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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Since the time when people of the upper classes lost their faith in Church Christianity, the standard of good and bad art has been beauty — that is, the pleasure afforded by art — and in correspondence with this view of art, an aesthetic theory has taken shape of itself among the upper classes, justifying such an understanding — a theory according to which the aim of art is the manifestation of beauty. The adherents of this aesthetic theory, to confirm its correctness, assert that it was not invented by them, that it lies at the essence of things and was already recognized by the ancient Greeks. But this assertion is completely arbitrary and has no other basis than the fact that for the ancient Greeks, with their lower moral ideal (as compared with the Christian), the idea of the good was not yet sharply distinguished — from the idea of the beautiful . 상류 계급들의 사람들이 교회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잃은 시대 이후로, 선하고 악한 예술의 표준은 아름다움 — 즉, 예술에 의해 제공되는 쾌락 — 이 되었으며, 이 같은 예술관에 맞추어서, 하나의 미학 이론이 상류 계급들 사이에 스스로 모양을 갖추었으며, 그러한 이해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이론를 합리화하였다. 이런 미학 이론의 신봉자들은, 그것의 정확성을 확언하기 위해서, 그것이 그들에 의해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사물들의 본질에 놓여 있으며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인정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런 단언은 완전히 독단적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그리스도교와 비교하여) 저급한  도덕적 이상과 함께, 선의 개념은아름다움의 개념으로부터아직 정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한다.
The highest perfection of the good, not only not coincident with beauty, but mainly opposed to it, which the Jews already knew in the time of Isaiah and which was fully expressed by Christianity, was completely unknown to the Greeks. They thought that the beautiful must necessarily also be good. True, the foremost thinkers — Socrates, Plato, Aristotle — sensed that the good might not coincide with beauty. Socrates expressly subordinated beauty to the good; Plato, in order to unite the two ideas, spoke of a spiritual beauty; Aristotle demanded that art affect people morally , [47] but even these thinkers still could not entirely renounce the notion that beauty and the good coincide. 선의 최고의 완성은, 아름다움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로 그것과 대치되며, 그것은 유대인들은 이미 이사야 시대에 알았으며 그리스도교에 의해 완전히 표현되는 것으로, 그리스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또한 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은 선은 아름다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소크라테스는 명백히 아름다움을 선에 종속시켰다; 플라톤은, 두 가지 개념들을 결합하기 위해, 정신적 아름다움을 이야기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심지어 이들 사상가들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선이 일치한다는 견해를 전적으로 포기할 수 없었다.
And therefore in the language of that time there came into use the compound word (beautiful-goodness) to signify this combined notion. 그리고 그러므로 그 시대의 언어에서 복합어 (미선)가 사용되어서 이런 혼합된 개념을 의미하게 되었다.
Greek thinkers were obviously beginning to approach the concept of the good expressed by Buddhism and Christianity, and were confused in establishing relations between the good and beauty. Plato’s judgments about beauty and the good are full of contradictions. And it was this very confusion of concepts that the people of the European world, who had lost all faith, tried to make into law. They tried to prove that this combination of beauty and good lies at the very essence of the matter, that beauty and the good must coincide, that the word and concept of `, which had meaning for the Greeks, but which has no meaning at all for a Christian, represents the highest ideal of mankind. On this misunderstanding the new science of aesthetics was erected. And in order to justify this new science, the ancient teaching on art was reinterpreted in such fashion as to make it seem that this made-up science had also existed among the Greeks. 그리스 사상가들은 분명히 불교 및 그리스도교에 의해 표현된 선의 개념에 다가가고 있었으며, 선과 아름다움 사이의 관계를 설정함에 혼란스러웠다.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플라톤의 판단은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유럽 세계의 민중들이, 신앙을 잃고 나서, 규범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개념들에 대한 혼란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선의 결합이 물질의 본질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아름다움과 선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라는 단어 및 개념은, 그리스인들에게 의미가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인에게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류의 최고의 이상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 이런 오해 위에 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새로운 학문을 합리화하기 위해, 예술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은, 이 같은 날조된 학문이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역시 존재 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재해석되었다.
