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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TRANSLATED BY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III

   
I will begin with the founder of aesthetics, Baumgarten. 미학의 창시자, 바움가르텐부터 시작해 보고자 한다.
According to Baumgarten, the object of logical knowledge is truth; the object of aesthetic (that is, sensuous) knowledge is beauty. Beauty is the perfect (the absolute) perceived by the senses. Truth is the perfect perceived by reason. The good is the perfect attained by the moral will. 바움가르텐에 따르면, 논리적 지식의 대상은 진리이다; 미학적 (즉, 관능적) 지식의 대상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지각들에 의해 인식되는 완전성 (절대성)이다. 선은 도덕적 의지에 의해 성취되는 완전성이다.
Beauty, according to Baumgarten, is defined by correspondence, that is, by the order of the parts in their mutual relations to each other, and in their relation to the whole. The aim of beauty itself is to be pleasing and to arouse desire (Wohlgefallen und Erregung eines Verlanges) a thesis directly contradictory to Kant’s notion of the main property and token of beauty. 아름다움은, 바움가르텐에 의하면, 조화에 의해  즉, 부분들의 상호 관계들 안에서 부분들의 서로에 대한 질서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전체에 대한 관계에 의해 정의 된다. 아름다움의 목적 자체는 즐겁게 하는 것 및 욕망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Wohlgefallen und Erregung eines Verlanges) 칸트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본 성질 및 상징에 대한 관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이다.
As for the manifestations of beauty, Baumgarten thinks that we perceive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beauty in nature, and therefore the imitation of nature is, according to Baumgarten, the highest task of art (also a thesis directly contradictory to the judgments of the latest aestheticians). 아름다움의 표현들에 대해, 바움가르텐은 우리가 자연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최상의 표현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방은, 바움가르텐에 의하면, 예술의 최고의 임무이다 (또한 최근의 미학자들의 판단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이다).
Passing over Baumgarten’s not very remarkable followers — Maier, Eschenburg and Eberhardt [14] — who only slightly modified their teacher’s views by distinguishing the pleasant from the beautiful — I will set down the definitions of beauty in writers who came directly after Baumgarten and who define beauty quite differently. These writers are Schütz, Sulzer, Mendelssohn and Moritz. [15] In contradiction to Baumgarten’s main thesis, these writers recognize as the aim of art not beauty, but the good. Thus Sulzer says that only that which contains the good can be recognized as beautiful. According to Sulzer, the aim of the whole life of mankind is the welfare of social life. It is attained through education of the moral sense, and art should be subservient to this aim. Beauty is that which evokes and educates this sense. 바움가르텐의 그리 두드러지지 않은 추종자들 — 마이어, 에쉔버그 및 어베하르트 — 이들은 오직 즐거움을 아름다움과 구별함으로써 그들 스승의 견해들을 약간 수정하였다 — 은 접어두고, 나는 바움가르텐 직후에 등장하였으며 아름다움을 매우 다르게 정의하는 작가들에서 아름다움의 정의들을 적어 보고자 한다. 이들 작가들은 쉬트, 술처, 멘델스존 및 모리츠이다. 바움가르텐의 기본 주장과 반대하여, 이들 작가들은 예술의 목적을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술처는 오직 선을 담는 것만이 아름답다고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술처에 의하면, 인류의 전체 삶의 목적은 사회적 삶의 행복이다. 그것은 도덕적 지각의 교육을 통해 달성되며, 예술은 이런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이런 감각을 일깨우고 교육하는 것이다.
Mendelssohn understands beauty in almost the same way. Art, according to Mendelssohn, is a carrying of the beautiful, perceived by some vague sense, to the level of the true and the good. And the aim of art is moral perfection. 멘델스존은 아름다움을 거의 똑같이 이해한다. 멘델스존에 따르면, 예술은 아름다움을, 약간 모호한 의미로 인식되지만, 진리와 선의 수준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목적은 도덕적 완성이다.
For aestheticians of this tendency, the ideal of beauty is a beautiful soul in a beautiful body. So that for them the division of the perfect (the absolute) into its three forms, of the true, the good and the beautiful, is completely effaced, and beauty again merges with the good and the true. 이런 경향의 미학자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이상은 아름다운 영혼과 아름다운 육체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 선함 및 아름다움의 세가지 형태들로의 완전성(절대성)의 분할은 완전히 사라지며, 아름다움은 다시 선함 및 진리와 결합한다.
However, not only is this understanding of beauty not retained by later aestheticians, but there appears the aesthetics of Winckelmann, again completely opposite to these views, most decisively and sharply separating the tasks of art from the aim of the good, and setting as the aim of art an external and even merely plastic beauty.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런 이해는 나중의 미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이런 견해들에 완전히 반대되는 윙켈만의 미학이 등장하여, 예술의 임무들을 선의 목표로부터 가장 결정적이며 예리하게 분리시키며, 예술의 목표를 외적이며 심지어 단순히 조형의 미로 설정한다.
According to the famous work of Winckelmann, [16] the law and aim of all art is beauty alone, completely separate from and independent of the good. Beauty can be of three kinds: (1) beauty of form; (2) beauty of idea, expressed in the pose of the figure (with regard to plastic art); (3) beauty of expression, which is possible only in the presence of the first two conditions. This beauty of expression is the highest aim of art, and was in fact realized in antique art. Consequently, the art of the present day should strive to imitate antique art. 윙켈만의 유명한 작품에 의하면, 모든 예술의 법칙과 목표는 오직 아름다움이며, 선과는 완전히 분리 독립된다. 아름다움은 세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1) 형태의 미; (2) (조형 미술과 관련하여) 형상의 위치에서 표현되는, 개념의 미; (3) 직 앞의 두 가지 조건들의 존재 안에서 가능한, 표현의 미. 이 표현의 미는 예술의 최고의 목표이며, 사실 고대 예술에서 실현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예술은 고대의 예술을 흉내 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Beauty is understood in the same way by Lessing and Herder, then by Goethe and all prominent German aestheticians up to Kant, from whose time, again,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art begins. 아름다움은  레싱과 헤르더에 의해, 다음으로  괴테 및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탁월한 미학자들에 의해,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되며, 그들의 시대로부터, 다시금, 예술에 대한 색다른 이해가 시작된다.
In England, France, Italy and Holland at this same time, independently from the German writers, native aesthetic theories were born, just as unclear and contradictory, and all these aestheticians, in exactly the same way as the Germans, place the concept of beauty at the foundation of their reasoning, understanding it as something that exists absolutely and either merges more or less with the good, or has the same root. In England, at around the same time as Baumgarten, or even a little earlier, Shaftesbury, Hutcheson, Home, Burke, Hogarth [17] and others wrote on art.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에서 동시에, 독일의 작가들과는 관계없이, 토착적인 미학적 이론들이 생겨났으며, 마찬가지로 불명료하며 모순적이며, 이 모든 미학자들은, 독일과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아름다움의 개념을 그들의 추론의 기저에 두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존재하거나 다소간에 선과 병합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면서,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 영국에선, 바움가르텐과 대략 비슷하거나 심지어 조금 일찍, 샤프테스베리, 허치슨, 홈, 버크, 호가스 및 다른 작가들이 예술에 대해 썼다.
