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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by Leo Tolstoy

TRANSLATED BY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What Is Art?

예술은 무엇인가?

 

II

   
Every ballet, circus, opera, operetta, exhibition, painting, concert, printing of a book, requires the intense effort of thousands and thousands of people, working forcedly at what are often harmful and humiliating tasks. 모든 발레, 서커스, 오페라, 오페레타, 전시회, 회화, 연주회, 서적 출판은 수천 수만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며, 그들은 빈번히 해로운 것 및 수치스러운 임무들이라도 강압적으로 해내어야만 한다.
It would be well if artists did the whole job themselves, but no, they all need the help of workers, not only to produce art, but also to maintain their — for the most part luxurious — existence, and they get it in one way or another, in the form of fees from wealthy people, or in government subsidies - in our country, for instance, given them in millions for theatres, conservatories, academies. And this money is collected from the people, whose cow has to be sold for the purpose, and who never benefit from those aesthetic pleasures that art affords. 만일 예술가들이 스스로 전체 작업을 해내기라도 한다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들 모두는 노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는 예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치스럽기도 한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며, 그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보수라는 형태로, 또는 정부 보조금으로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선 극장, 예술학교, 학원 들을 위해 수백만씩이나 주어지는데 - 그것을 얻어낸다. 그리고 이 돈은 민중들로부터 거두어지며, 그들의 송아지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팔려나가지만, 예술이 제공하는 그런 미학적인 쾌락들은 누리지 못한다.
For it was well for a Greek or Roman artist, or even for a Russian artist of the first half of our century, when there were slaves and it was considered a proper thing in all good conscience to make people serve one and one’s own pleasure; but in our time, when everyone is at least dimly aware of the equal rights of all people, it is impossible to make people labour forcedly for art, without first resolving the question whether it is true that art is such a good and important thing as to redeem this coercion. 그리스 또는 로마 예술가들에게 또는 심지어 우리의 첫 반세기의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노예들이 있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그 자신의 쾌락을 위해 봉사토록 하는 것이 모든 선량한 양심에 있어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던 때에,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누구나가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때에, 예술이 이런 강압을 유지해야 할 만큼 유익하며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인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함이 없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을 위해 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If not, it is dreadful to think that terrible sacrifices are quite possibly being offered to art in labour, people’s lives and morals, while this art is not only not useful, but is even harmful.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예술이 유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노동, 사람의 목숨들 및 윤리 안에 무시무시한 희생들이 상당히 가능성 있게 바쳐진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And therefore, for a society within which works of art emerge and are supported, it is necessary to know whether all that passes for art is indeed art, and whether all that is art is good, as is thought in our society, and, if it is good, whether it is important and worth the sacrifices demanded for its sake. And it is still more necessary for every conscientious artist to know that, so as to be confident that everything he does has meaning and is not a passion of the little circle of people among whom he lives, arousing in him a false confidence that he is doing a good thing, and that what he takes from other people as support of his — for the most part very luxurious — life will be compensated by the productions on which he is now working. And therefore the answers to these questions are especially important for our time. 그리고 그러므로, 예술 작품들이 출현하고 옹호되는 사회에게는, 예술로 여겨지는 모든 것이 진정 예술인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여기고 있는 예술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인지, 그리고 만일 그것이 유익하다면, 그것이 중요하며 그 자체를 위해 요구되는 희생들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각기 양심적인 예술가는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로써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며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조그만 범주의 사람들 만의 정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며, 그러한 정열이 그가 유익한 것을 행하고 있다는 그리고 그의 대부분 매우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지지로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취하는 것이 지금 그가 일하고 있는 작품들에 의해 보상 받으리라는 거짓된 확신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이 우리의 시대에는 특별히 중요하다.
What, then, is this art which is considered so important and necessary for mankind that it can be offered the sacrifices not only of human labor and lives, but also of goodness, which are offered to it? 이 예술이 그렇다면 무엇이길래 인류에게 그토록 중요하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이를 위해 인간의 노동력과 목숨들뿐만 아니라 선함마저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다는 것이며 바쳐지고 있는 것인가?