In fact, the reasoning of the ancients about art did not resemble ours at all. Thus Benard writes quite correctly, in his book on Aristotle’s aesthetics: ‘Pour qui veut y regarder de près, la théorie du beau et celle de l’art sont tout à fait séparées dans Aristote, comme elles le sont dans Platan et chez leurs successeurs.’ [48] 사실, 예술에 대한 고대인들의 추론은 전혀 우리 것을 담지 않았다. 그래서 버나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관한 그의 책에서, 매우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의 이론 및 예술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플라톤이나 그의 계승자들처럼, 완전히 분리된 것이다.'
And indeed the reasoning of the ancients on art not only does not confirm our aesthetics, but rather denies its teaching on beauty. And yet all aestheticians, from Schassler to Knight, maintain that the science of the beautiful — aesthetics — was initiated by the ancients — Socrates, Plato, Aristotle — and was supposedly continued to some extent by the Epicureans and the Stoics — Seneca, Plutarch, and up to Plotinus; but that as the result of some accident, this science somehow suddenly disappeared in the fourth century, was absent for fifteen hundred years, and only after this gap of fifteen hundred years was revived again in Germany, in 1750, in the teaching of Baumgarten. 그리고 사실 예술에 관한 고대인들의 추론은 우리의 미학을 확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그 가르침을 부정한다. 하지만 모든 미학자들은, 샤슬러에서 나이트까지, 아름다움의 학문 — 미학 — 은 고대인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에 의해서 효시되었으며 필경 어느 정도까지는 에피규러스 학파 및 스토아 학파들 —세네카, 플루타크, 그리고 플로티누스까지 — 에 의해서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우연의 결과로, 이 학문은 어쨌든 4세기에 사라졌으며, 1500년 동안 없다가, 오직 이처럼 1500년이라는 시차 후에, 1750년 독일에서, 바움가르텐의 가르침으로 부활되었다는 것이다..
After Plotinus, says Schassler, fifteen centuries went by during which there was not the slightest scientific interest in the world of beauty and art. Those one and a half thousand years were lost for aesthetics and for the working out of the scholarly structure of this science. [49] 샤슬러는 말하기를, 플로티누스 후에, 15세기가 흘러갔으며 그 기간 동안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그 1500년은 미학에 있어서 그리고 이런 학문의 학술 구조를 산출함에 있어서 잃어 버린 시기였다는 것이다.
In fact, it was nothing of the sort. The science of aesthetics, the science of the beautiful, did not disappear and could not disappear, because it never existed. The Greeks, like all other peoples always and everywhere, simply regarded art, like any other matter, as good only when it served the good (as they understood it) and bad when it was opposed to this good. The Greeks themselves were so little developed morally that they thought beauty and the good coincided, and on this backward world view of the Greeks was erected the science of aesthetics made up by men of the eighteenth century, and especially turned into a theory by Baumgarten. The Greeks (as anyone can be convinced by reading Benard’s excellent book on Aristotle and his followers, and Walter’s book on Plato) never had any science of aesthetics. 사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미학이란 학문, 아름다움의 학문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사라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단순히,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다른 어떤 문제처럼, 오직 그것이 (그들이 이해하던 것처럼) 선을 위한 것이면 선한 것이며 이런 선에 반대되면 악하다고 여겼다. 그리스인들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발전이 너무 낮아서 그들은 아름다움과 선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리스인들의 이런 후진적 세계관 위에 18세기의 사람들에 의해 날조된 미학이란 학문이 세워졌으며, 특별히 바움가르텐에 의해 이론으로 변모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버나드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관한 훌륭한 책, 그리고 플라톤에 관한 월터의 책을 읽어 보면 누구라도 납득하겠지만) 결코 미학이란 학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Aesthetic theories, and the very name of this science, emerged about one hundred and fifty years ago among the wealthy classes of the Christian European world, simultaneously in various nations — Italian, Dutch, French, English. Its founder, its shaper, the one who gave it scientific, theoretical form, was Baumgarten. 미학 이론들은, 그리고 이 학문의 이름 자체는, 150년 전에 그리스도교 유럽 세계의 부유한 계급들 사이에서, 동시에 다양한 나라들 —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 에서 등장했다. 그 창시자, 그 형성자, 그것에 학문적, 이론적 형태를 부여한 사람은, 바움가르텐이었다.