According to Shaftesbury, what is beautiful is harmonious and proportionate; what is beautiful and proportionate is true; and what is beautiful and at the same time true, is also pleasant and good. Beauty, according to Shaftesbury, is known only by the spirit. God is the principal beauty — the beautiful and the good proceed from a single source. Thus, even though Shaftesbury regards beauty as something separate from the good, they still merge again into something inseparable. 샤프테스베리에 의하면, 아름답다는 것은 조화와 균형이다; 아름답고 균형 있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진리인 것은 또한 즐거우며 선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샤프테스베리에 의하면, 오직 영혼에 의해 알려진다. 신은 제일의 아름다움이다 — 아름다움과 선함은 단 하나의 근원에서 나아간다. 그리하여, 샤프테스베리가 아름다움을 선함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다시 떼어낼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합쳐진다.
According to Hutcheson, in his Origin of Our Ideas of Beauty and Virtue, the aim of art is beauty, the essence of which consists in the manifestation of unity within diversit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beautiful we are guided by ethical instinct (‘an internal sense’). This instinct may be contrary to the aesthetic one. Thus, according to Hutcheson, beauty no longer always coincides with the good, but is separate from it and sometimes contrary to it. 허치슨에 의하면, 그가 쓴 미와 선에 대한 우리 사상들의 기원에서,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이며, 그 본질은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의 표현에 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는 윤리적 본능 ('내적 지각')에 의해 인도된다. 이런 본능은 미적인 것에 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허치슨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더 이상 언제나 선함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과 분리되어 있으며 때로는 그것에 대치되기도 한다.
According to Home, beauty is that which is pleasant. And therefore beauty is determined only by taste. The basis for correct taste consists in the greatest wealth, fullness, force and diversity of impressions being contained within the strictest limits. This is the ideal of the perfect work of art. 홈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오로지 취향으로 결정된다. 정확한 취향의 기초는 가장 엄격한 제한들 안에 담겨 있는 최대의 부, 완전함, 힘, 및 인상들의 다양성이다. 이것은 완전한 예술 작품의 이상이다.
According to Burke, in his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which constitute the aim of art, are based on the sense of self-preservation and the sense of communality. These senses, considered at their sources, are means for maintaining the gens through the individual. The first is achieved by nourishment, defence and war; the second by communion and reproduction. And therefore self-preservation and the war connected with it are the source of the sublime, while communality and the sexual need connected with it are the source of beauty. 버크에 따르면, 그의 숭고함 및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사상들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숭고함과 아름다움은, 예술의 목적을 구성하는 것으로, 자기 보존의 감각 및 공동성의 감각에 기초한다. 이런 감각들은, 그들의 근원들에 따라 고려하면, 개체를 통한 씨족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첫째는 양분, 방어 및 전쟁으로, 둘째는 교제와 재생산으로 달성된다. 그러므로 이것과 연관된 자기 보존 및 전쟁은 숭고함의 근원이며, 이것과 연관된 공동성 및 성적 욕구는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Such were the main English definitions of art and beauty in the eighteenth century. 이러함이 바로 18세기의 예술 및 아름다움에 대한 영국의 주된 정의들이다.
In France at the same time, Père André, Batteux, [18] and, later, Diderot, D’Alembert and, to some extent, Voltaire, wrote on art. 같은 시대의 프랑스에서, 피에르 안드레, 바토, 및 후기의 디데로, 달램버트 그리고, 어느 면에서, 볼테르가 예술에 관하여 썼다.
According to Père André (Essai sur Ie Beau), there are three kinds of beauty: (1) divine beauty, (2) natural beauty and (3) artificial beauty. 피에르 안드레 (Essai sur Ie Beau)에 의하면, 세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다: (1)신적인 아름다움, (2)자연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3)인위적인 아름다움.
According to Batteux, art consists in imitating the beauty of nature, and its aim is pleasure. Diderot’s definition of art is the same. The arbiter of what is beautiful is supposed to be taste, just as with the English. But not only are the laws of taste not established, it is even acknowledged that to do so is impossible. D’Alembert and Voltaire were of the same opinion. 바토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흉내 냄에 있으며, 그 목적은 쾌락이다. 디데로의 예술의 정의도 동일하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심판자는 취향으로 되어 있으며, 영국과 거의 같다. 그러나 취향의 법칙들은 확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되어 진다. 달렘버트와 볼테르는 같은 의견이다.
According to Pagano [19], an Italian aesthetician of the same time, art consists in the uniting into one of the beauties scattered through nature. The ability to see these beauties is taste; the ability to unite them in one whole is artistic genius. Beauty, according to Pagano, merges with the good in such fashion that beauty is the good made manifest, while the good is inner beauty.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 미학자 파가노에 의하면, 자연에 두루 흩어져 있는 아름다움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움들을 보는 능력은 취향이다;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로 엮는 능력은 예술적 천재성이다. 파가노에 의하면, 아름다움이 선함과 합쳐지고,  아름다움은 표현되어진 선함이 되는 것이며, 반면에 선함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According to other Italians — Muratori in his Riflessioni sopra il buon gusto intorno le science e le arti, and especially Spaletti in his Saggio sopra la belezza [20] art comes down to an egoistic sensation, based, as in Burke, on the striving for self-preservation and communality. 다른 이탈리아인들에 의하면 — 무라토리는 그의 작품 Riflessioni sopra il buon gusto intorno le science e le arti에서, 그리고 특히 스파레티는 그의 작품 Saggio sopra la belezza에서 — 예술은 이기적인 감각으로 귀결되며, 버크처럼, 자기 보존 및 공동성을 추구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Among the Dutch, Hemsterhuis, [21] who influenced the German aestheticians and Goethe, is noteworthy. According to his teaching, beauty is that which gives us the greatest pleasure, and that which gives us the greatest pleasure is that which gives us the greatest number of ideas within the shortest time. The pleasure of the beautiful is the highest knowledge to which man can attain, because it gives the greatest number of perceptions in the shortest time. 네덜란드인 가운데서, 헴스터루이스가 언급할 만하며, 독일 미학자들과 괴에테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이며, 우리에게 가장 큰 쾌락을 주는 것이 최단시간 내에 가장 많은 생각들을 주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쾌락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단시간 내에 최대의 인식들을 주기 때문이다.