What is art? Why even ask such a question? Art is architecture, sculpture, painting, music, poetry in all its forms - that is the usual answer of the average man, of the art lover, and even of the artist himself, who assumes that what he is talking about is understood quite clearly and in the same way by all people. But in architecture, one may object, there are simple buildings that are not works of art, and buildings that claim to be works of art, but are unsuccessful, ugly, and which therefore cannot be regarded as works of art. What, then, is the sign of a work of art? 예술은 무엇인가? 왜 심지어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가? 예술은 건축, 조각, 그림, 음악, 시의 형태를 지니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그리고 심지어 예술가 자신의 흔한 대답이며, 그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깨닫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건축에서 우리는 예술 작품이 아닌 단순한 건물들도 있으며, 예술 작품이라고 주장되는 건물들도 성공적이지 못하고 추하여서 예술 작품들로 여겨질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무엇이, 그렇다면, 예술 작품의 증거란 말인가?
It is exactly the same in sculpture, and in music, and in poetry. Art in all its forms borders, on the one hand, on the practically useful, and on the other, on unsuccessful attempts at art. How to separate art from the one and the other? The average educated man of our circle, and even the artist who is not especially concerned with aesthetics, will also not find this a difficult question. He thinks the answer was found long ago and is well known to everyone. 조각에서 그리고 음악에서 그리고 시에서도 정말 동일하다. 모든 형태의 예술은, 한편으로 실용적으로 유익한 것과, 다른 한편으로, 예술을 향한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들과 맞닿아 있다. 전자 및 후자들과 예술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우리 주변의 보통의 교육받은 사람, 그리고 심지어는 특별히 미학에 관심이 없는 예술가라도 이것이 어려운 질문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는 이 답이 오래 전에 밝혀졌으며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Art is that activity which manifests beauty,’ such an average man will reply.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활동이다,라고 그와 같은 보통 사람은 대답할 것이다.
‘But, if art consists in that, then is a ballet or an operetta also art?’ you will ask. 하지만, 만일 예술이 그 점에 있다면, 발레나 오페레타도 예술인가? 하고 묻게 된다.
‘Yes,’ the average man will reply, albeit with some uncertainty. ‘A good ballet and a graceful operetta are also art in as much as they manifest beauty.’ 그렇다, 하고 약간 확신이 없더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대답할 것이다. 훌륭한 발레와 우아한 오페레타도 역시 아름다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But even without going on to ask the average man what distinguishes the good ballet or the graceful operetta from the ungraceful — a question it would be very difficult for him to answer — if you ask the same average man whether one can regard as art the activity of the costume-maker and hairdresser who adorn the figures and faces of women in the ballet or operetta, or the activity of the tailor Worth, or of the perfumer or the chef, he would in the majority of cases deny that the activity of the tailor, the hairdresser, the costume-maker and the chef belong to the realm of art. But here the average man will be mistaken, precisely because he is an average man and not a specialist, and has not studied the questions of aesthetics. If he should study them, he would see in the famous Renan, in his book Marc Aurèle, [2] a discussion about the art of the tailor being art, and about the dullness and limitedness of people who do not see in woman’s attire a matter of the highest art. ‘C’est le grand art,’ he says. Moreover, the average man would learn that in many aesthetic systems — for instance, in the aesthetics of the learned professor Kralik, Weltschönheit, Versuch einer allgemeinen Ästhetik, and in Guyau’s Les problemes de l’esthétique [3] the arts of costume, of taste and of touch are recognized as arts. 하지만 심지어 보통 사람에게 훌륭한 발레 또는 우아한 오페레타를 우아하지 못한 것을 무엇으로 구별할 것인지 그에게 있어 대답하기에 매우 어려운 질문이겠지만 - 묻지 않더라도, 만일 당신이 동일한 보통사람에게 발레나 오페레타에서 여자들의 외모나 얼굴들을 치장하는 의상 제작자나 미용사의 활동을, 재봉사 또는 분장사 또는 요리사의 활동을 예술로 여길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는 대부분의 경우 재봉사, 미용사, 의상제작자 및 요리사의 활동이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보통 사람은 실수를 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보통 사람이고 전문가가 아니며, 미학의 질문들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들을 공부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유명한 르낭의 책, Marc Aurèle에서 재봉사의 예술도 예술이며 여자의 의상에서 최고의 예술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둔감함 및 편협함에 대한 토론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C’est le grand art’ 라고 말한다. 게다가, 보통 사람은 많은 미적 체계들에서, 예를 들자면, 학식 있는 교수인 쿠랄릭의 미학, Weltschönheit, Versuch einer allgemeinen Ästhetik 그리고 구야 Les problemes de l’esthétique에서 의상의, 맛의 그리고 감각의 예술들이 예술들로 인식된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Es folgt nun ein Fünjblatt van Künsten, die der subjectiven Sinnlichkeit entkeimen [There follows then a cinquefoil of arts growing out of the subjective senses],’ says Kralik. ‘Sie sind die ästhetische Behandlung der fünf Sinne.’ [4] ‘Es folgt nun ein Fünjblatt van Künsten, die der subjectiven Sinnlichkeit entkeimen [그리고 주관적인 느낌들에서 자라나오는 다섯 잎의 예술들이 따른다],’ 라고 크라리크는 말한다. ‘Sie sind die ästhetische Behandlung der fünf Sinne.’
These five arts are the following: 이들 다섯 가지 예술 들은 다음과 같다:

Die Kunst des Geschmacksinns - the art of the sense of taste.
Die Kunst des Cemchsinns — the art of the sense of smell.
Die Kunst des Tastsinns - the art of the sense of touch.
Die Kunst des Gehdrsinns- the art of the sense of hearing.
Die Kunst des Cesichtsinns - the art of the sense of sight.

Die Kunst des Geschmacksinns — 미각 예술

Die Kunst des Cemchsinns — 후각 예술

Die Kunst des Tastsinns — 감각 예술

Die Kunst des Gehdrsinns — 청각 예술

Die Kunst des Cesichtsinns — 시각 예술

Of the first, die Kunst des Geschmacksinns, the following is said: 이 중에서 먼저, die Kunst des Geschmacksinn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Man halt zwar gewohnlich nur zwei oder hochstens drei Sinne fur würdig, den Stoff künstlerischer Behandlung abzugeben, aber ich glaube nur mit bedingtem Recht. Ich will kein allzu grosses Gewicht darauflegen, dass der gemeine Sprachgebrauch manch andere Künste, wie zum Beispiel die Kochkunst, kennt. 예술적 재료는 흔히 오직 두 가지나 기껏해야 세가지 감각들로서 취급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거의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를 들면, 요리가 예술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And further on: 그리고 나아가서:
Und es ist doch gewiss eine ästhetische Leistung, wenn es der Kochkunst gelingt aus einem thierischen Kadaver einen Gegenstand des Geschmacks in jedem Sinne zu machen. Der Grundsatz der Kunst des Geschmacksinns (die weiter ist als die sogenannte Kochkunst) ist also dieser: Es Soil alles Geniessbare als Sinnbild einer Idee behandelt werden und in jedesmaligem Einklang zur auszudrückenden Idee. [5] 그것은 물론 요리 예술이 미각에 어울리는 어떤 것을 동물의 시체로부터 만들어 갈 때 미학적인 성공이다. 그러므로 미각 예술(이후 요리 예술로 언급됨)의 근본 원리는 이것이다: 식용 가능한 모든 것은 어떤 개념에 대한 감각 이미지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경우에도, 표현되고자 하는 개념과 일치하여야 한다.
Like Renan, the author also recognizes a Kostumkunst, and so on. 르낭처럼, 작가는 또한 의상예술, 등등을 인정한다.
The same opinion is held by the French writer Guyau, who is very highly esteemed by some writers of our time. In his book Les problemes de l’esthétique, he speaks seriously of the senses of touch, taste and smell giving or being able to give aesthetic impressions: 동일한 의견은 프랑스 작가 구야에 의해 견지되며, 그는 우리 시대의 일부 작가들에게서 매우 높이 인정 받고 있다. 그의 책 미학의 문제(Les problemes de l’esthétique)에서, 그는 미적인 인상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촉각, 미각 및 후각을 중요하게 이야기 한다:
Si la couleur manque au toucher, il nous fournit en revanche une notion, que l’oeil seui ne peut nous donner et qui a une valeur esthétique considérable: celle du doux, du soyeux, du poli. Ce qui caractérise la beauté du velours, c’est la douceur au toucher non moins que son brillant. Dans l’idée que nous nous faisons de la beauté d’une femme, la velouté de sa peau entre comme élément essentiel. 만일 촉각에 색상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것은 대신에 눈 혼자만이 우리에게 줄 수 없으며, 상당한 미적인 가치를 지닌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비단같은, 매끈매끈한 느낌. 벨벳의 미를 특징짓는 것은 만져서 부드러운 것이지 그것의 광택이 아니다. 여자의 미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개념 안에는 다른 피부의 부드러움이 필수적인 요소로 들어간다.
Chacun de nous probablement avec un peu d’attention se rappellera des jouissances du goût, qui ont été de véritables jouissances esthétiques. [6] 우리 각자는, 조그마한 주의로도, 아마도 진정한 미학적 즐거움이었던 취향의 즐거움 들을 회상할 수 있다.
And he tells how a glass of milk drunk in the mountains gave him aesthetic pleasure.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산 속에서 마신 한 잔의 우유가 그에게 미학적인 즐거움을 주었는지 말한다.
Thus the notion of art as the manifestation of beauty is not at all as simple as it seems, especially now when our senses of touch, taste, and smell are included in it, as they are by the latest aestheticians. 그래서 아름다움의 표출로서 예술의 상징은, 최근의 미학자들에 의해 그런 것처럼, 특히 지금 우리의 촉각, 미각, 및 후각이 그 안에 포함될 때  겉보기처럼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