With the pedantic external thoroughness and symmetry typical of the Germans, he invented and expounded this astonishing theory. And, in spite of its striking baselessness, no other theory ever suited so well the taste of the cultured mob, or was adopted with such readiness and absence of criticism. This theory suited the taste of the upper classes so well that to this day, despite its complete arbitrariness and the non-substantiation of its theses, it is repeated by the learned and the unlearned as something indisputable and self-evident. 독일인들에게 특징인 현학적 외적 치밀함 및 균형감각으로, 그는 이 놀라운 이론을 창안하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두드러진 터무니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이론도 교양 있는 군중들의 취향에 그렇게 훌륭하게 맞아 떨어진 적은 없었으며, 혹은 그토록 신속하게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채택된 적은 없었다. 이 이론은 상류 계급들의 취향에 너무나 훌륭하게 맞아서, 그것의 독단성 및 그 논제들의 신빙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식자들 및 무식자들에 의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자명한 어떤 것으로 되풀이 되었다.
Habent sua fata libelli pro capite lectoris, [50] and still more so habent sua fata the particular theories that come from the state of delusion that society is in, amidst which and for the sake of which these theories are devised. If a theory justifies the false position which a certain part of society is in, then, however baseless and even obviously false the theory may be, it will get adopted and become the belief of that part of society. Such, for instance, is the famous and totally baseless theory of Malthus [51] about the earth’s population increasing in geometrical progression while food resources increase only in arithmetical progression, the result being the overpopulation of the earth. Such, too, is the theory, grown out of Malthus, of selection and the struggle for existence as the basis of human progress. Such, too, is the now widely spread theory of Marx that economic progress is inevitable and consists in the swallowing up of all private enterprises by capitalism. However baseless theories of this sort may be, however contradictory they may be to everything mankind knows and recognizes, however obviously immoral they may be, they are accepted on faith, without criticism, and are preached with passionate enthusiasm, sometimes for centuries, until the conditions they justify are done away with or the absurdity of the theories becomes too obvious. Such, too, is the astonishing theory of Baumgarten’s trinity — Good, Truth and Beauty — according to which it turns out that the best that can be done by the art of peoples who have lived eighteen hundred years of Christian life is to adopt as its ideal the same one that was held by a small, half-savage, slave-owning people two thousand years ago, who portrayed naked human bodies very well and built buildings pleasing to the eye. No one notices any of these incongruities. Learned men write long, vaporous treatises on beauty as one member of the aesthetic trinity: the beautiful, the true, the good. Das Schöne, das Wahre, das Gute — le Beau, le Vrai, le Bon — with capital letters, are repeated by philosophers, aestheticians, artists, private individuals, novelists, pamphleteers, and everyone seems to think that in pronouncing these sacramental words they are speaking of something quite definite and firm — something on which one can base one’s judgments. In fact, these words not only have no definite meaning, but they hinder us from giving any definite meaning to existing art, and are needed only to justify the false significance we ascribe to art that conveys all sorts of feelings, so long as these feelings afford us pleasure. 책들은 그 독자들의 이해에 따라 그 운명을 지닌다(Habent sua fata libelli pro capite lectoris), 그리고 그 사회가 처한 망상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특정한 이론들은 여전히 더욱 그 운명을 지닌다 (habent sua fata), 또한 그것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이들 이론들이 고안된다. 