Such were the theories of aesthetics outside Germany during the last century. In Germany, after Winckelmann, there again appeared a completely new aesthetic theory, that of Kant, which more than all others clarifies the essence of the concept of beauty, and therefore also of art. 최근 백 년 동안 독일 밖의 미학의 이론들은 이러했다. 독일에서, 윙켈만 이후에, 전혀 새로운 미학 이론이 등장했는데, 칸트의 것으로, 이는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아름다움의 개념의,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을 명확하게 한다.
Kant’s aesthetics is based on the following: man, according to Kant, perceives nature outside himself and himself in nature. In nature outside himself he seeks the true; within himself he seeks the good — the first is a matter of pure reason, and the second of practical reason (freedom). Besides these two means of perception, there is, according to Kant, also the power of judgement (Urteilskraft), which forms judgements without concepts and produces pleasure without desire (Urteil ohne Begriffund Vergnugen ohne Begehren). It is this power which constitutes the basis of the aesthetic sense. And beauty, according to Kant, is in a subjective sense that which, without concepts and without practical benefit, is generally and necessarily pleasing, and in an objective sense is the form of a purposeful object in so far as it is perceived without any notion of its purpose. 칸트의 미학은 다음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은, 칸트에 의하면, 자기 밖에서 자연을 자기를 자연에서 인식한다. 자기 밖의 자연에서 그는 진리를 추구한다; 자기 안에서 그는 선을 추구한다 — 전자는 순수 이성의, 후자는 실천 이성 (자유)의 문제이다. 이들 두 가지 인식의 수단들 외에, 칸트에 의하면, 또한 판단력(Urteilskraft)이 있으며, 이는 개념들이 없는 판단들을 형성하며 욕망 없는 쾌락(Urteil ohne Begriffund Vergnugen ohne Begehren)을 만들어 낸다. 미적인 감각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힘이다. 그리고 칸트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주관적 의미로는, 개념들이 없고 실용적 이익이 없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즐거운 것이며, 객관적 의미로는 의도에 대한 어떤 관념이 없이 인식되는 한 의도적 대상의 형태이다.
Beauty is defined in the same way by Kant’s followers, Schiller among them. According to Schiller, who wrote much on aesthetics, the aim of art, as with Kant, is beauty, the source of which is pleasure without practical usefulness. So that art may be called play, though not in the sense of a worthless occupation, but in the sense of a manifestation of the beauty of life itself, which has no other aim than beauty. 아름다움은 칸트의 추종자들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정의되며, 쉴러는 그들에 속한다. 쉴러에 의하면, 그는 미학에 대하여 많이 썼으며, 예술의 목적은, 칸트의 경우처럼, 아름다움이며, 그 근원은 실용적 유익함이 없는 쾌락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오락이라고 불릴 것이며, 하지만 가치 없는 활동의 의미에서라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 자체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이며, 삶은 아름다움 외의 목적은 가지지 않는다.
Besides Schiller, the most remarkable of Kant’s followers in the field of aesthetics were Jean-Paul and Wilhelm Humboldt, who, while adding nothing to the definition of beauty, clarified its various kinds — drama, music, the comic, etc. 쉴러외에도, 미학 분야에서 칸트의 추종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장 폴 및 빌헬름 험볼트로, 이들은, 아름다움의 정의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반면, 아름다움의 다양한 종류 — 드라마, 음악, 코미디, 등 — 를 분명히 하였다.
After Kant, besides some second-rate philosophers, Fichte, Schelling, Hegel and their followers wrote on aesthetics. According to Fichte, consciousness of the beautiful arises in the following way. The world — that is, nature — has two sides: it is the product of our limitation, and it is also the product of our free ideal activity. In the first sense, the world is limited, in the second it is free. In the first sense, every body is limited, distorted, compressed, constrained, and we see ugliness; in the second, we see inner fullness, vitality, regeneration — we see beauty. Thus the ugliness or beauty of an object, according to Fichte, depends on the point of view of the contemplator. And that is why beauty is located, not in the world, but in the beautiful soul (schöner Geist). Art, then, is the manifestation of this beautiful soul, and its aim is education, not only of the mind, which is the work of the scholar, not only of the heart, which is the work of the moral preacher, but of the whole man. And therefore the token of beauty is not in anything external, but in the presence of a beautiful soul in the artist. 칸트 후에, 일부 이류의 철학자들 외에도, 피히테, 쉘링, 헤겔 및 그들의 추종자들도 미학에 관해 썼다. 피히테에 따르면,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일어난다: 세상 — 즉, 자연 — 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한계의 산물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자유로운 이상적 행동의 산물이다. 첫째 의미에서, 세상은 제한적이며, 둘째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롭다. 첫째 의미에서 모두가 제한되고, 왜곡되고, 억압되며, 강압되며, 우리는 추함을 본다; 둘째에서 우리는 내적 충만, 생동, 및 재생을 본다 — 우리는 아름다움을 본다. 그래서 대상의 추함 또는 아름다움은, 피히테에 의하면, 관찰자의 관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움이, 세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schöner Geist) 안에 놓여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예술은 이런 아름다운 영혼의 표현이며, 그 목적은 교육으로서, 학자들의 작품인 정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도덕 설교자의 작품인 마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체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증거는 어떤 외적인 것에 있지 않으며, 예술가에게 아름다운 영혼의 실재에 있다.
Following Fichte, Friedrich Schlegel and Adam Müller defined beauty along the same lines. According to Schlegel, beauty in art is understood too incompletely, one-sidedly and separately; beauty is not only in art, but also in nature, and also in love, so that the truly beautiful is expressed in the union of art, nature and love. Therefore Schlegel recognizes moral and philosophical art as inseparable from aesthetic art. 피히테 다음으로, 프리드리히 쉴레겔과 뮐러는 아름다움을 동일한 방향으로 정의하였다. 쉴레겔에 의하면, 예술에서 아름다움은 너무나 불완전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그리고 동떨어지게 이해된다; 아름다움은 예술에만 있지 않고 자연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있어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예술, 자연 그리고 사랑의 결합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쉴레겔은 도덕적 및 철학적 예술을 미학적인 예술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According to Adam Müller, [22] there are two beauties: one is a social beauty which attracts people as the sun attracts the planets — this is predominantly antique beauty; the other is an individual beauty, which becomes so because he who contemplates it himself becomes a sun that attracts beauty — this is the beauty of the new art. A world in which all contradictions are harmonized is the highest beauty. Every work of art is a repetition of this universal accord. The highest art is the art of life. 아담 뮐러에 따르면, 두 가지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하나는 태양이 행성들을 끌어 당기듯이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사회적 아름다움이다 — 이는 압도적으로 고대의 아름다움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아름다움으로,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 자신이 아름다움을 끌어 당기는 태양이 되기 때문이다 — 이것은 새로운 예술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모순들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이 같은 보편적 일치의 반복이다. 최고의 예술은 삶의 예술이다.