But the average man either does not know or does not want to know this, and is firmly convinced that all questions of art are simply and clearly resolved by the recognition of beauty as the content of art. For the average man it seems clear and comprehensible that art is the manifestation of beauty; and by beauty all questions of art are explained to him. 하지만 보통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모든 예술의 문제는 예술의 내용으로서 아름다움의 인식에 의해 단순 명쾌하게 해결된다고 확신한다. 보통 사람에게 있어 예술은 아름다움의 표출이며, 아름다움으로 모든 예술에 대한 문제들이 그들에게 설명된다는 것이 명백하고 납득이 가는 것처럼 보인다.
But what is this beauty which, in his opinion, makes up the content of art? How is it defined, and what is it? 하지만, 그의 생각에서, 예술의 내용을 구성하는 이 아름다움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정의되며, 그것은 무엇인가?
As happens with everything, the more vague and confused the concept conveyed by a word, the greater is the aplomb and assurance with which people use the word, pretending that what is understood by this word is so simple and clear that it is not even worth talking about what it actually means. This is how people usually act with regard to questions of religious superstition, and this is how they act in our time with regard to the concept of beauty. It is assumed that everyone knows and understands what is meant by the word beauty. And yet not only is this not known, but now, after mountains of books have been written on the subject by the most learned and profound men over the course of one hundred and fifty years — since 1750, when Baumgarten founded aesthetics [7] — the question of what beauty is remains completely open, and each new work on aesthetics resolves it in a new way. One of the latest books I happen to have read on aesthetics is a nice little book by Julius Mithalter, entitled Rätsel des Schönen [‘The Riddle of the Beautiful’]. And this title expresses quite correctly the state of the question of what beauty is. After thousands of learned men have discussed it for one hundred and fifty years, the meaning of the word beauty has remained a riddle. The Germans resolve this riddle after their own fashion, albeit in hundreds of different ways; the psychologist-aestheticians, mostly Englishmen of the Herbert Spencer—Grant Alien school, [8] also each in his own fashion; the French eclectics and the followers of Guyau and Taine, [9] also each in his own fashion — and all these men know all the preceding solutions of Baumgarten, Kant, Schelling, Schiller, Fichte, Winckelmann, Lessing, Hegel, Schopen­hauer, Hartmann, Schassler, Cousin, Leveque, and others. [10] 모든 것에서 일어 나듯, 말에 의해 전달되는 개념이 애매하고 혼동이 될 수록,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더 강하며, 이 말로서 깨닫는 것이 너무나 단순 명쾌하여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의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은 사람들이 종교적 미신의 문제들에 대해 흔히 대하는 방법이며, 이것이 우리 시대에 미의 개념에 대해 대하는 방법이다. 모두가 미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으며 이해하고 있다고 단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 바움가튼이 미학을 창시한 이래  150여 년 동안 가장 학식 있고 심오한 사람들에 의해 이 주제에 대해 산더미 같은 책들이 쓰여졌지만, 현재, 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열려 있으며, 미학에 대한 저마다 새로운 작품들이 이를 새로운 방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미학에 대해 내가 우연히 읽은 책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은 줄리어스 미탈터가 지은 산뜻하고 자그만 책으로, 제목은 Rätsel des Schönen['아름다움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이 제목은 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150여 년 동안 수천 명의 학자들이 이것을 토론한 뒤에도, 미란 말의 의미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이 수수께끼를 수백 가지 다른 방법들임에도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낸다, ; 심리학자-미학자들, 대부분 허버트 스펜서와 그랜트 엘리언 학파의 영국인들 역시 그들 방식대로; 프랑스의 절충주의자들 및 구야와 테인의 추종자들 역시 그들 방식대로 풀어 나간다 —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은 바움가튼, 칸트, 쉘링, 쉴러, 피히테, 윙켈만, 레싱, 헤겔, 소펜하우어, 하트만, 쉴라슬러, 코셍, 레베크, 등의 앞서 내놓은 모든 해법들을 알고 있다.