만일 어떤 이론이 사회의 어떤 일부가 처한 위선적 위치를 정당화한다면, 그 이론이 아무리 근거 없고 심지어 명백히 위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채택되어져서 그 사회 일부의 믿음이 된다. 그와 같은 것은, 예를 들자면, 유명하고 전혀 근거 없는 맬더스의 이론으로, 지구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반면 식량은 오직 산술급수적으로 늘어서, 그 결과는 지구의 인구 과잉이 된다는 것이다. 역시 그와 같은 것은, 맬더스로부터 자라난 것으로, 인간의 진보의 과정의 토대로서의 적자생존 이론이다. 역시 그와 같은 것은 지금 널리 퍼져 있는 마르크스의 이론으로서, 경제적 진보는 필연적이며 자본주의가 모든 개인 사업들을 삼켜버림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들이 아무리 근거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인류가 알고 있으며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에 아무리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아무리 비도덕적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신앙처럼 수용되며, 비판도 없으며, 정열적인 열광으로 설교되며, 때로는 수세기 동안, 그것들이 합리화하는 조건들이 필요 없어지거나 혹은 이론들의 부조리가 너무나 명백해질 때까지 그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것은 바움가르텐의 삼위일체 — 선,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 — 라는 놀라운 이론이며, 이것에 의하면, 1800년 동안 그리스도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이룩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은, 벌거벗은 인간의 몸들을 매우 훌륭하게 그렸으며 보기에 즐거운 건물들을 세웠던 2000년 전 소수의 반 야만적인,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었던 것과 동일한 것을, 예술의 이상으로 채택하는 것이라 한다. 아무도 이런 불일치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지식인들은 미학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아름다움에 관해 장문의 공허한 논문들을 쓴다: 진, 선, 미. 대문자로 Das Schöne, das Wahre, das Gute — le Beau, le Vrai, le Bon — 라고 쓰며, 철학자들, 미학자들, 예술가들, 개인들, 소설가들, 팜플렛 제작자들에 의해 되풀이 된다, 그리고 누구나 이들 성스러운 단어들을 발음하면서 그들은 매우 명확하며 확고한 어떤 것 — 자신의 판단의 토대로 둘 수 있는 어떤 것 — 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런 단어들은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 예술에 대해 어떤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방해하며, 모든 종류의 느낌들을 전달하는 예술에, 이들 느낌들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한, 우리가 규정하는 위선적 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해 오로지 필요할 뿐이다.
The moment we renounce for a time the habit of regarding this trinity as having the truth of the religious Trinity, and ask ourselves what we always understand as the meaning of the three words of this trinity, we will be convinced beyond doubt of how utterly fantastic is the uniting of these three utterly different and, above all, incommensurate words and concepts. 우리가 잠시라도 이런 삼위일체가 종교적 삼위일체의 진리를 지닌다고 여기는 습관을 포기하고, 이런 삼위일체라는 세 단어들의 의미로 우리가 언제나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이들 세가지 완전히 상이한 그리고 ,무엇보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과 개념들을 결합한다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괴상한 일인지 깨달을 것이다.
The good, the beautiful and the true are put on the same level, and all three concepts are recognized as fundamental and metaphysical. Yet the reality is nothing of the sort. 선, 아름다움 및 진리는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그리고 세가지 모든 개념들은 근본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The good is the eternal, the highest aim of our life. No matter how we understand the good, our life is nothing else than a striving towards the good — that is, towards God. 선은 영원함이며,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이다. 우리가 선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우리의 삶은 선을 향한 — 즉, 신을 향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The good is indeed a fundamental concept, which metaphysically constitutes the essence of our consciousness, a concept undefinable by reason. 선은 사실 근본적 개념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우리 의식의 본질을, 이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을 구성한다.
The good is that which no one can define, but which defines everything else. 선은 아무도 정의할 수 없지만, 다른 무엇이든 정의하는 것이다.