The next philosopher to have great influence on the aesthetic notions of our time was Schelling, a contemporary of Fichte and his followers. According to Schelling, art is the product or consequence of a world view in which the subject becomes its own object, or the object itself its own subject. Beauty is the representation of the infinite within the finite. And the main character of the work of art is unconscious infinity. Art is the uniting of the subjective with the objective, of nature and reason, of the unconscious with the conscious. And therefore art is the highest means of knowledge. Beauty is the contemplation of things in themselves, as they are in the foundation of all things (in den Urbildern). The beautiful is produced not by the artist, through his own knowledge or will, but by the idea of beauty itself. 우리 시대의 미학적 견해들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다음의 철학자는 쉘링으로, 피히테와 그의 추종자들과 동시대 인이다. 쉘링에 의하면, 예술은 주체가 자신의 객체가 되거나, 객체 자체가 자신의 주체가 되는 세계의 시각의 산물 또는 결과이다. 아름다움은 유한함 안의 무한함의 표출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주된 성격은 의식하지 못하는 무한성이다. 예술은 자연과 이성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무의식을 의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예술은 지식의 최고의 수단이다. 아름다움은 사물들을 그 자체들로 감상함이며, 그것들은 만물의 기초 안에 있다 (in den Urbildern). 아름다움은 예술가에 의해, 자기 자신의 지식 또는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Among Schelling’s followers the most notable was Solger with his Vorlesungen über Ästhetik. [23] According to Solger, the idea of beauty is the principal idea of any thing. In the world we see only the perversion of the principal idea, but art, through imagination, may rise to the height of the principal idea. And therefore art is the likeness of creation. 쉘링의 추종자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 사람은 Vorlesungen über Ästhetik를 지은 솔거이다. 솔거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개념은 모든 것의 제일 개념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오직 제일 개념의 왜곡만을 볼 뿐이지만, 예술은, 상상을 통하여, 제일 개념의 높이에 이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창조와 비슷하다.
According to another of Schelling’s followers, Krause, [24] true and real beauty is the manifestation of the idea in an individual form; and art is the realization of beauty in the realm of the free human spirit. The highest stage of art is the art of life, which directs its activity to the adornment of life, so as to make it a beautiful place for the beautiful man to live. 쉘링의 추종자들 중 또 한 사람인 크라우스에 따르면, 진실되며 사실적인 아름다움은 개인적 형태 안에서 개념의 표현이다; 그리고 예술은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영역 안에서 아름다움의 실현이다. 예술의 최고의 경지는 삶의 예술이며, 이것은 그 활동성을 삶의 장식으로 향하게 하며, 그리하여 이곳이 아름다운 사람이 살기 위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After Schelling and his followers comes the new aesthetic teaching of Hegel, still held to this day, consciously by many, unconsciously by most. This teaching is not only no clearer or more definite than the preceding ones, but is, if such were possible, still more foggy and mystical. 쉘링 및 그의 추종자들 후에 헤겔의 새로운 미학적 가르침이 나오는데, 오늘날도 의식적으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론 대부분에 의해, 여전히 지지되고 있다. 이 가르침은 이전의 것들에 비해 더욱 명료하거나 확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함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막연하며 모호하다.
According to Hegel, God manifests himself in nature and art in the form of beauty. God expresses himself in two ways: in the object and in the subject, in nature and in spirit. Beauty is the idea shining through matter. Only the spirit, and all that partakes of the spirit, is truly beautiful, and therefore the beauty of nature is merely a reflection of the beauty proper to the spirit: the beautiful has only spiritual content. But the spiritual must manifest itself in a sensuous form. Yet the sensuous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merely an appearance (Schein). This appearance is the sole reality of the beautiful. Art, then, is the realization of this appearance of the idea, and is a means, together with religion and philosophy, of bringing to consciousness and giving utterance to the profoundest tasks of men and the highest truths of the spirit. 헤겔에 따르면, 신이 자연과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모습으로 스스로 드러낸다. 신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그리고 주체에서, 자연에서 그리고 정신에서. 아름다움은 물질을 통해 빛나는 개념이다.오직 정신만이, 그리고 정신을 공유하는 모든 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우며, 그러므로 자연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정신에 적합한 아름다움의 반영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오직 정신적인 내용을 지닌다. 하지만 정신적인 것은 반드시 관능적인 형태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정신의 관능적 표현은 단지 외양(Schein)일 뿐이다. 이 외양은 아름다움의 유일한 실체이다. 예술은, 그렇다면, 개념에 대한 이런 외양의 실현이며, 종교 및 철학과 더불어, 의식으로 다가감 및 사람의 가장 심오한 과제들 및 정신의 최고의 진리들을 뱉어냄의 수단이다.
Truth and beauty, according to Hegel, are the same. The only difference is that truth is the idea in itself, as it exists in itself and is thinkable, while the idea expressed externally becomes, for consciousness, not only true but also beautiful. The beautiful is the manifestation of the idea. 진리 및 아름다움은, 헤겔에 의하면, 동일한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생각될 수 있기에, 그 자체로서 개념이며,  반면에 외적으로 표현된 개념은, 인식을 위하여, 참되어 질 뿐 아니라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은 개념의 표현이다.
After Hegel came his many followers: Weisse, Arnold Ruge, Rosenkrantz, Theodor Vischer, [25] and others. 헤겔에 뒤이어 그의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 바이스, 아놀드 루즈, 로렌크란트, 테오도르 비셔 등이다.
According to Weisse, art is the introduction (Einbildung) of the absolute spiritual essence of beauty into external, dead and indifferent matter, understood, apart from the beauty introduced into it, as the negation of any existence in itself (Negation alles Fürsichseins). 바이스에 의하면, 예술은 아름다움의 절대적 영적 정수를 외적이며 죽어있고 무감각한 물질에 주입함이며, 그것 안에 주입되는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그 자체 안에서 어떤 존재의 부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Negation alles Fürsichseins).
In the idea of truth, says Weisse, there lies a contradiction between the subjective and the objective sides of knowledge, in that the singular I perceives the All. This contradiction can be removed by means of a concept that would unite into one the moments of allness and oneness, which fall into two in the concept of truth. This concept would be a reconciled (aufgehoben) truth — and beauty is such a reconciled truth. 바이스는 말하기를, 진리의 개념 안에는 진리의 주관적 및 객관적 측면들 사이의 모순이 놓여 있으며, 그 안에서 단수의 내가 모든 것을 인지한다. 이 모순은 전체성 및 단일성의 한 순간들로 결합해 나가는 개념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으며, 이것은 진리의 개념 안에서 둘로 나누어 진다. 이 개념은 일종의 절충된 진리일 것이다 -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와 같은 절충된 진리이다.