What, then, is this strange concept of beauty, which seems so comprehensible to those who do not think about what they are saying, while for one hundred and fifty years, philosophers of various nations and of the most various trends have been unable to agree on its definition? What is this concept of beauty, upon which the reigning doctrine of art is based? 그러면, 미에 대한 이런 이상한 개념은 무엇이길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매우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150여 년 동안, 많은 국가들 및 매우 다양한 경향의 철학자들은 그 정의에 합의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인가? 이런 미의 개념이 무엇이길래, 예술의 지배적 학설이 기초를 두고 있는가?
In Russian, by the word krasota [‘beauty’] we mean only that which is pleasing to the sight. Though lately people have begun to say of an action that it is nekrasivy [‘unbeautiful’, i.e. bad] or of music that it is krasivaya [‘beautiful’], this is not really Russian. 러시아에서, krasota [‘미’] 란 단어는 오직 보기에 즐거운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 nekrasivy [‘아름답지 못한’, 즉, 나쁜] 행위 또는 krasivaya [‘아름다운’] 음악을 말함에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것은 사실 러시아적이 아니다.
A Russian man of the people, who does not know foreign languages, will not understand you if you tell him that a man who gave his last clothes to another, or something like that, acted krasivo, or that by deceiving another he acted nekrasivo, or that a song is krasivaya. In Russian, an action can be kind and good, or wicked and unkind; music can be pleasant and good, or unpleasant and bad, but it can never be either beautiful or unbeautiful. 외국어를 모르는 러시아 민중인 사람은 당신이 그에게 자신의 남은 옷을 또는 비슷한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 사람이 krasivo하게 행동 했다거나, 다른 사람을 속임으로써 nekrasivo하게 행동했다거나, 어떤 노래가 krasivaya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신의 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에서, 어떤 행위는 친절할 수도 선할 수도, 또는 악할 수도 불친절할 수도 있다; 음악은 즐거울 수도 좋을 수도, 또는 불쾌할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결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을 수는 없다.
A man, a horse, a house, a view, a movement may be beautiful, but of actions, thoughts, character, music, we may say they are good, if we like them very much, or not good, if we do not like them; we can say ‘beautiful’ only of what is pleasing to our sight. So that the word and concept ‘good’ includes within itself the concept ‘beautiful’, but not vice versa: the concept ‘beautiful’ does not cover the concept ‘good’. If we say of an object valued for its appearance that it is ‘good’, we are thereby saying that this object is also beautiful; but if we say it is ‘beautiful’, that by no means implies that the object is good. 사람, 말, 집, 풍경, 움직임은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행동들, 생각들, 성격, 음악에 대해선 그것들을 매우 좋아한다면 그것들이 좋다고 말하거나,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 눈에 즐거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좋다'는 말 및 개념은 그 내부에 '아름답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아름답다'는 개념은 '좋다'는 개념을 망라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외양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어떤 물체에 대해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로써 이 물체가 또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 물체가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Such is the meaning ascribed to the words and concepts ‘good’ and ‘beautiful’ by the Russian language, and therefore by the sense of the Russian people. 러시아 언어에 의해, 그러므로 러시아 사람의 인식에 의해, '좋다' 및 '아름답다'는 말들 및 개념들에 부여된 의미는 이러하다.
In all European languages, the languages of those people among whom the doctrine of beauty as the essence of art has spread, the words beau, schön, beautiful, bello, while keeping the meaning of beauty of form, have also come to signify ‘good-ness’ — that is, have come to replace the word ‘good’. 모든 유럽 언어들에서, 미에 대한 학설이 예술의 본질로서 전파된 나라 사람들의 언어들은, 즉,다음 단어들 beau, schön, beautiful, bello은, 모양의 아름다움의 뜻을 간직하면서도, 또한 '좋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 즉, '좋다'라는 말을 대체하게 되었다.