But the beautiful, if we are not to content ourselves with words, but speak of what we understand — the beautiful is nothing other than what is pleasing to us. 그러나 아름다움은, 우리가 단어에 만족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면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즐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The concept of beauty not only does not coincide with the good, but is rather the opposite of it, because the good for the most part coincides with a triumph over our predilections, while beauty is the basis of all our predilections. 아름다움의 개념은 선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선은 대체적으로 우리의 편애들에 대한 승리와 일치하는 반면, 아름다움은 우리의 모든 편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The more we give ourselves to beauty, the more removed we are from the good. I know that the usual response to this is that there exists a moral and spiritual beauty, but that is only a play on words, because by spiritual or moral beauty we mean nothing other than the good. Spiritual beauty, or the good, for the most part not only does not coincide with what is usually meant by beauty, but is the opposite of it. 우리가 아름다움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선에서 더 멀어진다. 나는 이것에 대한 일반적 반응은 도덕적 및 정신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오직 말장난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정신적 혹은 도덕적 아름다움은 우리가 오직 선을 의미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아름다움, 혹 선은, 대체적으로 흔히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반대이다.
As for truth, it is still less possible to assign to this member of the supposed trinity not only a oneness with the good or the beautiful, but even any independent existence at all. 진리를 말하자면, 이 추정적 삼위일체의 구성원에 선 또는 아름다움과의 일체감 뿐만 아니라, 어떤 독립적인 실체를 부여하기라도 한다는 것은 훨씬 더 가능성이 없다.
We call truth only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manifestation or definition of an object and its essence, or the understanding of the object common to all people. And what is common to the concepts of beauty and truth on the one hand, and the good on the other? 우리는 진리를 어떤 대상 및 그 본질의 표현 혹은 정의의 일치, 혹은 모든 사람들에 공통적인 대상에 대한 이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한편으로 무엇이 아름다움과 진리의 개념들에, 다른 한편으로 선에 공통적인가?
The concepts of beauty and truth not only are not equal with the good, not only are not of one essence with the good, but do not even coincide with it. 아름다움 및 진리의 개념들은 선과 동등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선과 하나의 본질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Truth is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manifestation and the essence of the object, and is therefore one means of attaining to the good, but in itself truth is neither the good nor the beautiful, and does not even coincide with them. 진리는 대상의 표현과 본질 사이의 일치이며, 그러므로 선에 이르는 한가지 수단이다, 하지만 진리는 그 자체로서 선함도 아름다움도 아니며, 심지어 그것들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Thus, for instance, Socrates and Pascal, and many others as well, regarded a knowledge of the truth of useless objects as discordant with the good. As for beauty, truth has nothing in common with it, and is for the most part opposed to it, because, while exposing deception, truth destroys illusion, the main condition of beauty. 그러므로, 예를 들면,소크라테스 및 파스칼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무익한 대상들에 대한 진리의 지식은 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아름다움을 말하자면, 진리는 그것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대체적으로 그것에 대치된다, 왜냐하면, 기만을 노출시키면서, 진리는 환상, 즉, 아름다움의 핵심 조건을 파괴한다.
And so the arbitrary uniting of these three incommensurable and mutually alien concepts served as the basis for the astonishing theory according to which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rt, conveying good feelings, and bad art, conveying wicked feelings, was totally obliterated; and one of the lowest manifestations of art, art for mere pleasure — against which all teachers of mankind have warned people — came to be regarded as the highest art. And art became, not the important thing it was intended to be, but the empty amusement of idle people. 이들 세가지 비교될 수 없는 그리고 상호 이질적 개념들의 독단적 결합은, 선한 느낌들을 전달하는 선한 예술, 그리고 사악한 느낌들을 전달하는 악한 예술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놀라운 이론의 토대로 작용했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저속한 표현들 중의 하나, 단순한 쾌락을 위한 예술 — 이에 대항하여 인류의 모든 교사들이 사람들에게 경고 하였다 — 은 최고의 예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은, 그것이 의도되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들의 공허한 오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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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4/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