According to Ruge, a strict Hegelian, beauty is the self-expressing idea. The spirit, as it contemplates itself, finds itself expressed either fully — and then this full self-expression is beauty — or not fully — and then the need arises in it to change its imperfect expression, in which event spirit becomes creative art. 엄격한 헤겔주의자인, 루즈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자신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정신은, 스스로를 주시하면서 완전하게 — 이 경우 이런 완전한 자기 표현은 아름다움이다 — 또는 완전하지 않게 — 이 경우 그 안에서 불완전한 표현을 바꾸고자 하는 필요성이 생겨나며, 이 경우 정신은 창의적인 예술로 된다 — 표현되는 것이다.
According to Vischer, beauty is the idea in the form of a limited manifestation. The idea itself is not indivisible, but constitutes a system of ideas which are represented by ascending and descending lines. The higher the idea, the more beauty it contains, but even the lowest contains beauty, because it constitutes a necessary link in the system. The highest form of the idea is the person, and therefore the highest art is that which has the highest person for its subject. 비셔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일종의 제한적 표현의 모습을 한 개념이다. 개념 자체는 나눌 수 없지만 상향 및 하향 선들로 대표되는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한다. 개념이 고상할 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지닌다, 하지만 심지어 최악이더라도 아름다움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체계적으로 필요한 연결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상한 형태의 개념은 인격이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예술은 그 주제에 합당한 가장 고상한 인격을 지니는 것이다.
Such are the German theories of aesthetics of the Hegelian tendency only; but aesthetic discussions are not thereby exhausted: alongside Hegelian theories, there appeared simultaneously in Germany theories of beauty which not only do not recognize Hegel’s propositions about beauty as the manifestation of the idea, and art as the expression of this idea, but which are directly opposed to such a view, deny it, and laugh at it. Such are the theories of Herbart [26] and, particularly, of Schopenhauer. 이러한 것들은 오직 헤겔 학파의 경향의 미학 이론들이다; 그러나 미학적인 논의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헤겔 파의 이론들과 병행하여, 개념의 표상으로서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런 개념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헤겔의 명제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관점에 정면으로 반대되며, 그것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이론들이 동시에 독일에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헤르바트, 특히, 쇼펜하우어의 이론들이다.
According to Herbart, beauty does not and cannot exist in itself; what exists is only our judgement, and it is necessary to find the principles of this judgement (ästhetisches Elementarurteil). These principles of judgement are related to impressions. There exist certain relations which we call beautiful, and art consists in finding these relations — simultaneous in painting, plastic art and architecture; both successive and simultaneous in music; and successive alone in poetry. In opposition to the previous aestheticians, Herbart holds that beautiful objects often express nothing at all — a rainbow, for example, which is beautiful owing to its line and colours, and by no means with regard to its mythical significance as Iris or the rainbow of Noah. 헤르바트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판단이며, 이런 판단의 원리들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ästhetisches Elementarurteil). 이와 같은 판단의 원리들은 인상들에 관계되어 있다.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특정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은 이런 관계들 — 미술, 조형 예술 및 건축에서는 동시적인; 음악에서는 연속적이며 동시적인; 그리고 시에서는 단지 연속적인 — 을 발견함에 있다. 이전의 미학자들에 반대하면서, 헤르바트는 아름다운 물체들은 때때로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무지개는, 예를 들면, 그 선과 색상들 때문에 아름다우며, 그리고 결코 아이리스 또는 노아의 무지개처럼 신화적 의미와 관련해서가 아니다.
Another opponent of Hegel was Schopenhauer, who denied the entire system of Hegel, including his aesthetics. 헤겔의 다른 반대자는 쇼펜하우어였으며, 그는 헤겔의 전체 시스템을, 그의 미학과 함께, 부정하였다.
According to Schopenhauer, the will is objectivized in the world on various levels, and the higher the level of its objectivization, the more beautiful it is — each level having its own beauty. Abstraction from our own individuality and contemplation of one of these levels of the manifestation of will gives us the consciousness of beauty. All men, according to Schopenhauer, possess the ability to perceive this idea on its different levels and thereby to be liberated for a time from their person. The artistic genius has this ability in the highest degree, and therefore manifests the highest beauty.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가 다양한 수준들에서 세상에 객관화되며, 객관화가 높은 수준일수록, 그것은 — 각기 단계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니면서 — 더 아름답다. 우리 자신의 개체성으로부터 추상화 그리고 의지의 표현에 대한 이런 단계들 중의 하나에 대한 감상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부여한다. 모든 사람들은, 소펜하우어에 의하면, 상이한 단계들에 관한 이런 개념을 인지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그들의 인격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예술적 천재는 이런 능력을 최고도의 지닌다, 그리고 그러므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After these more prominent figures there come less original German writers, who excercised less influence, such as Hartmann, Kirchmann, Schnasse, Helmholtz to some extent, Bergmann, Jungmann [27] and a numberless host of others. 좀더 특출한 이들 인물들 다음으로 덜 독창적인 독일 작가들이, 그들은 덜한 영향을 행사하였는데, 하트만, 키르쉬만, 쉬나스, 헴홀츠 등이 어떤면에서 그러하며, 베르그만, 융만 및 기타의 수많은 무리들이 나타난다.
According to Hartmann, beauty is not in the external world, not in the thing in itself, nor in the soul of man, but in the semblance (Schein) produced by the artist. A thing is not beautiful in itself, but the artist transforms it into beauty. 하트만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외적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있으며, 사람의 영혼 안이 아니라 예술가가 만들어낸 유사품 (Schein)에 있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예술가가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킨다.
According to Schnasse, there is no beauty in the world. In nature there is only an approximation of it. Art gives what nature cannot give. Beauty is manifested in the activity of the free I, conscious of a harmony that is not in nature. 쉬나스에 의하면, 세상에 아름다움은 없다. 자연에는 오직 그것에 근접한 것이 있다. 예술은 자연이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아름다움은 자유로운, 자연에 있지 않은 조화를 인식하는, 나의 활동 안에서 표출된다.
Kirchmann wrote on practical aesthetics. According to Kirch­mann, there are six realms of history: the realms of (1) knowledge, (2) wealth, (3) morality, (4) religion, (5) politics and (6) beauty. Activity within this last realm is art. 키르쉬만은 실용적 미학에 관해 썼다. 키르쉬만에 의하면, 역사에는 여섯가지 영역들이 있다: (1) 지식, (2) 부, (3) 도덕, (4) 종교, (5) 정치 및 (6) 아름다움의 영역들이다. 이 마지막 영역의 활동이 예술이다.