So that these languages now quite naturally employ such expressions as belle âme, schöne Gedanken, or beautiful deed, and yet these languages do not have an apposite word for defining beauty of form and must employ such combinations of words as beau par la forme, and so on. 그래서 이들 언어들은 이제  belle âme, schöne Gedanken, 또는 beautiful deed와 같은 표현들을 매우 자연스럽게 이용한다, 하지만 이들 언어들은 모양의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대립적인 말을 가지지 않으며 beau par la forme와 같은 말들의 조합을 사용해야만 한다.
Observing the meaning that the word ‘beauty’, ‘the beautiful’, has in the Russian language, and in the languages of the people among whom aesthetic theory has been established, we see that the word ‘beauty’ is endowed by these people with some special meaning — namely, the meaning of 'good'. '미', '아름답다'라는 말이 러시아 언어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미학적인 이론이 확립된 민중의 언어들에서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면, '미'란 말은 이 사람들에 의해 어떤 특별한 의미 — 즉, '좋다'는 의미 — 를 부여 받음을 알게 된다.
The remarkable thing is that since we Russians have begun to adopt European views of art more and more, the same evolution has begun to occur in our language as well, and people speak and write with complete assurance, and without surprising anyone, of beautiful music and unbeautiful actions or even thoughts, whereas forty years ago, in my youth, the expressions ‘beautiful music’ and ‘unbeautiful actions’ were not only not in use, but incomprehensible. Evidently this new meaning with which European thought has endowed beauty is beginning to be adopted by Russian society as well. 놀라운 일은 우리 러시아 인들이 예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점들을 더 많이 채택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진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사람들은 완전한 확신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도 놀래게 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행동들 또는 심지어 생각들을 말하고 쓰고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행동들'은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었다. 명백히 유럽의 사상이 미에 부여한 이런 새로운 의미는 러시아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채택되기 시작하고 있다.
What, then, is this meaning? What, then, is beauty as understood by European people?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유럽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있는 대로의 미는 무엇인가?
In order to answer this question, I will cite at least a small number of those definitions of beauty most widely spread in existing aesthetic systems. I especially beg the reader not to be bored and to read what is cited here, or, what would be better still, to read some work on aesthetics. Not to speak of voluminous German works, some good choices for this purpose are the German book by Kralik, the English one by Knight, [11] and the French one by Leveque. It is necessary to read some work on aesthetics in order to form a personal idea of the diversity of judgments and the terrible vagueness that reign in this sphere of opinion, and not to trust the words of others in this important matter.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적어도 기존의 미학적인 체계들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그런 미의 정의들에 대한 몇 가지를 인용하겠다. 나는 특히 독자들에게 여기 인용되는 것을 읽음에 있어 지루하지 않기를, 혹, 좀 더 도움이 된다면, 미학에 관한 작품을 조금이나마 읽어 보기를 바란다. 부피가 큰 독일 작품들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런 목적을 위해 조금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고르자면, 독일어인 크라리크의 서적, 나이트가 쓴 영어 서적 및 레베크가 쓴 프랑스어 서적들이다. 이와 같은 영역의 생각들을 지배하는 다양한 판단들 및 무섭도록 모호함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형성하기 위해,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말들을 맹신하지 않기 위해, 미학에 대한 일부 작품을 읽음이 필요하다.
Here, for example, is what the German aesthetician Schassler says about the character of all aesthetic research in the preface to his famous, voluminous and thorough book on aesthetics: 여기에, 예를 들면, 독일의 미학자인 쉴라슬러가 미학에 대한 그의 유명하고 방대하며 깊이 있는 저서의 서문에서 모든 미학의 탐구의 특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있다:

One hardly finds in any other area of philosophical science such methods of research and exposition, crude to the point of contradiction, as in the area of aesthetics. On the one hand, fine phrase-making without any content, distinguished for the most part by an altogether one-sided superficiality; on the other hand, together with all its indisputable depth of research and wealth of content, a repulsive clumsiness of philosophical terminology, which clothes the simplest things in the garb of abstract scientificality, as if to make them worthy thereby of entering the bright mansions of the system; and, finally, between these two methods of research and exposition there is a third, forming a transition from the one to the other, as it were, a method consisting of eclecticism, flaunting now its fine phrase-making, now its pedantic scientificality ... A form of exposition that does not fall into any of these three defects, but is truly concrete and, while being of substantial content, expresses it in clear and popular philosophical language, is no­where more rarely to be encountered than in the area of aesthetics.

우리는 다른 어떤 철학의 영역에서도 미학의 영역 안에서처럼, 모순에 이를 정도의 미숙한 연구 및 해설 방법들을 거의 찾지 못한다. 한편으로, 훌륭한 미사여구, 어떤 내용 없이, 전적인 편향적 껍데기로 대부분 두드러지고;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연구의 깊이와 내용의 풍부함과 함께, 가장 단순한 것들을 추상적 과학성으로 포장하는, 마치 그럼으로써 장치를 갖춘 환한 대저택들로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철학적 용어의 끔찍한 엉성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구와 해설이라는 두 가지 방법들 사이에서 제 3의 것이 있으며, 이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이를 형성하는, 이를테면, 절충주의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이제 그 훌륭한 미사여구를, 이제 그 현학적 과학성을 뽐내면서... 이 세가지 약점들에 해당되지 않으며 진정으로 확고한, 반면에 상당한 내용을 지닌 가운데 그것을 명료하고 일반적인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해석의 형태는, 미학의 영역에서 만큼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없다.

It is enough simply to read the book of this same Schassler to be convinced of the correctness of his judgement. 그의 판단의 정확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저 쉴라슬러 자신의 저서를 읽어 봄으로도 충분하다.
The French writer Véron, in the preface to his very good book on aesthetics, says of this same subject: 프랑스 작가 베론은, 미학에 관한 자기 자신의 훌륭한 서문에서, 이 같은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II n’y a pas de science qui ait été de plus, que l’esthétique, livrée aux réveries des métaphysiciens. Depuis Platon jusqu’aux doc­trines officielles de nos jours, on a fait de l’art je ne sais quel amalgame de fantaisies quintessenciées et de mysteres transcendentaux, qui trouvent leur expression supreme dans la concep­tion absolue du beau idéal prototype immuable et divin des choses réelles. [12]  어떤 학문도 미학 이상으로 형이상학자들의 망상들에 많이 바쳐진 적이 없었다. 플라톤부터 우리시대의 공식적인 학설까지, 예술은 나도 모르지만 어떤 종류의 전형적인 환상들 및 초월적인 신비들의 혼합물로 만들어 졌으며, 그것들은  최고의 표현을 실재 사물들의 불변의 그리고 신성한 원형으로서 이상적 아름다움의 절대적 개념에서 찾는다.
This judgment is more than correct, as the reader will be convinced if he takes the trouble to read the following definitions of beauty which I have copied down from the major writers on aesthetics. 이런 판단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미학에 관한 주요 작가에게서 내가 베낀  아름다움에 관한 아래의 정의들을 읽어 보는 수고를 감수한다면 납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I will not cite the definitions of beauty ascribed to the ancients — Socrates, Plato, Aristotle, and up to Plotinus — because in fact the concept of beauty separate from the good, which constitutes the basis and aim of aesthetics in our time, did not exist among the ancients. In transferring ancient judgments of beauty to our own concept of beauty, as is usually done in aesthetics, we give their words a meaning they did not have (on which see the excellent book of Benard, L’esthétique d’Aristote, and Walter’s Geschichte der Ästhetik im Altertum). [13] 나는 고대인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로티누스에 이르기까지 —  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들을 인용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선과 분리된 아름다움의 개념은, 우리 시대의 미학의 기초와 목적을 구성하는 것으로, 고대인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고대의 판단들을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의 개념으로 이전함에서, 미학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들의 말에 그것들이 지니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버나드의 훌륭한 저서, L’esthétique d’Aristote 및 월터의 Geschichte der Ästhetik im Altertum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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