이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설명들을 내놓지 않으며,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 똑 같은 작품을 되풀이 해서 읽고, 쳐다보고, 혹은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응되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에든, 심지어 최악의 것들에고 적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썩은 음식, 보드카, 담배, 아편에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을 나쁜 예술에 적응되게 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Besides, it cannot be said that the majority of people lack the taste to appreciate the highest works of art. The majority understand and have always understood what we, too, consider the highest art: the artistically simple narratives of the Bible, the Gospel parables, folk legends, fairy tales, folk songs are understood by everyone. Why is it that the majority suddenly lost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 highest of our art? 더욱이, 대다수 사람들이 최고의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 취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대다수는 언제나 우리가 역시 최고의 예술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며 이해하여 왔다: 성서의 예술적으로 단순한 이야기들, 복음서의 비유들, 민담들, 동화들, 민요들은 모두에게 이해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의 최고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One can say of speech that it is beautiful but incomprehensible to those who do not understand the language in which it is uttered. Speech uttered in Chinese may be beautiful and yet remain incompre­hensible to me if I do not know Chinese, but a work of art is distinguished from all other spiritual activity in that its language is understandable to everyone, that it infects everyone without distinction. The tears, the laughter of a Chinese will infect me in just the same way as the tears and laughter of a Russian, as will painting and music, or a work of poetry if it is translated into a language I understand. The song of a Kirghiz or a Japanese moves me, though not as much as it moves the Kirghiz or the Japanese themselves. So, too, I am moved by Japanese painting and Indian architecture and Arabian tales. If I am little moved by a Japanese song or a Chinese novel, it is not because I do not understand these works, but because I know and am accustomed to higher works of art, and by no means because this art is above me. Great works of art are great only because they are accessible and comprehensible to everyone. The story of Joseph, translated into Chinese, moves the Chinese. The story of Shakyamuni moves us. [82] The same is true of buildings, paintings, statues, music. And therefore, if art does not move us, one must not say that the cause is the spectator’s or listener’s incomprehension, but one can and must conclude that it is either bad art or not art at all. 우리는 어떤 연설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행해지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어로 행해진 연설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내가 중국어를 모른다면 여전히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그 언어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전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다른 정신적인 활동과 구별된다. 한 중국인의 눈물, 웃음은 한 러시아인이 눈물 및 웃음과 똑 같이 나를 전염시킬 것이며, 미술, 음악, 혹은 시 작품도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된다면 마찬가지 일 것이다. 키르기즈인 혹은 일본인의 노래가 그들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를 감동시킨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나는 일본 미술 그리고 인도 건축 및 아라비아 이야기들로 감동 받는다. 만일 내가 일본 노래 혹은 중국 소설로 적게 감동 받는다면, 내가 이들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알고 익숙해 있기 때문이며, 결코 이 예술이 나를 능가해서가 아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그것들이 오직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으며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인들을 감동시킨다. 석가모니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건축들, 그림들, 조각들, 음악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예술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원인이 관중, 혹은 청취자의 몰이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하지만 그것이 나쁜 예술이거나 전혀 예술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거나 결론 내려야 한다.
The difference between art and mental activity, which requires preparation and a certain sequence of learning (so that one cannot teach trigonometry to someone who does not know geometry), is precisely that art affects people independently of their degree of development and education, that the charm of a picture, of sounds, of images infects any man, on whatever level of development he may stand. 예술과 정신적 활동의 차이는 정확히, 후자는 준비 및 특정한 일련의 학습을 요구하며 (그래서 우리는 기하를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 삼각법을 가르칠 수 없으며), 예술은 사람들의 발달 및 교육 정도와 별도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특정 그림의, 소리들의, 영상들의 매력은 모든 사람을 전염시키며, 그가 어떤 발달 단계에 위치하든 마찬가지다.
The business of art consists precisely in making understandable and accessible that which might be incomprehensible and inaccessible in the form of reasoning. Usually, when a person receives a truly artistic impression, it seems to him that he knew it all along, only he was unable to express it. 예술 작업은 정확히 자칫 추론의 형태로 이해될 수 없거나 이용될 수 없는 것을 이해될 수 있고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점에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진정 예술적인 인상을 받았다면, 그가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으며 단지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그에게 느껴지는 것이다.
And the best, the highest art has always been so: the lliad, the Odyssey, the stories of Jacob, Isaac, and Joseph, the Hebrew prophets, the Psalms, the Gospel parables, and the story of Shakyamuni, and the Vedic hymns [83] — all convey very lofty feelings, and in spite of that are fully understandable to us now, to the educated and the uneducated, and were understood by people of their own time, who were still less educated than our own working people. They talk of incomprehensibility. But if art is the conveying of feelings that arise from a people’s religious consciousness, how can a feeling based on religion — that is, on man’s relation to God — be incomprehensible? Such art must be, and indeed has always been, understandable to everyone, because each man’s relation to God is always the same. And therefore temples, and the images and singing in them, have always been understandable to everyone. The obstacle to understanding the best and highest feelings, as is also said in the Gospel, by no means lies in an absence of development and education, but, on the contrary, in false development and false education. A good and lofty artistic work may indeed be incomprehensible, only not to simple, unperverted working people (they understand all that is lofty) — no, but a true artistic work may be and often is incomprehensible to highly educated, perverted, religion-deprived people, as constantly occurs in our society, where people find the highest religious feelings simply incomprehensible. I know people, for example, who consider themselves most refined, and who say that they do not understand the poetry of love for one’s neighbor and of self-denial, or the poetry of chastity. 그리고 가장 선한, 최고의 예술은 언제나 그랬다: 일리아드, 오딧세이, 야곱, 이삭, 및 요셉 이야기들, 히브리 선지자들, 시편, 복음서의 비유들, 그리고 석가모니의 이야기, 그리고 베다의 찬양들 — 모두가 매우 숭고한 느낌들을 전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에게, 배운 자든 못 배운 자에게든, 충분히 이해될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으며, 그들은 우리 자신의 노동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난해성을 말한다. 그러나 만일 예술이 사람들의 종교적 의식에서 솟아 나오는 느낌들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종교에 — 즉, 신에 대한 사람의 관계 위에 — 기초를 둔 느낌이 이해될 수 없겠는가? 그러한 예술은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사실 언제나 그래왔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제각기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원들, 그리고 그 안의 영상들 및 노래함은 언제나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어 왔다.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느낌들을 이해함에 대한 장벽은, 또한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결코 발전 및 교육의 결여에 놓여 있지 않으며, 반대로 거짓된 발전 및 거짓된 교육에 있다. 선하며 숭고한 예술 작품은 사실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단순하며, 타락되지 않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그들은 숭고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 —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예술 작품은 고도로 교육받았으며, 타락한, 종교를 잃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종종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최고의 종교적 느낌들을 단순히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Thus, good, great, universal, religious art may be incomprehensible only for a small circle of perverted people, but not otherwise. 그래서, 선한, 훌륭한, 보편적, 종교적 예술은 오직 조그만 범주의 타락한 사람들에게나 이해될 수 없으며, 그 반대는 아니다.