According to Helmholtz, who wrote on beauty in relation to music, beauty in a musical work is invariably attained only by following laws — but these laws are unknown to the artist, and therefore beauty is manifested in the artist unconsciously and cannot be subjected to analysis. 헴볼츠에 의하면, 그는 음악과 관련한 아름다움을 썼는데, 음악 작품에서의 아름다움은 여지없이 오직 다음과 같은 법칙에 의해서 성취된다  — 하지만 이런 법칙들은 예술가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예술가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며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ccording to Bergmann in his Über das Schöne, beauty cannot be defined objectively; beauty is perceived subjectively, and therefore the task of aesthetics is to determine what is pleasing to whom. 베르그만에 의하면, 그의 작품 Über das Schöne에서, 아름다움은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러므로 미학의 과제는 누구에게 즐거운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According to Jungmann, beauty is first of all a supersensory quality; secondly, beauty produces pleasure in us through contemplation alone; thirdly, beauty is the basis of love. 융만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초감각적 성질이다; 둘째로, 아름다움은 오직 감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쾌락을 만들어 준다; 셋째로, 아름다움은 사랑의 기초이다.
In recent times, the aesthetic theories of the French, the English and other nations have been represented mainly by the following: 근대에 있어서, 프랑스, 영국 및 기타 국가들의 미학적 이론들은 주로 다음과 같이 대표되었다:
In France, the promirient writers on aesthetics have been Cousin, Jouffroy, Pictet, Ravaisson, [28] and Lévêque. 프랑스에서 미학에 관한 특출한 작가들은 쿠셍, 주프로이, 피테, 라베송 및 레베크였다.
Cousin was an eclectic and a follower of the German idealists. According to his theory, beauty always has a moral basis. Cousin refutes the proposition that art is imitation, and that the beautiful is that which is pleasing. He maintains that beauty can be defined in itself and that its essence consists in diversity and unity. 쿠셍은 절충주의자 및 독일 관념론자들의 추종자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언제나 도덕적 토대를 지닌다. 쿠셍은 예술은 모방이라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은 즐거운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서 정의될 수 있으며 그 본질은 다양성 및 통일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After Cousin, Jouffroy wrote on aesthetics. Jouffroy, too, was a follower of the German aestheticians, and a disciple of Cousin. In his definition, beauty is the expression of the invisible by means of natural tokens which make it manifest. The visible world is the clothing by means of which we see beauty. 쿠셍 뒤에, 주프로이가 미학에 대해 썼다: 주프로이 역시 독일 미학자들의 추종자며 쿠셍의 제자였다. 그의 정의에서, 아름다움은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자연적 징표들을 이용한 보이지 않는 것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그것으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는  의상이다.
The Swiss writer Pictet repeated Hegel and Plato, supposing beauty to consist in the immediate and free manifestation of the divine idea, which manifests itself in sensuous images. 스위스 작가 피테는 헤겔과 플라톤을 모방하였고, 아름다움은 신적인 개념의 즉각적이며 자유로운 표현에 있으며, 이는 관능적인 영상들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Lévêque was a follower of Schelling and Hegel. According to him, beauty is something invisible concealed in nature. Power of spirit is the manifestation of ordered energy. 레베크는 쉘링과 헤겔의 추종자였다. 그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자연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다. 정신의 힘은 질서를 갖춘 힘의 표현이다.
Similarly indefinite were the opinions on the essence of beauty expressed by the French metaphysician Ravaisson: ‘La beauté la plus divine et principalement la plus parfaite — contient le secret.’ In his opinion, beauty is the aim of the world: ‘Le monde entier est l’oeuvre d’une beauté absolue, qui n’est la cause des choses que par l’amour qu’elle met en elles. [29] 유사하게 불확실한 것은 프랑스 형이상학자 라베송에 의해 표현된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의견들이었다: 가장 신적이며 근본적으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은 비밀을 지닌다. 그의 의견에서, 아름다움은 세상의 목적이다: 전체 세상은 하나의 절대적 아름다움의 작품이며, 이것은 사물들의 원인으로 오직 사랑을 통해 그들 안에 놓인다.
I have purposely left these metaphysical expressions untranslated because, foggy though the Germans may be, the French, once they have read the Germans and begun to imitate them, surpass them by far, putting together concepts of various sorts and substituting one for another without discrimination. So the French philosopher Renouvier, also discussing beauty, says: ‘Ne craignons pas de dire quune verité qui ne serait pas belle, n’est qu’unjeu logique de notre esprit et que la seule verité solide et digne de ce mm c’est la beauté.’ [30] 나는 의도적으로 이들 형이상학적인 표현들을 번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독일인들이 모호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일단 독일인들의 것을 읽고서 그것들을 흉내내기 시작하면, 그들을 훨씬 능가하며, 다양한 종류의 개념들을 끌어 모아서 이것 저것 분별 없이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는 역시 아름다움을 논하면서 말한다: '아름답지 않은 진리는 단지 마음의 논리적 게임이라는 것, 그리고 견고하며 그 이름의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 만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Besides these idealistic aestheticians, who wrote and still write under the influence of German philosophy, in France recently Taine, Guyau, Cherbuliez, Coster [31] and Veron have influenced the understanding of art and beauty. 독일 철학의 영향 아래서 글을 썼거나 아직도 쓰는 이들 이상주의적 미학자들 외에도, 프랑스에서는 최근 테느, 구야, 쉐불리에, 코스터 및 베론이 예술 및 아름다움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According to Taine, beauty is the manifestation of the essential character of some significant idea, more perfect than that in which it is expressed in reality. 테느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어떤 중요한, 현실에서 표현되는 것보다 더 완전한, 개념에 대한 핵심적 특성의 표출이다.
According to Guyau, beauty is not anything foreign to the object itself, is not some parasitic growth on it, but is the very blossoming of that being in which it is manifest. Art is the expression of life, reasonable and conscious, which evokes in us, on the one hand, the deepest sensations of existence, and, on the other hand, the loftiest feelings, the most exalted thoughts. Art raises man from his personal life into universal life not only by means of participation in the same ideas and beliefs, but also by means of the same feelings. 구야에 의하면,아름다움은 그 대상 자체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에 기생하여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내어 지는 그런 존재 자체가 피어남이다. 예술은 삶의 표현이고, 이성적이며 의식적이며, 우리 안에서 한편으로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감각들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장 숭고한 느낌들, 가장 고양된 사상들이다. 예술은 사람을  동일한 개념들 및 신념들에 참여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들에 의해서 그의 개인적 삶에서 보편적 삶으로 일으켜 세운다.
According to Cherbuliez, art is an activity which (1) satisfies our innate love of images (appearances); (2) introduces ideas into these images; and (3) gives pleasure simultaneously to our senses, heart and reason. Beauty, according to Cherbuliez, is not a property of objects, but is an act of our soul. Beauty is an illusion. There is no absolute beauty, but we think beautiful that which we think is characteristic and harmonious. 쉐불리에에 의하면, 예술은 (1) 형상(외양)들에 대한 우리의 선천적 사랑을 만족시키며; (2)개념들일 이들 형상들 속으로 도입하며; (3) 동시에 우리의 감각들, 마음과 이성에 쾌락을 주는 활동이다. 아름다움은, 쉐불리에에 의하면, 물체들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행위이다. 아름다움은 환상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기에 특징적이고 조화로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According to Coster, ideas of the beautiful, the good and the true are innate. These ideas illuminate our reason and are identical with God, who is goodness, truth and beauty. The idea of beauty includes within itself unity of essence, diversity of component elements, and that order which unity introduces into the diversity of life’s manifestations. 코스터에 의하면, 아름다움, 선함 및 참의 개념들은 선천적이다. 이들 개념들은 우리의 이성을 빛내고 신과 동일하며, 그분은 선이며 진리이며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의 개념은 그 자체 안에서 본질적 통일성, 구성 요소들의 다양성 및 통일성이 삶의 표출들에 대한 다양성으로 도입하는 그런 질서이다.
I will cite, for the sake of completeness, some of the most recent writings on art. 완전을 기하기 위해 예술에 관한 최근의 작품들 몇 가지를 인용하겠다.
La psychologie du beau et de l’art, by Mario Pilo. [32] According to Mario Pilo, beauty is the product of our physical sensations. The aim of art is pleasure, but for some reason this pleasure must be regarded as highly moral. 마리오 필로의 아름다움과 미의 심리 (La psychologie du beau et de l’art). 마리오 필로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들의 산물이다. 예술의 목적은 쾌락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이 쾌락은 매우 도덕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Then there are the Essais sur l’art contemporain of H. Fierens Gevaert, [33] according to whom art depends on its connections with the past and on the religious ideal that an artist of the present sets for himself, lending his work the form of his own individuality. 다음으로 피렌스 게바르트의 현대 예술 소론(Essais sur l’art contemporain)으로, 그에 의하면 예술은 그것의 과거와의 관계들 및 현재의 예술가가 자신에게 설정한 종교적 이상에 의존하며, 그의 작품은 자기 자신의 개성의 모습을 띠게 된다.
Then there is Sar Peladan’s L’art idéaliste et mystique. According to Peladan, beauty is one of the expressions of God. ‘Il n’y a pas d’autre Realité que Dieu, il n’y a pas d’autre Verité que Dieu, il n’y a pas d’autre Beauté que Dieu.’ [34] This is a very fantastic and ignorant book, but characteristic in its propositions and in the modicum of success it is having among French youth. 다음으로 사르 펠라당의 이상주의 및 신비주의 예술(L’art idéaliste et mystique)이 있다. 펠라당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신의 표현들 중의 하나다. 신 이외의 현실은 없다, 신 이외의 진리는 없다, 신 이외의 아름다움은 없다. 이것은 매우 환상적이며 무지한 책이지만, 그 명제들은 특징적이며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Such are all the aesthetic systems spread in France recently, to which Véron’s book, L’esthétique, stands as an exception in its clarity and intelligence. Though it does not give a precise definition of art, it at least removes from aesthetics the foggy concept of absolute beauty. 이것들은 모두 최근에 프랑스에 퍼져 있는 미학 체계들로, 베론의 책, 미학(L’esthétique)은 그 명료성 및 지성에서 이들에서 예외적이다. 비록 그 책이 예술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리지 않지만, 적어도 미학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모호한 개념을 제거한다.
According to Veron, art is the manifestation of feelings (émotion), conveyed externally by a combination of lines, forms, colours, or a sequence of gestures, sounds, or words subject to certain rhythms. 베론에 의하면, 예술은 감정들(émotion)의 표출로서, 선들, 모양들, 색상들 또는 연속적인 몸짓들, 소리들, 또는 특정한 리듬에 귀속된 단어들의 조합에 의해 외적으로 전달된다.
In England during this time, writers on aesthetics define beauty more and more frequently not by its proper quality, but by taste, and the question of beauty is replaced by the question of taste. 이 시기 동안의 영국에선, 미학에 관한 작가들은 아름다움을 점점더 그것에 적절한 성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취향에 의해서 정의하며, 아름다움의 문제는 취향의 문제로 대체된다.
After Reid, [35] who recognized beauty as being dependent solely on the contemplator, Alison, in his book On the Nature and Principles of Taste (1790), proves the same thing. The same was also asserted by Erasmus Darwin, grandfather of the famous Charles. He says that we find beautiful that which in our view is connected with what we love. Along the same lines is Richard Knight’s book, An Analytical Inquiry into the Principles of Taste (1805). 아름다움은 오직 관찰자에 의존한다고 인식하는 레이드에 이어서, 알리슨은,그의 책 향의 본질과 원리들 (1790)에서, 동일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 동일한 내용은 유명한 찰스 다아윈의 조부인 에라스무스 다윈에 의해서도 주창되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연관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리처드 나이트의 책, 취향의 원리들에 대한 분석적 연구(1805)도 동일 선상에 있다. .
Along the same lines are the majority of English aesthetic theories. In England, at the beginning of this century, the prominent writers on aesthetics were Charles Darwin (to some extent), Spencer, Todhunter, Morley, Grant Alien, Ker and Knight. [36] 동일 선상들에는 대다수 영국 미학 이론들이 있다. 영국에선, 이 세기의 초창기에, 미학에 관한 뛰어난 작가들은, 찰스 다아윈(어느 정도까지는), 스펜서, 토드헌터, 몰리, 그랜트 엘리언, 케르 및 나이트가 있다.
According to Charles Darwin in his Descent of Man (1871), beauty is a feeling proper not only to man but to animals, and therefore to the ancestors of man as well. Birds adorn their nests and appreciate the beauty of their mates. Beauty has influence on marriage. Beauty includes the notion of differing characters. The art of music originated in the calling of male to female. 저서 인류의 유래(1871)에서 찰스 다아윈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그리고 그러므로 인류의 선조들에게도 고유한 느낌이다. 새들은 그들의 둥지들을 치장하고 그들 짝의 아름다움을 인식한다. 아름다움은 혼인에 영향을 미친다. 아름다움은 다른 성격의 관념들을 포함한다. 음악 예술은 수컷이 암컷을 부름에서 유래되었다.