It is impossible that art can be incomprehensible to the great masses only because it is very good, as artists of our time like to say. One should rather suppose that the great masses do not understand art only because this art is very bad, or even is not art at all. So that the most beloved argument naively accepted by the cultivated mob, according to which, in order to feel art, one must understand it (which, in fact, merely means get accustomed to it), is the surest sign that what is offered to our understanding in this way is either very bad, exclusive art, or is not art at all. 예술이,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즐겨 말하듯, 그것이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대다수 일반 대중에게 이해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는 대다수 일반 대중이 이런 예술이 매우 악하거나, 심지어 전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순진하게도 교양 있는 무리들에게 수용되는 가장 애용되는 논리는, 예술을 느끼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하도록 이렇게 제공되는 것은 매우 악한, 배타적 예술이거나, 혹은 전혀 예술이 아님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They say the people do not like works of art because they are unable to understand them. But if the work of art has the aim of infecting people with the feeling experienced by the artist, how then can we speak of incomprehension? 그들은 말한다, 민중이 예술 작품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예술 작품이 예술가에 의해 경험된 느낌으로 사람들을 전염시킴이 목적이라면, 어찌하여 우리는 몰이해를 말할 수 있는가?
A man of the people reads a book, looks at a painting, listens to a drama or a symphony, and feels nothing. He is told that that is because he does not know how to understand it. They promise to show a man a certain spectacle — he comes in and sees nothing. He is told that that is because his sight has not been prepared for this spectacle. But the man knows that he can see everything perfectly well. And if he does not see what they promised to show him, he merely concludes (quite correctly) that those who undertook to show him the spectacle did not fulfill their undertaking. In the same way, and quite correctly, a man of the people draws conclusions about the works of art of our society, which do not call up any feelings in him. And therefore, to say that a man is not moved by my art because he is still very stupid, which is both very presumptuous and very brazen, is to pervert the roles and shift the blame from the sick head to the sound. 민중의 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 그림을 바라본다, 연극이나 교향곡을 청취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그 이유가 그가 그것을 이해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듣는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구경거리를 보여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 그가 들어 온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그 이유가 그의 시력이 이런 구경거리를 위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듣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지극히 훌륭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들이 그에게 보여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단순히 (매우 정확하게)  그 구경거리를 보여 주기로 한 사람들이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매우 정확하게, 민중의 한 사람이 우리 사회의 예술 작품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그것들이 그 안에서 어떤 느낌들도 불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가 아직 매우 멍청하기 때문에 나의 예술에 의해 감동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뻔뻔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철면피한 것으로, 역할을 왜곡시켜서 비난을 아픈 머리에서 소리로 돌리는 것이다.
Voltaire said, ‘Tous les genres sont bons, hors Ie genre ennuyeux.’ With still greater right one may say about art, ‘Tous les genres sont bons, hors celui quon ne comprend pas’, or ‘qui ne produit pas son effet’, [84] for what virtue is there in an object that does not do what it is meant to do?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장르는 유익하며, 단지 지루한 장르는 예외이다.' 훨씬 뛰어난 정확하게 우리는 예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모든 장르는 유익하다, 단 이해되지 않는 것" 혹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예외다,' 왜냐하면 행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는 물건에 무슨 가치가 있으랴?이기 때문이다.
But the main thing is that, once we allow that art can be art while being incomprehensible to certain people of sound mind, there is then no reason why some circle of perverted people should not create works that titillate their perverted feelings and are incomprehensible to anyone except themselves, and call these works art, which in fact is now being done by the so-called decadents.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일단 우리가 건전한 정신을 지닌 특정한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음에도 예술이 예술이라고 허용한다면, 일부 범주의 타락한 사람들이 그들의 타락한 느낌들을 자극해 주고, 그들 자신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는 작품들을 만들며, 이런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실 이런 일들은 소위 퇴폐주의자들에 의해 지금 행해지고 있다.
The course art has been taking may be likened to placing on a circle of large diameter circles of smaller and smaller diameters, thus forming a cone the tip of which ceases to be a circle at all. This very thing has happened with the art of our time. 예술이 취하고 있었던 과정은 커다란 지름의 원 위에 점점 작은 지름들의 원들을 놓아서, 끝이 완전히 원이 되는 것을 중단해 버리는 원뿔을 형성하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 시대의 예술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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