According to Spencer, the origin of art is play — a thought already expressed by Schiller. In the lower animals, all the energy of life is spent on maintaining and continuing life itself; but in man, after these needs have been satisfied, there remains a surplus of energy. It is this surplus that is used in play, which passes into art. Play is a likeness of real action; art is the same. 스펜서에 의하면, 예술의 기원은 놀이 — 쉴러에 의해 이미 표현되었던 사상 — 이다. 하등 동물들에서, 삶의 모든 힘은 생명 사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킴에 사용된다; 사람에게는, 이런 필요들이 만족되고 나면, 여분의 힘이 남아 있다. 이 여분이 바로 놀이에 사용되는 것이며, 예술로 승화된다. 놀이는 실제적 행위를 모방한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The sources of aesthetic pleasure are: (1) that which exercises the senses (sight, or some other) in the fullest way, with least detriment and greatest exercise; (2) that which gives the greatest variety of evoked feelings; and (3) the combination of the first two with the idea they produce. 미학적 즐거움의 근원들은: (1) 감각들을 최고도로 활용하는 것, 최소의 장애와 최대의 활용; (2) 최대로 다양하게 고양된 느낌들을 주는 것; (3) 앞의 두 가지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개념들의 조합이다.
According to Todhunter, in The Theory of the Beautiful (1872), beauty is infinite attractiveness, which we perceive both through reason and through the enthusiasm of love. The recognition of beauty as beauty depends on taste and can in no way be defined. The only approximation to a definition is the greater cultivation of people; but what this cultivation is never gets defined. The essence of art, of that which touches us by means of lines, colours, sounds, words, is a product, not of blind forces, but of forces that are reasonable, that strive, aiding one another, for a reasonable aim. Beauty is a reconciliation of contraries. 아름다움의 이론(1872)에서 토드헌터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무한한 매력이며, 우리는 이것을 이성 및 사랑의 정열을 통해서 느낀다. 미로서 아름다움의 인식은 취향에 의존하며 결코 정의될 수 없다. 일종의 정의에 대한 유일한 접근은 사람들에 대한 더 나은 교양이다; 하지만 이 교양이 무엇인지는 결코 정의되지 않는다. 예술의, 즉, 선들, 색상들, 소리들, 단어들로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의 본질은, 맹목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이며,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서로를 도우며 애쓰는 힘에 의한 산물이다. 아름다움은 모순들의 조화이다.
According to Morley, in Sermons Preached Before the University of Oxford (1876), beauty is found in man’s soul. Nature speaks to us of the divine, and art is the hieroglyphic expression of the divine. 옥스포드 대학에서의 설교들(1876)에서 몰리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사람의 영혼에서 발견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신성에 대해 말해주고, 예술은 신성의 상형문자적 표현이다.
According to Grant Alien, a follower of Spencer, in his Psychological Aesthetics (1877), beauty is of physical origin. He says that aesthetic pleasure originates in the contemplation of the beautiful, and the idea of the beautiful is the result of a physiological process. Play is the beginning of art; having a surplus of physical force, man gives himself to play; having a surplus of receptive force, man gives himself to the activity of art. The beautiful is that which affords the greatest stimulation with the least expenditure. Differing evaluations of the beautiful come from taste. Taste can be cultivated. One must trust in the judgement of ‘the finest nurtured and most discriminative men’ — that is, men capable of a better evaluation. These people shape the taste of the next generation. 자신의 작품, 심리학적 미학(1877)에서, 스펜서의 추종자인 그랜트 엘리언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신체적 근원에서 유래된다. 그는 미학적 쾌락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상에서 유래하며, 아름다운 것의 개념은 심리학적 과정의 결과이다. 놀이는 예술의 시작이며, 여분의 신체적 힘을 가짐으로써, 사람은 자신을 놀이에 맡긴다; 여분의 수용적 힘을 지니면서, 사람은 예술의 활동에 자신을 맡긴다. 아름다움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평가들은 취향에서 온다. 취향은 배양될 수 있다. 우리는 '가장 훌륭히 양육된 가장 특이한 사람들'의 판단을 신뢰해야 한다 —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다음 세대의 취향을 만든다.
According to Ker, in his Essay on the Philosophy of Art (1883), beauty gives us the means fully to comprehend the objective world without that reference to other parts of the world which is indispensable for science. And therefore art abolishes the contradiction between unity and multiplicity, between law and phenomenon, between subject and object, uniting them in one. Art is the manifestation and affirmation of freedom, because it is free of the darkness and incomprehensibility of finite things. 케르에 따르면, 그의 저서 예술의 철학에 관한 소론(1883)에서, 아름다움은 과학에 없어서는 안될 세계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참조 없는 객관적인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법칙과 현상 사이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반목을 폐지하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예술은 자유의 표출이며 확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두움과 유한한 사물들에 대한 불가해성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According to W. A. Knight (Philosophy of the Beautiful, II, 1893), beauty is, as with Schelling, the union of object and subject; it is the extraction from nature of that which is proper to man, and the consciousness in oneself of that which is common to the whole of nature. 나이트 (아름다움의 철학, II, 1893)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쉘링과 마찬가지로, 객체와 주체의 결합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고유한 것인의 자연으로부터 추출물이며, 전체 자연에 공통적인 것인 자체 안에서의 의식이다.
The judgements of beauty and art cited here are far from exhausting all that has been written on the subject. Moreover, new writers on aesthetics appear every day, and the judgements of these new writers contain the same strange, spellbound obscurity and contradictoriness in their definition of beauty. Some continue by inertia the mystical aesthetics of Baumgarten and Hegel, with various modifications; others transfer the question to the realm of the subjective and discover that the principles of the beautiful are a matter of taste; still others —  aestheticians of the very latest formation — discover the origin of beauty in the laws of physiology; a fourth group, finally, considers the question quite independently of the notion of beauty. Thus, according to Sully, [37] in Studies in Psychology and Aesthetics (1874), the concept of beauty is completely abolished, since art, in Sully’s definition, is the production of an abiding or transient object capable of giving active enjoyment and a pleasurable impression to a certain number of spectators or listeners, regardless of the advantage to be derived from it. 여기 인용된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판단은 결코 주제에 관해 기록되어진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미학에 관한 새로운 작가들이 나날이 등장하며, 이들 새로운 작가들의 판단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정의에서 하나같이 이상하고 마법에 홀린 것 같은 모호함 및 모순성을 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무기력하게도, 여기저기 수정하면서, 바움가르텐 및 헤겔의 신비주의적 미학을 계속하며, 다른 사람들은 문제를 주관적인 영역으로 미루며 아름다움의 원리들은 취향의 문제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 — 가장 최근 등장한 미학자들 — 은 아름다움의 기원을 생리학의 법칙들에서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무리는 문제를 아름다움이란 관념에서 상당히 분리하여 고려한다. 그리하여, 술리에 의하면, 심리학과 미학에 관한 연구들(1874)에서, 아름다움의 개념은 완전히 폐지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술리의 정의에 의하면, 일정한 숫자의 구경꾼들 또는 청중들에게 적극적 즐거움 및 쾌락적 인상을 줄 수 있는, 그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이익에 관계없이, 지속적 또는 잠정적 물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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